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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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색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이고 보내며 일생을 살아야하는 사람에게도 색이 있을 테니까. 어느 물감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찬연한 색이 있다고 믿는다.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ㅡ세사르 바예호. 여름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저녁은 그렇게, 시를 읽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

체스터튼은 [정통]에서 그러한 무게의 해악을 설명하며, "자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라앉지" 말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쾌활함 쪽으로 올라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숙함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것이지만,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결국 발목에 추를 달 줄도, 손목에 풍선을 달 줄도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극을 번갈아 오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두 겹의 감정을 포용하라는 것이다. 추를달 때 풍선을 기억하고, 풍선을 달 때 추를 잊지 않기.
삶의 마디마다 기꺼이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선택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방점은 ‘기꺼이‘라는 말 위에찍혀야 할 것이다. 기꺼이 떨어지고 기꺼이 태어날 것.
무게에 지지 않은 채 깊이를 획득하는 일은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함께 우물을 내려다보고있다. 어머니가 말한다.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는 화창한 낮에도 별을 볼수 있어."
어떻게 한낮에 별이 보이냐고, 소년이 반문한다.
어머니의 대답. "너와 나에게는 낮이지만, 별에게는 밤이란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알게 된다."
정말 그것뿐이다.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 그안의 무한 그리고 무(無),
나날이 성실한 산책자로 살아가지만, 나는 아직 언덕과 구름을 다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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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고부터는 대출인이 아니라 강연자가 되어 도서관에 출입한다. 열람실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며저기가 내 자리인데, 생각하지만 강당의 맨 앞 한가운데로인도된다. 말을 모으지 못하고 말을 풀어놓는다. 아무려나,
강연은 의미가 크다. 세상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지혜를 세상에 되돌려놓는 마땅한 활동이고 그 임무를 나는 보람차게 수행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외부 활동은 내부 활동의 결과다. 책기둥 틈에서 왜 읽는지 목적도 없이,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도 없이, 뭘 써야 한다는 의무도 없이, 그저 책을 무모하게 탐하는 기쁨을 모아두었던 무용의 시간이 없었다면애초에 불가능했을 일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책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생의목격자 양천도서관이 일러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어디를 가야 자기 존재가 피어나는지 몸은 안다. 10년 후 모습을 만들어가기보다 10년 전 모습에서 멀어지지만 않아도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은 답을 구하는 사람이다.

삶의 질문에 대한 힌트는 대개 두가지에서 나왔다. 시간 그리고 책. 세월이라고 할 만한 시간이 흘러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책은 좀더 가까웠고 친절했다. 먼저 시간을 살아낸 이들이 쓴 글은 믿을 만한 처방전이 되어주었다. 책을읽다가 ‘이거구나!‘ 하고 인식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주섬주섬 글쓰기를 시도했다. 책으로 삶을 해석하고, 삶으로 책을 반박하며 덩어리진 생각에 질서와 문장을 부여했다. 그렇게 한편씩 글을 완성했다.

K야, 네 연명장치는 무엇이니? 자아찾기니 뭐니 해도 결국사는 건 하루를 거뜬히, 그러니까 무사히 보내는 일 같아.
페루 시인 세사르 바예호 César Vallejo 도 노래하지.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느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ㅡ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부분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ㅡ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나도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한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는데, 똑똑한 게 자기답게사는 데 도움이 되는지 걸림돌이 되는지 언제부턴가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이젠 안다. 타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지켜보며 자연스레 터득했다.

