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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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자주 듣던 노래에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그런 기후 탓인지 한국 사람들은 개성도 또렷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반면에 복잡한 문제 앞에서 골똘히 생각하며 쉽게판단내리지 못하면 어딘가 의뭉스럽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의 내성적인 성격이 싫었다. 사춘기시절에는 이 성격을 바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스무 살이 지난 뒤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주는 것보다 받아야할 것이 더 많은 셈이다. 관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타인의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원래의 균형을 찾을 수있다. 다행히 나는 나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만큼 타인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이 지체의 시간이 나는 좋다.
이런 나를 옹호해줄 만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자위다. 그의 책 드러내지 않기를 인용해서 말하자면, 그는 타인 앞에서 판단을 유보하는 나의 태도에 관해 이런 변론을 내놓을 것이다.

다른 철학책과 마찬가지로 피에르 자위의 이 책에도 자아는 "헛바람, 허깨비, 기만에 불과하다고 표현돼 있다. 헛된 망상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진정한 세계의 모습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필요한데, 그때 사용하는 철학적 기술이 바로 겸손이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 겸손이란다른 꿍꿍이를 감춘 음흉한 태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겸손이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술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겸손을 통해 우리는 섬세한 감각을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겸손은 그저 타자가 몹시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그에게 아직도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섬세한 지각일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오늘날 드러내지않기‘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드러내지 않기‘라는 경험의 중추는ㅡ아직은 그 경험이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ㅡ 자기증오나 자기에 대한 염려와는 무관하다. 그 중추는 순전히 타자들에게로, 대타자에게로, 피조물들에게로, 세계로 향해있다.

피에르 자위의 이 책에는 ‘혹은 사라짐의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오래전 라디오헤드의 <How to DisappearCompletely)라는 노래의 제목에 매료됐던 나는 서점에서 이 부제를 보자마자 책을 집어들었다. 책은 다음과 같은 카프카의 일기로시작하고 있었다. 사라짐의 기술과 카프카의 조합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초대받았을 때 그저 별 생각 없이 순진무구하게 문지방을 넘고 계단을 올라왔음이 분명하다. 상념에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그런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한채 그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행동할 뿐이다.
이 일기에서 카프카는 자아의 기획이 없는 순진무구한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이를 번안하면,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 없이 매일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글을 쓰는 행위가 될 것이다. 겸손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자아의•축소 내지는 사라짐이 이렇듯 예술 행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발견한 사람은 블랑쇼다. 

피에르 자위의 설명에 따르면, "블랑쇼는 아마 현대 예술의 본질을 사라짐의 기술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기,
글쓰기, 어쩌면 필름으로 기록하는 것까지도 항상 사라짐의 추구일 뿐이다.
이쯤 이르러 나는 누군가의 책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참으로 멋진 경험을 다시 한번 할 수 있게 돼 무척 기뻤다. 예술은 사라짐의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의심리상태, 재능, 예술가로서의 위상 등등이 모두 소진되는 과정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고 나면 작품 자체도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사라짐을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다음 문장에서 나 역시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요즘내가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최상의 독서란 내가 막 쓰려고 했던 그 글을 읽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세잔의 말마따나 결과보다는 ‘실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대상보다는 기본적으로 대상과 입장 밖에서방향이 결정되는 생산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블랑쇼는 카프카와 발레리라는 판이하게 다른 두 작가가서로 만나는 이 명제 ‘나의 모든 작품은 연습일 뿐이다‘를대하며 감탄한다.

이걸 보르헤스의 말로 바꾸면 ‘실수가 없으면 시인도 없다‘가 되리라. 보르헤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문학에 끌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불행에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시인은 이 끌림으로 다시 불행을 뛰어넘는다.
이번 계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보르헤스를 반박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 역시 이삶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침묵』을 쓴 존 그레이에 따르면, 행복은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이란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아는신처럼 독창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노력해서발견되어야만 하며, 그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니까.
하지만 그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아라는 게 허구의 이야기라면? 우리 안에는 애당초 그런 자아가 없다면? ‘헬조선‘이라는게 있다면, 그 지옥은 내 안에 없는 자아를 찾아낼 때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집단적 착각으로 만들어진다. 실재와 허구 사이의, 아무리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이 까마득한 심연의 지옥 속으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인간의 삶을 소모시킬 뿐인 낭만주의적 착각에서 벗어나 임시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자신을 받아들인 뒤에나 이따금 실재는 브루클린의 달처럼 짧은 순간 그 모습을 드러낼 텐데,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그때까지 살아왔던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해지리라. 그러니까 실현되는 것은 이 세계이지, 우리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실현을 이따금 우연히 목격할 뿐이다.
구월이 찾아오자, 새벽 공기는 나날이 식어가고 있다. 나는 책상과 의자만 놓인 아주 작은 방에 사는 랍비와 어떤 사람의 대화를 읽었다. "랍비님 가구가 없네요." "당신 가구도 없네요." "저야 잠시 들렀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랍비처럼 사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임시적 존재로, 마치 여행자처럼 이 삶을 사는 건. 하지만 여든 살의 보르헤스는 한술 더 뜬다. "매일 아침 깨어나 ‘흠, 내가 여기 있군. 다시보르헤스로 돌아가야겠네‘라고 반복하는 걸 멈추고 싶어요." 내게 문학은 여전히 경이롭다. 그러니 문학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임시적 존재로 되돌아갈 수밖에.

