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과가 있다. 사과는 사람에게 장차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갈식용의 대상으로밖에는 비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과를 보는 사람의시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저 사과의 빛깔이 얼마나 곱고 붉은빛을띠고 있는지, 윤기는 얼마나 나는지, 크기는 먹기에 얼마나 적당하며값은 얼마나 하는지와 같은 점들이 고려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과의본질이 정말 이런 것에 불과할까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잔이었다. 그는 사과를, 인간의 시각으로서가 아닌 사과 그자체가 갖고 있는 본질로 보고 싶어했으며 그것을 그리기 위해 무려40년이란 시간을 바쳤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본질이라는 게 뭐길래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그것에 목말라했던 것일까. 사과는 정말로 인간을 먹여주기 위한 존재로써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존재라는 것이 본래부터 그것을 보는 타자의 관점에 의해서 규정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의문은 계속됐다.
사과의 본질이 그런 인간의 시각과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고유의 존재적 특질을 가졌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또다른 인간중심적 상상력의 결과는 아닐까? 대체 사과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과의 본질이 정말로 있기는 한 것인지, 사람이 사과의 입장이 될 수 없는데 그 누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사과가 된다 한들 나조차도 내가 누군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가.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시선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왔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외부로부터의 시선이 틀렸다고, 내가 판단하는 내 모습이야말로 진짜나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있는 그대로‘ 라는 테마는 이처럼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겼고 그것은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세잔을 선물해준 이에게 계속해서 의문을 던져야 했는데, 종래엔 이런 대답이돌아왔다.
"사과라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요한 거야. 그것이 바로 사과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사과를 존중해야 하지?"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사과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고 존중할 수 없는데 그보다 더 복잡하고 커다란 가치를 어떻게 알아보고존중할 수 있겠어?"
세잔은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나무를, 농부를, 태양을, 해바라기를 철저히 자신의 시각으로 넘치는 주관을 담아 상상력으로 그려낸 고흐와는 달리, 이 세잔이란 화가는 사과라는 하잘것없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려내기 위해 무려 40년을 바친 것이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입장과 시각으로 타인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의 본질이란 어쩌면 타인에 의해 인식되는 것외에 다른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잔은 실패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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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모양
이석원 지음 / 김영사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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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그을 수 없는 책.
책으로 쑤욱 단번에 미끌어져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면.. 작가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나또한 감정 이입하게 된..

임지은... 이석원.. 작가 둘다 다른 결로 글 참 잘 쓰는 작가다.

작가들은 참 용기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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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싫음은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자신의 싫은 구석까지 모두 내비치는 이 용감한 작가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

내가 그럭저럭은 할 거라던 명동에서의 사주란 꽤 맞아 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했든 결국은 지금처럼 되었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 수 없었기에 누군가의 말이 내게 필요했다는 것도. 미리 알았다면좋았겠지만, 언제나 미래에 알게 될 것은 미래의 것. 지금 아는 건 이따금 나에겐 나를 격려하거나 흔드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기쁘고 후자는 두렵다. 그러나 흔들림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 그건 내가 앞으로 알게 될 것과 가까이에 있다.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 쉰다. 개에게 배운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별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경험을 신뢰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린 틸먼. 어머니를 돌보다.

이 책 읽었는데 왜 난 안 떠오르지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영화 <마지막 사랑>에 영화의 원작자 폴 볼스가 등장해 내레이션 하는 대사라고 한다.

무언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날이면 그 마음을 가만히들여다본다. 대체로 거기에 있는 건 내가 가진 진실이다.
내가 좋은 것의 집합이 아니라는 진실, 때로는 너무 중요한 것이 생김으로써 나쁜 마음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진실, 나쁜 마음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진실, 그럼에도 사람은 미움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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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지탱하는 중심점이다.

실존주의로 풀어가는 여러 고민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이 쓰여 있는 책.

니체가 말한 "당신이 되어라"에서의 ‘되다‘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해 순수한 자기를 발견하라고 요구한 게 아닙니다. 도전하고 고통과 실패로부터 배우며,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자기되기‘는 잃어버린 자기와 다시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특수한 자기를 창조하며 현재를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는 말합니다. "당신의 참된 본성은 당신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게 아니다. 당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혹은적어도 당신이 평소 당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보다 위에 있다."

