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보고 웃는다면, 이 웃음에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웃는 웃음과는 다른, 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플라톤 <국가>-


대니얼 키스가 서문에 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그는 찰리 고든이란 한 인물로 그려내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만큼 한 사람의 정신적인 성장과 쇠퇴를 잘 그리는 소설은 없을거라고 생각한다(참고로 대니얼 키스는 심리학 전공자이다)

이 책은 IQ70이었던 찰리가 비크맨 대학의 뇌외과 및 심리학교수들의 도움을 받아(실험 대상이긴 하지만) IQ170이 넘는 사람이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참 정교한게, 책 전체 내용의 틀은 찰리가 수술하기 전부터 수술하고 난 뒤, 시간의 흐름대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경과보고서를 쓰는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수술 전의 찰리의 경과보고서는 맞춤법도 틀리고 , 생각도 매우 단순하고 , 솔직하다. 사실 맞춤법 틀린 보고서를 계속해서 본다는건 나름의 고역이기도 했지만 찰리가 예전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볼 수 있다.

우리가 보았을 땐 순수하게 찰리를 보며 웃어주는 것이 아님에도 그는 자신을 보고 웃는 것에 만족하고, 또 좋아한다. 그래서 그러한 순수한 찰리의 마음을 악용해서 나쁜 짓을 하거나 조롱하는 주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찰리는 모르기에, 그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앨리스 키니언 선생은 직적장애 성인센터의 교사로서, 찰리가 뇌 수술을 받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여자이다. 참 신기했던게 지능이 낮았을때의 찰리가 본 키니언 선생과, 수술을 하고나서 점점 정신적으로 발달하면서 마주하게 된 키니언 선생은 매우 다른 모습이다. 처음에 수술 전의 찰리가 경과보고서에 쓴 키니언 선생을 상상했을 땐 나이가 있는 중년의 여성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신기한 것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 보는 시각에서도 차이가 나게 되어서 키니언을 매우 매력적인 또래의 여성으로 그려낸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렸을 적 주변 인물들 , 가족들을 보았을 때를 회상하면 사진 속 그 얼굴과 좀 다른 면이 있다. 아마도 그런 시각도 뇌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에 같은 인물을 다르게 그려내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러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심리적 성장과 쇠퇴를 짧은 시간 안에 수술로 인한 성장과 부작용으로 빗대어서 총체적으로 심리학을 볼 수 있다는 면 뿐만이 아니라, 찰리의 소원이었던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잘 지내고,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동등한 친구가 되길 바랬던 , 인간적인 교류와 人間愛의 결정체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을 때 동굴속에선 다이아몬드로 보였던 그것이 사실 하나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 인간애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본연적인 고독이 있음을 깨우치는 순간, 그 순간순간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서 감동을 받았다.

그가 똑똑해지고 말고 상관 없이 그가 추구했던 것은 단 한가지였다. 비록 자신의 부모가 자길 버리듯 큰아버지에게 맡기고, 의도적으로 여동생이 자길 괴롭혔어도, 그는 가족이 보고싶었고 , 자기를 놀리고 조롱하고 괴롭히는 친구들이어도, 그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소통을 하고싶어했다.

하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장해서 뒤돌아 봤을 때, 동굴속에서 빛으로 걸어나왔을 때 자신은 빛 아래 있지만 뒤돌아보면 그림자가 짙어짐을 알게 되고, 그 그림자 속에 자신의 뒤틀렸던, 몰랐었지만 이젠 알 수밖에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들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그 때의 심리적인 충격과 분노를 이 소설에선 잘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똑똑한 것이...그리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이 과연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지켜보고 있는 내 마음이 아팠다. 성장한다는게 아픔을 동반한다지만..찰리에겐 너무 큰 아픔이고..또 치유될 수가 없는 상처들이 많았다.

게다가, 비크맨 대학의 니머교수와 스트라우스박사가 찰리의 뇌 수술을 감행한 것은 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수술을 전 세계에 실험으로써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찰리에게 또 다른 상처-마치 과거의 찰리고든은 인간이 아니었던 , 짐승같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며 현재의 그를 전시물로 여기는 행동으로 인한- 를 입고 만다.