사람person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이 ‘가면‘이라는 게역사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언제 어디서나 다소 의식적으로 역할을 연기한다는 인식을 가리킨다. (....) 우리는 역할을 통해 서로를 안다.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도 역할을 통해서다.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분투하면서 우리가 구축해온 스스로에 대한 관념을 가면이라 한다면, 가면은 우리의 참자아.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자이다. 결국 역할이라는 것은 우리의 제2의 천성, 인성을 구성하고 통합하는성분이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 이 세상에 들어와, 성격을획득하고, 그러면서 사람이 된다.
에는 드러난제2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제3의 천성도 가능하다. 그리고 제3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저 양을 잊을 정도로어떤 소설에 푹 빠졌을 뿐인데, 어느 틈엔가 내가 그 소설 속의 주인공과 비슷해지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누군가 말한다고 해도 비웃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더구나 양을 잊을 정도로 어떤 책에 푹 빠져본 적이 없다면. 또 하나, 다행한 것은, 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나의 배역을 정하는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가능하면 멋진 배역을 맡기를. 물론 그러자면 먼저 양을 잊을 정도로 뭔가에 빠져야 하겠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은 바로 거기, 고개만 들면 보이는 그날그날의 하늘에 있었던 것이다.

경제활동의 주체들이 이윤을 포기하면 공산주의 사회가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의미를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자아의 구름이 걷히며실재와 대면하게 되리라. 이때 실재란 진리라는 말로 바꿀 수있다. 존 케이지의 비결정성 Indeterminacy은 이를 잘 설명하는 개념이다. 음에서 의미를 제거하면, 즉 화음을 제거하면 ‘심리적‘ 환영이 사라지면서 소리의 현존이 드러난다. 이로써 우리는환영이 아닌 실재의 음을 만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개별적 사건들을 인과의 사슬로 묶어 의미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눈앞의 인생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인생담에서 의미를 걷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자아를 사랑한다. 그 자아를 굳건하게 지켜주는 것이 바로 인생 이야기에서 찾아낸 의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무의식중에 의미를 찾아낸다.

불타는 집, 즉 화택에서는 그저 뛰쳐나와야 한다고 붓다는 말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암시했다시피 체제에는 외부가 없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탈출할 수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벽암록」 제37칙, ‘삼계무법 하처구심‘의 세계를 바로 보는 것. 그러니까 불도 없고, 불타는 집도없고, 사랑하는 여인도 없고, 나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
지금 불타는 집에 앉아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불에 맞서지도 말고, 그 불에 동조하지도 마라. 그 불을 바로 바라보라. 그러면 불은 결가부좌를 한 백남준의 TV가 들여다보는자신의 화면처럼 무의미한 삼원색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공만 남을 뿐이다. 자아의 목소리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진 불을 다시 되살리려 하리라. 그러나 그 목소리를 그대로 흘려보내면 불은 다시 사라진다. 마치 백남준의TV로 수많은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그렇게 해서 백남준의 TV는 이 세계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TV.
즉젠 마스터Zen Master, 禪師 TV가 됐다. 젠 마스터 TV에게는 자아가 없다. 젠 마스터 TV는 거울과 같다.