당연히 우리 모두가 억만장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 의미의 확장을 꾀할 수는 있지요. 그 분야에서 더 많은 걸 할수록, 더 잘하게 될수록 세계 안에서 더 많은 의미를 보게될 겁니다. 그러면 세계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전문성을 더 키우면 통찰력은 더 깊어집니다.

야스퍼스는 우리가 한계상황을 똑바로 인지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계상황은 내 모든 능력과 권한이 끝나는 지점, 즉 내 존재의끝 지점입니다. 그 지점에서 내 존재를 바라보면, 이전의일차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나를 더 전체적이고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시 경험의 많고 적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한계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경험에는 양 말고도 ‘깊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실존주의자들은 개인의 경계를 명확히 확정하는 시각에 반대했습니다. 얼핏 보면 실존주의는 개인의 가능성과자기결정권에 주목하면서 한 사람의 뚜렷한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개인이 얼마나 심대하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지에 주목합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내 존재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고찰할 것을 강조하죠.
내 존재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정말로 순수하게
‘나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목표는사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구성되었습니다. 내가뭔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욕망 자체는 타인의 욕망에 영향을 받습니다. 순수하게 나의 결정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매 순간 남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죠.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나와 타인의 관계는근원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고 공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고요히 자기를 들여다보면이내 "자신의 허무, 버림받음, 부족함, 예속, 무력, 공허,"
를 느끼게 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권태, 우울, 고뇌, 원망, 절망이 올라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일에 마음을빼앗기지 않고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자신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게 다름 아닌 고통, 공허, 무력감이라는 것이죠. 이런 감정이 불쾌하다 보니, 인간은 끊임없이 ‘환상‘을 만들어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없앱니다. 자극적인 놀잇거리에 빠지거나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에 몰두하여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사에서 이 구별에가장 크게 주목했던 분야입니다. 실존주의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유 개념과 구별되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가 말하는 절대적 자유란 나의 존재가 무로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걸 인식할 때 발견하게 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일인칭 관점에서 진지하게 마주하면, 내 삶이 최종적으로는 오로지 나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과학자들이 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든, SNS에서 무슨 정보를 접하든, 내 삶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 선택은 내가 내립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보면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지만, 일인칭 관점에서나는 분명 선택의 자유를 가집니다.

하지만 나의 본질, 진짜 나, 순수한 나 같은 게 정말로있는지는 의심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존재는매 순간 흐르며, 고정적인 본질이란 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찾는다‘는 말보다는 나를 ‘만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죠.

마지막으로, ‘불안정성‘이라고 언급한 야스퍼스의단어는 사실 ‘두둥실 떠다님‘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Schwebe‘라는 걸 짚어두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는지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확실한 앎이 우리에게 안정성과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의식 없는 앎은 환상으로 변질됩니다. 자신에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으면 앎은 안다는 착각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는지 알려고하기보다, 확실한 앎 없이도 삶을 만끽하고 상황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의 기준에 뿌리 내리는것보다 두둥실 떠다니며 삶을 이끌어나가는 자세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나의 무한한 우주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결코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알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신념이 뭔지,
내 기억과 상상력의 끝이 어디인지 나 자신도 완전히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압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무지에 내던져진 게 곧 인생임을 알죠.
그래서 자아의 다양한 면모에 열려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언제든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수 있다는 걸 압니다. 키르케고르는 내면의 무한한 어둠으로 깊이 침잠하고자 했기에 완전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식을 가집니다.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왜 사는 거지? 이런의식을 품을 수 있죠. 그리고 자기의식을 가진다는 건 나자신을 의식 대상으로서 세운다는 뜻입니다. 즉, 나를 의식하려면 나를 마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마주 본다는 건 ‘보이는 나‘와 ‘보는 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걸 뜻합니다. 평소에 나는분명히 한 명의 사람으로서, 완전히 통일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를 의식할 때 나는 두 명의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의식되는 나‘와 ‘의식하는 나‘가갈라지는 것이죠.
이로써 나는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납니다. 나 자신을 깨뜨리고 나온다고나 할까요? 사르트르는 이것이 인간 정신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현상을 가리켜 초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그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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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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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해부. 피. 핏줄

아직은 조금 어렵고 난해한 시들.

그럼에도 좋은 부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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