그 과정에서 또 키니언 선생과의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내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괴로움을 경과보고서에 토로하고 있다. 그는 점점 똑똑해질수록 오히려 경과보고서에 실망, 분노, 아픔을 기록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가 원한건 단 하나뿐인데. 사랑.

성장해가면서 배움의 즐거움, 그리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느끼는 즐거움, 이런것도 좋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자신을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힘들 때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엘저넌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

엘저넌은 찰리가 수술 하기 전 미리 동물생체 실험으로 동일한 수술을 거친 쥐로서, 지능이 매우 발달한 쥐인데 찰리는 이 실험용 쥐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고 그를 끔찍히 여기게 된다

하지만 엘저넌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에서 테스트 하는 여러 과제들을 거부하고 서서히 먹이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죽어간다. 찰리의 분신과도 같은 엘저넌의 죽음은 , 찰리에게도 드리우게 되는데 찰리는 점차 자신의 지능이 떨어질 것임을 자신이 스스로 증명하게 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스스로 세우게 된다.

마치 스스로 임종을 준비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찰리도 그냥 엘저넌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바보에서 천재가 되었는데, 그래서 자신이 바보였을때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데,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라는것은 잔인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아직도 존재하는 그 시절의 찰리가 있음을 알기에,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그 시절의 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찰리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것을 느꼈다

일 평생 평범하게, 하나만 알고 하나만 겪은것보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직접 글로 쓸 수 있었다.

마지막은 너무 비극적이진 않다. 왜냐면 다시 그 긍정적이고 밝은 하지만 조금 정신이 어린 찰리로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글로 쓰여진 것보다 원래 더 많은 것을 마음속의 주석으로 달고 있는게 독자 아닌가.

나는 많이 슬펐고 또 많이 씁쓸했다.

아마 다시 이 책을 읽을때마다 항상 찰리를 그리워 할 것 같다

어떠한 시절의 찰리라도 나는 그리울 것 같다.

사랑을 원했지만, 그 누구-부모,친구,연인-와도 되지 못했던..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수술대에 올랐지만 이렇게 되어버렸던

그런 찰리에게 꽃다발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자신의 집을 지나가게 되면 엘저넌에게 꽃을 바쳐달란 말과 같이 나는 그에게 주고싶다)

먼길 수고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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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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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품이 "자기 앞의 생" 이다

이 책은 버려진 한 소년이 로쟈 아줌마에게 키워지면서, 혹독한 사회에서 살아남아지는 방법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자신과 다른 세계의 사람들, 하지만 부러움보다는 지금 현재 있는 곳에서의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더 돌아볼 수 있는 성숙함을 지닌 아이의 이야기이다.

로쟈 아줌마의 그 투박한 애정의 방식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모모가 대견하면서도 , 한편으론 너무 슬펐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더 현실적으로, 더 처절하게 그린 작품.

고통스럽지만, 거쳐가야 할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

누군가에겐 평생 모를 수도 있는 그런 상황과 감정들을 어렸을 때부터 겪고 그걸 극복해나가면서 커가는 아이들.

자기앞의 생을 읽으면 오히려 마음은 담담해져왔다. 마지막 장까지 쉴틈없이 몰아쳐 읽고 나는 마지막장을 덮고 그냥 창 밖을 보았다
(창이 바로 보이는 책상에 앉아서 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읽기 전과 후, 풍경은 똑같았지만, 똑같지 않았다.
달라져있었다.