인간은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인다고에른스트 블로흐는 말했습니다. 인간도 시계처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한, 인과율의 세계는 작동하며, 소망은 이뤄집니다. 어린 시절 저를 매혹시킨 에스컬레이터와 쇠구슬 장식품, 이상이 빠져든 옥상정원과 시계, 박지원 등을 사로잡은 자명종, 20세기 한국인들이 열광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모두 이ㄹ런 인과율이 분명한 운동의 차원에서 바라봐야만 합니다. 모든 움직임은 어떤 결과를 낳습니다. 이보다 매력적이고 두려운 문장이 없습니다. 저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킨다면, 거기에서는 희망이 생깁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문장은 이렇게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한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실현을 저는 목격할 수 없다면 어떨까요? 저는그저 가장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죽어가야 할 운명이라면?
희망이 유예된 그 삶을 저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지체되는시간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할 때, 인간은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그런 의문이 저를 소설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거시적으로 제대로 작동되는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한없이 지체되는 시간에 관심이 갑니다. 인과율이 지체되는 동안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우연과 신화와 운명에 끌립니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소년에게도 삶이란 희망이 유예되는 시간을 뜻했을 것입니다. 그가자신의 뜻대로 조선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천주교가좀 더 일찍 조선에 전해지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금보다 빨리 돌아갔을까요?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를 조선에 소개하려 했던 소현세자의 꿈이 좌절되는 과정을 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않았을 것 같습니다. 조선에 들어갔어도 그가 원하는 세상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주교는 조선에 전해집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마치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이백 년 뒤에 일어날 이 결과에 맞춰 그의 입국 시도를 원인으로 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랬다면 어둠 속에 묻힌 그의 삶도 의미를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을 텐데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국에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화형으로 죽고, 이백 년 뒤 서울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납니다. 이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인생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요?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을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간신히 살아낼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저절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사이에 인과의 다리를 놓을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 그 소년의 그토록 짧은 약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소년에게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쉽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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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시선 516
박준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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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우연이 겹친 완벽한 오후

내가 좋아하는 커피집에서 우연히 들렀다 테이블에 전시된 시집! 설마.. 박준?! 하며 커피 주문 하는 것도 잊고 시집을 집었다.
신간이 나온줄도 몰랐다.
기쁜 마음에 시집을 읽는데 내가 좋아하는 레이첼 야마가타의 Be be your love 노래까지 흘러나왔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니 일부러 의도한 일보다 기쁨에 겨울 정도로 좋다. 신이 오늘 나에게 특별한 행운을 선사하는 것 같다.

귀퉁이를 잇새처럼
좁게 접어둡니다.

바람이 크게 일고
별이 오르는 밤이면

우리가 거닐던 숲길도
깊은 속을 내보일 것입니다.

소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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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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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혀지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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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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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도 마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처럼 우연히 작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옥수수뿐이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고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것. 그런 마음이 들면 경애는 불현듯 약속을 잡아보다가도 낮이 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외출을 취소하곤 했다.

경애는 엄마가 해준 유년의 이야기들 중에서 이런 것을 좋아했다. 경애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장면들인데 이상하게 실제로 본 듯떠오르곤 했다. 경애의 엄마는 십대 때 고향 원두막에서, 서리해온수박을 아주 늦은 시간까지 동네 친구들과 나눠 먹곤 했는데 어느날은 너무 웃어서 그 허술한 원두막이 풀썩 꺼지고 말았다고 했다.
경애 엄마는 그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즐겨 했다. 그러면 경애는그 순간, "원두막이 무너진 거야, 우리는 그 와중에도 그게 웃겨서다친 줄도 모르고 웃고"라고 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다친 줄도 모르고 웃는다‘는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경애가 커가면서 엄마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경애가 그때의 엄마나이가 되었을 때는 다친 줄도 모르고 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시절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도시로나간 것은 다른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자신의 선택이라는 긍지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계를 스스로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어떤 환함, 경애의 상상 속에서 때로는 터무니없이밭을 압도할 정도로 큰 여름 달 같은 환함이 있었다.

만약 무언가를 포장하고 있다면 꾸민다기보다 숨기고 있는 것에 가까울 거야 하는 말이었다. 들여다보면 더한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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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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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이 자꾸 떠오르는 요즘이다.
책에도 때가 있다. 이 작가를 좋아함에도 이 책은 번번히 잘 읽히지 않아 도서관에 끝내 반납했어야 했다. 아마 그 시기에 나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을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을 좋아하는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지나 지금 다시 책을 폈다. 좋은 구절이 많아 한 번 더 읽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너무나 좋은 책을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후회보다 가을이 오면 가을을 마음껏 좋아하겠다는 작가처럼 지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좋아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걸 독서를 통해 얻은 한 뼘 넓어진 나의 마음 품이라고 생각한다.

에티켓 이론이야. 통조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실 겉에 붙은 라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본성이 아니라 드러난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열어보면 되지."
그가 말했다.
"열어볼 수 없다니까. 그게 규칙이야. 과거는 통조림 속에 들어 있고, 우리에게는 따개가 없어. 그러니 누구도 과거를 바꿀수는 없는 거야."