남들 앞에서 자기 서사를 낭독하기까지의 오랜 시간, 생각의 뒤척임, 단어 선택의 어려움, 자기 부정과 인정의 반복을 견뎌냈다. 나란 존재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 얼마나 썼다 지우고 또 써 내려갔을까. 자기를 알아가는노력은 답도 없고 돈도 안 되고 힘에 부친다.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무심결에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뱉기도 하죠. 그런데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나는언행에 대해, 정확해서 신랄하게 느껴지는 비판을 받은 이들은, 거의 이후 수업에 불참했습니다.
이 예견된 실패가 제 오랜 근심이자 숙제입니다. 수업에는 워낙 다양한 삶의 배경과 궤적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데,
이러한 생각과 인식의 격차 속에서 어떻게 어울려 공부하고 살아갈까. 자식을 키울 때도 느끼지만 옳은 말은 구체적정황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변화를 일으키기는커녕 마음의 거리를 만들죠. 이게 옳아. 그건 혐오야. 이런 말은 발언자에게는 정의감을 주지만 상대에겐 일단 무안함을 한 바가지 안깁니다. 한쪽이 당황해서 입다물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내 고민을 듣고 한 학인이 그러더군요. "샘, 생각이 다른데 피곤하게 꼭 같이 배워야 돼요?" 맘 편히 말 통하는 사람끼리 공부하자고요. 그 논리대로 저는 질문했어요. 비슷한정보량과 익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끼리 왜 굳이 모여서 공부해야 하느냐고요. 그건 독백이지 토론이 나니라고요. 함께 공부를 해도 심기에 거슬리는 게 없고 이전과 달라지는 게 없으면 서로에게 좋은 공부가 아닐 가능성이 있어요. 사유는 마찰에서 싹틉니다.

빠른 여행자란 자기 발로 가는 사람
ㅡ데이비드 소로. 월든

저도 스무살 무렵에는 도대체 여자가 무슨 차별을 받는다는 건가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결혼과 출산을 거치고, 또글 쓰는 일을 하며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여성들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깨졌습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화란 거저오는 것이 아니라 애써서 만드는 것이라고 하죠. 비난으로는 변하지 않고 애씀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 애써 글을 쓰고, 누군가 애써 글을 읽고 애써 소개하고요. 남의 말에귀를 열고 질문하고 영향을 받는 것도 애씀이지요.

사실 ‘무력감‘과 관련한 질문은 강연에서 꽤 자주 나옵니다. 독자들이 묻죠. 읽거나 쓴다고 해도 현실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런 작업을 지속시켜주는 동력이 무엇이냐고요. 그럴 때 저는 답합니다. "세상은 안 바뀌는 거 같지만 제가 바뀌었거든요. 저도 세상의 일부이고 적어도 제몫만큼은 변했잖아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제가 지금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책은 절실한 ‘자기 질문‘이 있을 때라야 자기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2015년에 나온 「변방의 아이들을 저는 이번에 김 선생님이 던진 물음 덕분에 다시 만났습니다. 강연장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들, "더 험하게 사는 아이들, 더 억울한 아이들, 스스로 삶을 일구어가야 하는 아이들"(166)의 면면을 책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서와 토론을 성장의 만능 척도처럼 여기던 좁은 생각이 흔들렸으니까 저도 조금은 성장한 거겠죠. ‘어디로 가야하는지‘ 여전히 어렵지만, 질문이 답을 주진 않아도 헤매게 해주고, 그렇게 길을 잃는 동안 다른 삶을 목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됩니다.

히트곡이 하나뿐인 가수는 전국을 다니면서 맨날 같은노래만 하고 살텐데 얼마나 지루하고 쓸쓸할까라는 저의말을 듣던 선배가 그랬습니다. 그게 뭐 어떠니. 어차피 청중은 처음 듣는 노래일 거고 가수는 자기 노래로 거기 온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으니 그거면 가수로서 본분을 다한 거지.
선배의 말에 뜨끔했죠. 당시 제 나이 서른 즈음이었는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삶을 함부로 말했구나 싶어 급히반성을 하면서도 선배의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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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효율의 사랑 - 소란한 세상에서 조용히 귀 기울이기
최다은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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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년을 이어져온 클래식 악보임에도 계속 연주되는 이유. 음악가마다 해석한 아티큘레이션의 차이.
교육과정과 수업 또한 악보와 음악가의 해석의 관계가 아닐까?