그렇게 사랑에 관해서,(이성의 사랑만을 뜻하는게 아닌, 이성이라 하더라도 그 이성 존재자체에 대한 人間愛)처절하게 휘갈긴 글도 없을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들 때문에 미친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라고 첫 구절부터가 절대적 사랑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 이 소설을 ,


마지막 구절도 '사랑해야 한다' 로 끝나는 이소설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구절은 다른 구절이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 부분이었다)

아무튼, 이런 사랑에 대해 처절하고도 절대적인 신봉을 나타내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가슴 깊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사랑에 대하여 열변할 수 있다는게, 부럽기도 하고 어떤 경험을 했기에...? 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그런 사랑이 원천이 어디인지 이 책 '내 삶의 의미(le sens de ma vie)'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처음의 원동력은 , 그의 어머니였다. 서른 다섯에 혼자가 되어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어머니의 열정을 그리고 그 기대를 로맹가리는 저버릴 수 없었다. 프랑스에 대한 사랑 하나로 러시아에서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까지 건너가서 이민자의 삶을 살아온 어머니와 로맹가리, 다양한 문화의 습득이 삶에 있어서는 고단했겠지만, 진짜 드골 장군의 이야기처럼 "미치지 않고 프랑스 작가가 된 것"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민자의 삶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소설로 자기앞의 생으로 그 삶을 발현해낸 것이 아닐까.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진세버그(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배우다. 너무 이쁘고, 너무 똑똑하다) 와 사랑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이상주의와 자신의 이상주의를 함께 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미국에 의해서 진세버그가 비극적 말로를 걷게 되었지만, 로맹가리는 그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할 수도, 그러다고 그녀를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돌보는 일을 그만둔 적은 없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로맹가리는 말미에 이렇게 쓴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성입니다. 주의하세요 여자들이 아니라 여성, 여성성 말입니다. 여성들, 여성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내 삶의 큰 동기이자 큰 기쁨이었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나의 모든 책, 내가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쓴 그 모든것에 영감을 준 것은 여성성, 여성성에 대한 나의 열정입니다.

(중략)

나와 여성들의 관계는 무엇보다 나를 위해 희생한 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숭배였고, 물론 성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내 책들이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 거의 언제나 여성성을 향한 사랑을 얘기하는 책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부분에서 아- 나는 이해는 잘 하고 있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중략)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망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요.

(중략)

그저 훗날 사람들이 로맹가리에 대해 말할 때 여성성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말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맹가리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이 잊혀지질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잊히지 않는 작품을 써왔던 로맹가리, 그리고 그의 다사다난한 인생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선 만족을 느낄 것이다.

앞으로도 로맹가리는 내가 존경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일 것이고, 그와 같은 정신적 가치를 가지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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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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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예전부터 서점에 놓여있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옆을 지나쳐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부러였던 것 같다. 눈길은 항상 갔는데 의도적으로 눈길을 피했다.
제목이 마음에 안들었다.

한국이 싫어서


마음에 안들어.

저렇게 솔직해도 되는거야??

요즘 젊은 애들이 한국 싫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걸 그대로 옮겨놓다니

너무 시대흐름에 편승하는거 아냐???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매번 지나쳐갔다.

근데 어쨋든 나는 그 시대에서 살고 있었고 나도 그 시대의 젊은 애들이었다.
​가끔 외국으로 연수가는 친구들과 떠나기 전 만날때, 아니면 페이스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고는 했다.

부럽긴 한데, 정확히 무엇이 부러운지를 모르겠다.

현재 상황을 벗어나는 느낌이 부러운거였을까
앞으로 비단길만 놓여있는것도 아닌데
난 뭐가 부러웠던 걸까


여기서 주인공 계나는 3년차 금융회사에 다니던, 그래도 서울 소재 사립대학교를 나온, 하지만 금수저는 없어서 자립하는 평범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이 싫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3년동안 모은 돈 2000만원을 가지고 호주로 떠난다.

내가 여기서 못살겠다고 생각하는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되어야 할 동물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았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 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같애. 남들 하는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은 쳐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거야.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는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이부분을 보고 안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내 생활을 옮겨놓으셨어요? ㅋㅋㅋ 나도 보면 뭔가, 묘하게 튀어나와있는걸 나도 느끼는데,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네...ㅋㅋ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어느새 정신차리고 보면 애들은 저만치 달려가고 있어 나는 뛰기 싫은데, 왜 굳이 뛰어야 하는거지? 뭐야 이상황, 무슨 설명이라도 해주고 뛰라고 말해 라고 외치고 싶은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그걸 이렇게 톰슨가젤에 잘 비유하다니, 역시 문장력 하나는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내가 어떤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서 그 톱니바퀴가 되었다고 해도,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 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난 내가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회사는 뭐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달까. 아니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중고생과 다름없었던 거 같아