툴루즈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툴루즈 1대학 근처의 라이브클럽에서 장피에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됐어. 그때 그는 영국학생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들어보니 스파게티 인생론이랄까, 아무튼 이런 이야기였어. 우리가 상상하는 인생은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비닐로 포장한 스파게티 면과 같아. 각자의 인생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거지.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장피에르의 주장에 따르면 말이야. 실제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 포장을 뜯어 살은 뒤, 팬 위에서 소스와 버무린 뒤의 면과 같아. 포장 상태에서는,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모두의 인생이 하나의 시간을 따라진행되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소스에 버무릴 때마다 예측

할 수 없는 형태로 뒤엉키는 스파게티 면과 같다는 거야. 소스팬 안에서 한 가락의 스파게티 면은 자신의 형태만을 간신히이해할 수 있을 뿐, 다른 면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거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고 말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 각자의 인생은 소스 팬 안의 스파게티 면이라는 걸 잊지말라고.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 소스 팬을 한번 뒤섞는 것과 같아. 너희 인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인과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어떻게 뒤엉키든 스파게티 면의 차원에서는 한 가락이니까. 너희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일이 소스에 버무린 뒤 만들어진 스파게티 면의 형태를 따라 움직이는것과 같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진정한 시간여행은 그게 아니라 소스 팬을 몇 번이고 뒤섞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일개 스파게티 면의 차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고 해도 너희는 너희의 과거가 누군가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을 거야.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간 너희가 맞닥뜨릴 사람이 이미 늙어버린 연인이라면 어떤 기분이겠어?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도 너희가 바꿀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제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그 세계는 우리가 디디고 선 이 땅의 아래에 있습니다. 지상의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세계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광부들의 세계는 존재합니다. 조지 오웰에게 소설가란 이 두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비유하자면 소설가는 마르고 젖은 존재인 셈이죠. 소설가는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멀리 있는 것은 작아. 가까운 것은 크고. 이게 원근법의 원리지. 이게 뭘 뜻하는지 아는사람?"
그녀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대학교 수업에서 원근법이라니,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지훈이 손을 들었다.
"보는 사람의 눈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 우리의 위치가 모든 걸 결정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크거나 절대적으로 작은 것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만 있는 거야. 그러니 어떤 대상의 크기는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어. 그 위치가 우리의 의지를 뜻해. 아무리크다고 해도 우리 위치에 따라 얼마든지 작게 만들어버릴 수있어. 그러다가 아주 멀어지면 어떻게 되지?"
"소실점으로 사라집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리적 세계에는 그런 소실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 지금도 수많은 것들이 그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있어. 이게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의 참모습이야. 그럼 그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
지훈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그게 존경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매혹이었을지도.

"나를 사랑하긴 한 거야?"
화영이 물었다. 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헤어질 수가 있어? 난 그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화영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인생은 그런 것이다. 납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서로 얘기했다면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십 년 전의 일을 따져가며 왜 그랬냐고 묻는 건무의미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일들이 납득되리라. 기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감은 코앞이고 원고는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졌는데 잠조차오지 않을 때, 나는 밖으로 나가 걷는다. 그럴 때 걷는 일은큰 도움이 된다. 걷는 동안에는 적어도 걸어가고는 있으니까.
책상 앞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걷는 게 나으니까.

반면, 걷기는 전혀 애쓰지 않아도 된다. 걷지 못할 만큼 몸과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대개는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별노력 없이 수월하게. 그럴 때 걷기는 사랑과 닮아 있다. 애쓰거나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사랑은 지금의 내 마음과 몸으로 하는 일이지, 과거나 미래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지금의 몸과 마음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게으를 수도 있는,지금의 몸과 마음으로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우연을 ‘나‘의 인생으로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우연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다. 미야노가 모임에서 한 번 만났을뿐인 이소노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태도에서비롯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삶을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설사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이는 경이로웠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삶이 거기 있었다.
한번 대답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영원히 지켜보고 돌봐야 하는삶 선물처럼 받았으니 나 역시 주고 주고 또 주기만 해야 할 삶이 거기 있었다. 엄마에게도 나는 그런 삶이었을까?

아침에 깨어서 보니,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나는 그 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침 사이에 ‘그러므로‘라는접속사를 넣어 연결해봤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내 나이 때의 엄마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내 나이 때의 열무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온 눈보라가 얼굴을 덮쳤다. 이내 안경알이 흐려졌다. 흐리마리 하얀빛에 갇혀 헤매다가 나는 나무한 그루와 부딪힐 뻔했다. 눈 쌓인 호수의 하얀 빛을 바라보고선 독일가문비나무였다. 독일가문비나무는 묵묵히 눈을 맞고서 있었다. 독일가문비나무와 눈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무처럼 나도 눈을 맞기로 했다. 이제 나는 슬픔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해지려 할 뿐이다. 언제부터 그 눈이내리기 시작했고 언제까지 그 눈이 내릴지는 나도 독일가문비나무도 알지 못하니까. 왜 그런 눈이 내리는지도. 다만 우리가아는 것은 지금 이 시기는 여름철에는 맞기 힘든 눈을 맞아야 할 때라는 사실뿐. 그러고 나면 여름은 저절로 찾아올 테니까.
소로가 먼저 있어,
오래전, 호숫가의 소로에게 그랬듯이.

그렇게 우리는 여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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