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2 벽 SF 보다 2
듀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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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단절을 의도하고 싶다면 그저 벽 하나만 세우면 된다.
무기질적인 속성의 벽은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사람은 그 안에서 보호받기도 하고, 갇혀있기도 한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너머를 그려보기도 하고 그 안까지만 상상을 제한하기도 한다.
벽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속성은 작가에게 있어서는 무한히 상상력을 뻗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현실과 효과적으로 단절시키고, 오롯이 상상으로만 구축해내는 세계관을 비교적 독자에게 쉽게 납득 시킬 수 있기 때문에.

6명의 작가와 6개의 세계. 벽을 타고 넘으며 세계를 여행하다가 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어떠한 벽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SF를 읽다 보면 문득 현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는데, 이 감각과 벽이라는 소재가 너무 적절하게 어울려서 좋은 주제를 가진 단편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산화 작가의 <깡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깡총>은 특별하고 독창적인 세계관 없이 현실의 설정 단 하나 만을 비틀어서 인류 문명을 무너뜨린다.
바로 토끼. 토끼의 큰 속성은 건드리지 않는다. 초식동물이고 겁이 많고, 깡총 뛰어올라 단번에 거리를 도약한다.
작가는 여기에 추가적인 속성 하나를 넣는다. 바로 이 토끼가 깡총하고 뛰어오르는 순간 공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것. 이렇게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수억 마리의 토끼떼는 여유롭게 천적을 피하며 세계의 농업과 축산업을 무너뜨린다. 인류 문명은 그렇게 붕괴한다.
인류는 여기에 맞서 '최후의 방어선'을 쌓지만 후반에 이 방어선은 인류에게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로 전복된다. 벽의 의미가 바뀜과 동시에 토끼 사냥을 하던 주인공의 입장 역시 반대가 된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전개의 치밀함이 깔끔한 마무리를 이끌어내는 해당 작품은 작가가 벽의 속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놀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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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녀석이 여태껏 살아남아 풀을 뜯고 있는 건 오로지 토끼인 채 끝까지 깡총깡총 뛰어 도망쳐 온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살아남았다. 지성을 추월해서, 문명을 추월해서.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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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작가의 <무너뜨리기>는 특히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었다.
벽을 물질적으로 해석한 게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벽으로 표현하면서 권태로운 부부의 감정을 무덤덤하면서도 섬세하게 짚어나간다.
허물 없이 지내며 완전히 서로에게 벽이 없는 그런 사이. 이게 과연 둘에게 온전하게 좋은 일일까? 이전의 설렘을 찾기 위해 다시 서로의 사이에 벽을 쌓아 감정을 'rebuilding' 하는 것을 보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특히 결말까지 보면 한참을 그 마지막 문장에 눈이 꽂힐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은 둘에게 과연 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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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과 정진이 예전에는 서로에게 갖고 있었지만 7년간의 결혼 생활 중 어느샌가 잃어버리게 된 그것. 한때는 버거워 얼른 잃고 싶기도 했었지만 막상 잃고 나니 아쉬운, 서로를 통해서는 평생 다시 가질 수 없지만 서로가 아닌 다른 이에겐 가지면 안 되는 바로 그 감정.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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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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