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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평점 :

▶ 예원은 자기가 괴담을 즐겼던 건, 괴담 속 상황을 자신이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일종의 안전한 공포랄까. 즐길 수 있는, 안전한 공포. (p.106, 「야자 중 xx 금지」)
특정한 시대적 배경이 주어졌을 때, 입담 좋게 풀어내는 괴담의 맛이 좋은 작가이다. 흔히 금기로 일컬어지는 제한된 영역이 있을 때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세계를 다채롭게 바라보고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을 포착해낸다. 저 균열에서 낯섦을 느낄 때 읽는 이는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는 않고,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선 안에서의 적당한 공포감. 그 거리감을 잘 조절해낸 단편들이라 책을 덮고서도 피부에 닿는 습함이 없는 산뜻한 괴담들은 마치 맑은 여름날의 밤바람과도 같았다.
한국적인 색채가 굉장히 강한 다섯 단편 모두 주인공은 여성이다. 「성주 단지」에서는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에 시달리는 여성, 「야자 중 xx 금지」는 여고생들, 「낭인전」 은 남편 여섯을 줄줄이 잃은 옹녀, 「풀각시」는 기억을 잃은 할머니와 원치 않은 결혼을 강요당한 손녀, 「교우촌」은 서학 신자들이 숨어 사는 마을의 여자 아이. 이들은 모두 세계가 그어낸 한계를 스스로 부수어 길을 연다는 공통점이 있다. 괴담으로 눈을 가리고 이용하여 전진하는 모습에서는 적당한 쾌감까지 느껴진다.
▶ 전 귀신은 무섭지 않아요. 사람이 무섭죠. (p.23, 「성주 단지」)
▶ 내게 살을 날릴 거다. 그게 날 지키는 방법이다. (p.203, 「풀각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아무래도 「풀각시」 였다. 옛날 옛적에 같은 배경과 매일 밤 조금씩 다가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풍수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조금 이상한 집의 구조. 할머니가 만든 풀각시, 나무 밑에서 발견된 부적으로 봉인된 상자. 어긋나는 것들이 적층되어 갈 때마다 괴이함에 가까워져 가는데 이상한 해방감도 느껴진다.
(그리고 강한 스포일러일까봐 더 이상 말은 못하겠는데, 안 좋은 일에 여성 앞세우는 것도^^ 응. 여기도 여자 바쳐서 남자 구하는 집안.)
「야자 중 xx 금지」는 흔히 이야기되는 학교 괴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금기를 어긴 여고생들과 그 대가. 이건 단편보다 조금 더 길게 써준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평범한 교실에 있으면 안되는 무언가, 그 것을 넘었을 때 펼쳐지는 다른 세계와 그 곳의 섬뜩한 존재들. 그리고 남겨진 이까지. 소재는 흔하지만 해결 방법이 통쾌한 단편이라 역시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도 전에 다른 단편들을 읽었을 때와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섬뜩하고 잔인하고 찝찝해야만 괴담이라는 인식을 부수는 맛의 이야기들이 좋았고,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님이 더 좋아졌다. 앞으로 펼쳐질 다른 이야기들도 기대가 된다.
+ 작가님이 쓰신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도 굉장히 재밌으니 한 여름밤에 츄라이. 문체부터 소재까지 전부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