(중략)

낮에 그 교육을 받으러 회사에 가자면 진짜 어디서 차라도 한 대 인도로 돌진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차에 치여서 팔이나 다리라도 부러지면 좀 쉴 거 아냐

​아... 한국에서의 생활....뭐....누구나 느끼는게 아닐까. 누구나? 라고 말하기엔 너무 광범위한가. 그럼 적어도 나는 이라고 고쳐야겠다. 적어도 나는 느껴본 거니까.


여기서 계나는 지명이란 남자친구가 있는데 남자친구는 계나가 떠나던 때 기자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나를 붙잡고 싶어했지만, 자신의 상황이 불안하기에 섣불리 단호히 잡을 수 없었던 지명

그가 그녀에게 말한 이야기는 호주가 생각보다 힘든 곳이다. 우리나라 행복지수 순위가 얼마나 높은지 아냐 이런류의 대화를 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노력을 한다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해 질 수 없어.

이렇게 단호히 말하고 떠나는 그녀는 처음에 호주에 어학원에 있다가, 회계학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을 가게 된다.​ 그러면서 틈틈이 돈을 벌기위해 초밥집 , 음식점에서 일도 하고 좀 더 돈을 모으면서 셰어 하우스 부운영자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서 호주에서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금융회사 다니며 지옥철을 눈물흐리며 다녔던 그때랑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다를게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호주에서의 생활을 서술할때는 한국에서의 태도와 매우 다르다는걸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뒤에 계속 보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봤어. 나는 먹는거에 관심 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이랑 과자를 좋아하지. 또 술도 좋아해, 그러니까 식재료랑 술값이 싼 곳에서 사는게 좋아 그리고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 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전부야 그 외에는 딱히 이걸 꼭 하고싶다든 가 그런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는건 '무엇을' 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중략)

그록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ㅏㄴ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것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줄거야. 자존시 지켜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싶어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자주 접하는 얼굴들이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 그리고 피곤해하는 얼굴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너무 피곤하니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니 상처를 서로 준다. 그게 일상화되면 거기에 상처받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그정도는 무뎌져야 하잖아?라고 생각하는 사회분위기가 계나한텐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존엄성, 자존심 이야기- 이것도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지켜지기 힘든 하나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여성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존엄성? 자존심? 이런건 사실 가져봐야 불필요한 것들 1순위가 아닌가. 오히려 갖고 있으면 상처만 더 받고 정만 더 맞고, 모난 돌이 되어버리고.. 여기서 보면 호주에서는 상사가 밑에 사람에게 일은 시키되, 그 시키는것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결과물이 돌아오면 끝인 것이 많은데,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그 이상의 무엇을 항상 해야만 한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다가 나간 계나는 , 아무래도 거기에서 많은 것을 느낀 것 같다.

​국외자라는게 참 서럽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나는 이곳에서는 평생 국외자게쑥나, 그런 체념도 했지.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지키고 교육받고 세금내고 할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그 나라 자체를 .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줬어.​

그녀에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견고해져버렸다. 그녀는 확실히 어느 나라도 선택하지 않는 제 3자가 되었다, 우리에게도 저 구절은 어느정도 느낄 점이 있는 부분이 아닐까. 이 책이 인기있고 지지를 많이 얻는건 이 책의 기본 주제에 다들 공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밥을 먹는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 흐름성 행복'이 있는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데서 오는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예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 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 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중략)

나는 지명이도 엘리도 아니야.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흐름 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끼만 먹고 살라는거나 마찬가지다 하는걸