내가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은 만큼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알아 가는 데에 있어서는 비효율을 추구한다. 첫인상을 마주한 뒤 느낌은 간직하되 판단은 유보한다. 어떤 이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땐 정확한 출처나 사실을알기까지 유효한 정보로 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낭비가 되더라도 시간을 들여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내 이야기를해 보려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허락한다면결국 모두에게 나답게 살아갈 자유가 늘어난다고 믿는다.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래서 더 매몰되기 쉬운 것들이 있다.
‘최선을 다해 보지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태도로 나자신을 훼손하지 않으며 지내기. 그게 내가 찾은, 소중한 것들을 오래오래 지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클래식의 경우에는 몇백 년 전에 쓰인 악보 그대로변동 없이 거듭 소비되는 장르다. 클래식 연주회의 인기 레퍼토리 중 하나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예로 들어 보자. 1801년에 작곡되고 1802년에 출판된 이 곡은 지금까지 단 한 음도 변하지 않고 탄생된 형태 그대로 연주되고있다. 1802 년이나 2023년이나 같은 악보를 가지고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고정돼 있는 음악을 200년이 넘도록 수천수만 명의 연주자가 왜 반복해서 연주하고, 또청중은 그 음악을 듣고 또 듣는가.

그건 악보에 표시되지 않은 부분에도 드넓은 세계가 있기때문이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요소를 아티큘레이션 Articulation이라고 한다. 사전적 정의는 ‘연속되고 있는 선울을 보다 작은 단위로 구분하여 각각의 단위에 어떤 형과 의미를 부여하는 연주기법‘. 악보는 고정돼 있지만 하나의 음과 다음 음을 어떻게 연결할지, 어떤 음량으로 어떤 속도로연주할지, 어느 부분을 상대적으로 더 부각할지는 선택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아티큘레이션 역시 작곡가가 악상기호를

통해 어느 정도는 정해 놓기도 하지만 ‘보통 빠르기 Moderato‘
라고 표시해도 ‘보통‘을 어느 정도로 설정하느냐, ‘매우 세계Fortissimo‘라고 해도 어떤 방법으로 얼마큼 세게 칠 수 있느냐는 연주자마다 다 다르다.
이 작은 차이에 귀 기울이는 것, 이 모든 작용이 종합되어만들어 내는 사운드의 질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감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방송에서 그냥 "쇼팽피아노 협주곡 1번"이라고만 해도 될 것을 "무슨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어떤 연주자의 협연으로 들었다"라고 굳이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느끼고 즐기려면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만큼 귀를 예민하게발달시키거나 반복 청취로 특정 곡에 대해 꿰고 있는 노력이어느 정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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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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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인간입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가을비가 지나가서 하늘이 유난히 말간 날엔 잠바 속주머니에지갑을 넣고, 무릎을 짚음으로 절름절름 천변으로 내려간다이. 코스모스가 색색깔로 피어 있는 길,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죽은 지렁이들에 쇠파리가 꾀는 길을 싸묵싸묵 걷는다.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핀 쪽으로,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허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가 부쳐준올배쌀을 공기에 담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도는 것.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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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는 순간 - 안희연의 여행 2005~2025
안희연 지음 / 난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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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나의 삶은 그런 인사들로 채워질 것이다. 매사 헛발질만 하며 사는 것 같아도 그 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음을 부정할 수 없듯이.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삶은 더욱 애틋하고, 한 걸음은 언제나 멀 것이다.

행복의 조건은 부에 있지 않으며 오직 삶의 순간순간에 진실하게 임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 어느 누구에게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자격은 없으며 누군가의 삶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나의 오만일 뿐이라는 것.
우리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무게가 있다. 나는 여전히 우리 중 누구의 무게가 가장 과중한 것이냐는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저는 글을 쓰면서 시간이 축적되는 모양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하루하루를 쌓아 한 시절을, 나아가 일생을 이루는 일, 근사하잖아요. 기록해두지 않으면 공중으로 허무하게 흩어져버릴 장면들을 엮어 당신에게 꽃다발처럼 건네고 싶어요. 미래의 어느 날, 당신이 제가 건넨 꽃다발을받아들고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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