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지탱하는 중심점이다.

실존주의로 풀어가는 여러 고민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이 쓰여 있는 책.

니체가 말한 "당신이 되어라"에서의 ‘되다‘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해 순수한 자기를 발견하라고 요구한 게 아닙니다. 도전하고 고통과 실패로부터 배우며,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자기되기‘는 잃어버린 자기와 다시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특수한 자기를 창조하며 현재를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는 말합니다. "당신의 참된 본성은 당신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게 아니다. 당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혹은적어도 당신이 평소 당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보다 위에 있다."

당연히 우리 모두가 억만장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 의미의 확장을 꾀할 수는 있지요. 그 분야에서 더 많은 걸 할수록, 더 잘하게 될수록 세계 안에서 더 많은 의미를 보게될 겁니다. 그러면 세계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전문성을 더 키우면 통찰력은 더 깊어집니다.

야스퍼스는 우리가 한계상황을 똑바로 인지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계상황은 내 모든 능력과 권한이 끝나는 지점, 즉 내 존재의끝 지점입니다. 그 지점에서 내 존재를 바라보면, 이전의일차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나를 더 전체적이고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시 경험의 많고 적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한계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경험에는 양 말고도 ‘깊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실존주의자들은 개인의 경계를 명확히 확정하는 시각에 반대했습니다. 얼핏 보면 실존주의는 개인의 가능성과자기결정권에 주목하면서 한 사람의 뚜렷한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개인이 얼마나 심대하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지에 주목합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내 존재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고찰할 것을 강조하죠.
내 존재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정말로 순수하게
‘나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목표는사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구성되었습니다. 내가뭔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욕망 자체는 타인의 욕망에 영향을 받습니다. 순수하게 나의 결정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매 순간 남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죠.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나와 타인의 관계는근원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고 공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고요히 자기를 들여다보면이내 "자신의 허무, 버림받음, 부족함, 예속, 무력, 공허,"
를 느끼게 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권태, 우울, 고뇌, 원망, 절망이 올라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일에 마음을빼앗기지 않고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자신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게 다름 아닌 고통, 공허, 무력감이라는 것이죠. 이런 감정이 불쾌하다 보니, 인간은 끊임없이 ‘환상‘을 만들어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없앱니다. 자극적인 놀잇거리에 빠지거나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에 몰두하여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사에서 이 구별에가장 크게 주목했던 분야입니다. 실존주의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유 개념과 구별되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가 말하는 절대적 자유란 나의 존재가 무로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걸 인식할 때 발견하게 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일인칭 관점에서 진지하게 마주하면, 내 삶이 최종적으로는 오로지 나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과학자들이 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든, SNS에서 무슨 정보를 접하든, 내 삶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 선택은 내가 내립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보면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지만, 일인칭 관점에서나는 분명 선택의 자유를 가집니다.

하지만 나의 본질, 진짜 나, 순수한 나 같은 게 정말로있는지는 의심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존재는매 순간 흐르며, 고정적인 본질이란 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찾는다‘는 말보다는 나를 ‘만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죠.

마지막으로, ‘불안정성‘이라고 언급한 야스퍼스의단어는 사실 ‘두둥실 떠다님‘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Schwebe‘라는 걸 짚어두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는지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확실한 앎이 우리에게 안정성과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의식 없는 앎은 환상으로 변질됩니다. 자신에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으면 앎은 안다는 착각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는지 알려고하기보다, 확실한 앎 없이도 삶을 만끽하고 상황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의 기준에 뿌리 내리는것보다 두둥실 떠다니며 삶을 이끌어나가는 자세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나의 무한한 우주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결코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알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신념이 뭔지,
내 기억과 상상력의 끝이 어디인지 나 자신도 완전히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압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무지에 내던져진 게 곧 인생임을 알죠.
그래서 자아의 다양한 면모에 열려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언제든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수 있다는 걸 압니다. 키르케고르는 내면의 무한한 어둠으로 깊이 침잠하고자 했기에 완전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식을 가집니다.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왜 사는 거지? 이런의식을 품을 수 있죠. 그리고 자기의식을 가진다는 건 나자신을 의식 대상으로서 세운다는 뜻입니다. 즉, 나를 의식하려면 나를 마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마주 본다는 건 ‘보이는 나‘와 ‘보는 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걸 뜻합니다. 평소에 나는분명히 한 명의 사람으로서, 완전히 통일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를 의식할 때 나는 두 명의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의식되는 나‘와 ‘의식하는 나‘가갈라지는 것이죠.
이로써 나는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납니다. 나 자신을 깨뜨리고 나온다고나 할까요? 사르트르는 이것이 인간 정신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현상을 가리켜 초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그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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