(중략)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거랑 똑같지 뭐.​



​어떤 책보다 이렇게 행복을 잘 설명해줄 수 없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분명 나는 현금흐름성 행복이 강한 사람이다. 나는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결과가 무엇이든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제일 싫어하는 말이 '참고 견디면 나중에 행복해진다' 이다. 미래의 행복을, 언제 올지도 모를 그 날을 위해 현재 행복을 다 포기하라는 말이 제일 싫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현금 자산성 행복보다는 자산성 행복을 더 당연하게 생각하고, 여기에 끼워맞추라고 강요한다.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를 생각 안하는 생각없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그런게 싫어서 떠난게 아닐까 계나는.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 잠시 지명과의 미래를 생각해보다 다시 호주로 떠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거야. 라고


​정말 한 두세시간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남 얘기가 아닌거같아서
마지막에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충만한 채로 호주에 도착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렇게 명확하게 말하는 날이 왔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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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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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의 소설은 대체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것 같다,
오해와, 바라지만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실내인간에 나오는 이야기도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원하던 것을 얻기 위해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 책은 소설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순간에도, 실내인간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과 비슷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뭐, 결말은 열린 결말이니까. 직업이 의사이고 성이 김씨인 여자와 잘 지내리라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그 중간에 skit 처럼 들어가는 단편이 마음에 들었다. 최고 불운을 가리는 대회이야기.

주인공 철수는 불행이란 모든 불행을 안고 태어난 남자이기에 점차 그 대회에서 상위권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 행운조차 스스로가 부담스러워하는 그 마음을 잘 나타내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행운 때문에 결국엔 엄습할 실망감이 두려웠다.

​이 부분에서 . 나는 그 마음이 와닿았다. 행운 자체가 자신에게 주어진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이미 체념하는 마음. 결국엔 내것이 되지 않을 텐데 바로 눈 앞에서 놓칠 것 같기에 그 순간이 두려운 마음.

그리고 그 불운올림픽 마지막 과제가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때를 적어내는 것이었는데 그 과제의 답을 내는 과정에서의 그의 생각이 저절로 이미지화 되면서 마음이 아팠다.

민기 기일에 납골당에 간 철수와 거기서 만난 아주머니도 그렇고, 비에 관한 이야기도 와닿았다. 거기다 그 불운 올림픽에서 만난 구남과의 우정.

오늘 이곳에 와서 구남이란 사람을 만난 것이 내 평생의 행운입니다.​

​이 마지막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보통의 존재와 실내인간을 출간한 후 이석원 작가의 마음 그대로를 솔직히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지 못하는 자의 고백' 을 읽으면서 놀랐다.

아 이 사람은, 내가 읽었던 실내인간을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었구나.

물론 소설을 쓰는 과정이 항상 즐거울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 도 몰랐다.


너는 빵 먹는 걸 너무도 좋아하지만 만드는 건 귀찮아 하므로 제빵사가 될 수는 없었다. 너는 영화보길 좋아하지만 영화만드는 일에 재능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그걸 할 수도 없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 직접 하길 원하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네겐 없었다. ​

​너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의 오로지 향유자가 되길 원할 뿐 과정의 수고로움을 감내할만큼 사랑하고 아끼는 일이 네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너를 좌절케 했다.


​아 진짜 뒤통수 때리는 글귀였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하는 질문 아니던가.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해야하나 내가 잘 하는 것을 해야하나, 또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살 순 없을까 의 문제.

예전에 멘토링 코칭을 하면서 잠시나마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맡았었다. 멘토링 관련 아동 수업책이었지만 나는 ​사실 그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고민 없었던 적이 없었다. 고민이 있다면 이 책을 어떻게 하면 더 잘만들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 멘토링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러스트 컷도 넣게 되면서 나는 내 나름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도 얻게 되었고 또 책이라는 것에 더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책 출간은 실패했지만 =ㅅ= 원래 책 발간은 그렇게 쉽게 뒤엎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그때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죽은 자식 마음에 묻은 그런 심정이다)

그때 당시에 알게되신 출판쪽 분이 그런 물음을 하셨었다

"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잘 할수 있는일-다만 하고싶진 않은-을 해야할까요?"

그때 당시에 나는 당연히 하고싶은 일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말했다

"​ 글쎄요 제가 일을 하면서 느낀건 ,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하는것 같아요"


아직도 난 그 사람의 말을 그 속뜻을 다는 이해 못하겠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그때 그 시절, 책을 만들던 때가 떠올랐다.

​빛 바랜 시절이지만.




이럴땐


지나온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굳이 복습하지 않고
다가올 빛나는 순간들을 애써 점치지 않으며
그저 오늘을 삽니다


라는 책의 첫 글귀를 다시 들여다 본다

그저 오늘을 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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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인간
이석원 지음 / 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그는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서점에 가면 그의 책들이 곳곳에서 그 대신에 그녀에게 인사할 수 있도록.
나 여기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널 잊지 않고 있다고.

가능한 많은 책들이 많은 곳에서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글을 썼다.


그러나 지난 육 년간 그런 소임을 충실히 수행해온 그의 책들은,
그에게 자부심과 실낱같은 희망과 생명을 주던
그의 책들은
그 날 따라 이상하리만치
초라하고 쓸쓸하게만 보였다.


-


예나 지금이나 그가 믿는 사랑이란 오직 상대가 우러러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
사랑을 놓치고,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책을 팔아도, 그는 자신이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외모, 성격, 말투, 목소리, 풍기는 분위기와 체취, 노력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그만의 개성이나 매력같은
진짜 모습들은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질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성공한 작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와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그의 달라진 신분을 모르는 어느 곳 , 마주치는 어떤 누구로부터도
여전히 평범한 사람 취급을 받는 그저 그런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한 권도 팔지 못하는 나 김용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인가? 누구에게도 친구로 여겨지거나 남자로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그는 괴로웠으나 아무리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괴감이 더할수록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더 많은 책을 파는 것밖엔 없었다.

-


정말 사랑했던 사람하고는 영원히 못 헤어져, 용우씨.

누굴 만나든 그저 무덤위에 또 무덤을 쌓는 것뿐이지

-



두시간 반만에 완독을 했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나 또한 용우만큼 용휘의 존재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고
나 또한 용휘와 똑 닮은 사람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알았을 때엔 유머러스하고,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시니컬하지만

파고 들어갈수록 자기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 변덕스럽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적으로 매력이 없는 사람.

그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신을 평생 거짓으로 포장해온 사람.

하지만, 지인이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미워할 수도
한심해할 수도 없는사람.

왜냐하면

나 또한 용휘만큼 그 사랑에 대한 감정이 인생을 뒤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용휘는 성북동에 사는, 자신이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그녀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녀로 인해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만을 향해 달려온 용휘는
그러한 목표의 구심점이던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되자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없어진다.

인생의 중심이 그녀였는데
그녀가 정작 그의 삶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결국 중력에 반하여 무너지게 된다.

지구가 없다면 달이 지금처럼 그 주변을 돌 수 없는 것처럼


.

그는 그의 삶의 중심을 다시 그에게로 돌려놓기 위해.

아니면 또 다시 그의 삶을 지탱해 줄 새로운 중심을 찾기 위해

삶의 목표라고는 그녀밖에 없었던 진짜 김용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기약없는 떠남을 하고 만다.

나 또한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에


제롬과 용휘의 연대감을 다 알 수는 없지만.


-

이 책을 읽고는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눈물이 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이유가 뭘까.


이 책은 용휘의 억눌렸던 그리움과 슬픔이 마지막에 봇물 터지듯이 넘쳐흘러
오히려 보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

나는 그가 성북동 밤의 불빛을 산에서 바라보는 행위가
개츠비가 이스트 에그의 초록 불빛을 바라보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데이지를 사랑하는 개츠비와
성북동의 그녀를 사랑하는 용휘가

그리고 데이지를 위하여 자신이 부자가 되는 개츠비
성북동의 그녀를 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용휘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다만 개츠비는 멜로에 더 치우치고
실내인간은 추리 비슷한 요소를 더하여
궁금함을 더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자신이 아닌 사랑에게 부여하는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기에
상당히 비참한 결말을 초래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잊지 못했지만

그러한 자신을 받아들이는것은

용휘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세상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디엔가의 용휘를 위하여

이 글로나마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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