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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의 순간 - 읽기와 쓰기 사이, 그 무용한 지대에 머무르는 즐거움
김지원 지음 / 오월의봄 / 2025년 10월
평점 :
확실하고 선명한 것을 쫓는 것보다 흐릿하고 어쩌면 무용할 지도 모르는 것을 좋아하기로 한 작가의 생각에 끌린다. 이런 글을 읽으면 광장 가장자리에 홀로 우두커니 서있는 내 뒤로 살며시 다가와 내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짚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챗지피티와 관련해 재밌는 밈이 있다. 기계를 사이에둔 두 사람이 각각 한 사람은 "이 한 문장을 세 쪽짜리 글로만들어줘"라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세 쪽짜리 글을한 문장으로 요약해줘"라고 말하고 있는 그림이다. 말하는사람은 애초에 흥이나 기대 없이 마치 먼지만 들어 있는 거대한 선물 상자를 만들듯 쓰고, 그걸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오늘날 읽고 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핵심을 말하자면 이런 것이 아닌가? 즐거움 없이 무한히 속도를 높이며 바이트만 증식시켜가는 것. - P-1
오늘날 수많은 활동에서 ‘자동화‘라고 선전되는 것들의 상당 부분은 자동화라기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수동화에불과하다. 직접 텃밭에서 흙을 밟고 계절을 느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모든 일을 ‘자동화‘해준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강도 같은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종류의 지적에 대해 마치 ‘이상주의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과연 모든 활동의 시작점과 끝점 사이를효율적으로 삭제해버리는 것을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쯤에서 한 오래된 경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삶에있어 가장 효율적인 것은 빠른 죽음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말한다. 만약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 혹은 이 말을 즐겁게 읽는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 P-1
이처럼 스스로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 먼 미래에라도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쓰기의 즐거움을 한층 더북돋워줄 수 있다. 서간문 같은 비교적 정확한 독자를 상정하는 글이 쓰는 즐거움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서뿐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쓴다는 즐거움, 그 텐션과 에너지를 자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령 다락방에서 홀로 외롭게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그 유리병 편지를 열어 쓰기의 시간에 읽기의시간을 겹쳐갈 것이다. 이는 상호 호혜적, 선물의 관계다. 선물의 핵심은 ‘진심‘과 ‘비효율성‘이다. 쓰는 사람이자신의 즐거움을 담지 않으면 읽는 사람은 그것을 사려 깊게 자신의 나름대로 읽으려는 욕망 자체를 잃게 된다. 반면 텍스트를 싼 겉모습, 텍스트가 담긴 맥락, 주제 등이 얼마나 그럴듯하냐 혹은 허름하냐와 관계없이 나름의 이상함과 즐거움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기어코 그것을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응답하게 만드는 생명력이 있다. 반면 어떤 종류의 텍스트들은 선물이 되지 못한다. ‘효율적인‘ 시스템화, 자동화되고 분담되었으며 쓸모없는 애매한 지대를 최대한버리고 필수 불가결의 노력만을 투입한 기계적인 글쓰기. - P-1
오늘날 대부분의 소통은 본질적으로 서간문보다는 일체의 자투리를 제거해버린 전보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쓸모없음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형식이면서도 연결 상태를 유지해 수신자를 지속적으로번거롭게들쑤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법의 글쓰기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번거로운 일을 해준다니 실로 환영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치 쓸데없는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자동응답기를 틀어놓듯이 자동적으로 각종 쓸모없는 형식뿐인 업무 메일과전보에 대응하고 ‘차단하는 미래는 벌써 성큼 다가와 있다. 마법의 글쓰기 기계가 제공하는 온갖 즐거움 없는 쭉정이글들의 대필, 요약 서비스를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내 방의 책상 앞에 앉는다면 나는 책과 종이를 펼치고 순수한 즐거움으로 이루어지는 다른 종류의 글쓰기, 놀이를 꿈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도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두 가지 글의 차이를 그리 헷갈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즐거움은 이성과 판단보다도 앞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
책 읽는 게 점점 성가셔져 가능한 한 읽지 않기로 했다. 독서란 매우 훌륭한 일과라 생각하면서도 한 글자씩 글자를주워 모아 행을 쫓아서 페이지를 넘겨 가는 게 타인의 수다를 자신의 눈으로 들으려 하는 것만 같아 시끄럽다. 눈은 그런 걸 보기 위한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
우치다 햣켄, 햣키엔 수필 - P-1
어떤 외부 텍스트는 한 사람을 기어이 무릎 꿇리고 삶의 경로를 바꾸어놓고야 만다. 그런 경험은 내 주머니에 돌멩이를 주워 넣는 경험이 아니라, 갑자기 뚱딴지처럼 한계와 의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주머니에 내가 섞여 들어가한낱 모래 알갱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경험이다. - P-1
‘기억‘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 흘러가다가 고여버린 것, 혹은 우리가 의식해서 마음에 두고 언젠가는 유의미한 삶의 연결, 매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모든 것에 대해 앞치마를 펼칠 수는 없다. - P-1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걸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질문을 ‘무엇을 읽고, 무엇에 사로잡히고, 무엇에 어떤 방식으로 머무르고 또 통과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조금 더 부담 없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편협해지고, 자유분방하게 텍스트의 행간을누빌 수 있을 것이다. - P-1
내 상자 속의 문장과 일화, 조각들은 책의 구석에서 제멋대로 끌어왔지만, 파티장 중앙의 가장 빛나는 샹들리에가 아닌 냅킨 같은 것이라서 훔쳐도 대체로 눈에도 띄지 않는 것들이다. 애초에 그 ‘창작자가 저자가 아닌 경우도 많다. (책 속 인용을 그대로 옮겨 적어둔 것도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저 모든 문장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이 있고, 그 ‘순간‘들 때문에 문장들을 훔쳐서 베개 밑 상자에 탐욕스럽게 욱여넣었다. - P-1
과연 완결된 관찰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완결될 수있는가? 어떤 치열한 잡동사니가 ‘끝나는‘, 그로서 ‘완성되는‘ 지점이란 어디인가? 벽에 내걸리고, 제목이 붙고, 역사적 컬렉션에 포함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 모든 ‘사이‘의영역은 지워져도 괜찮은 걸까? - P-1
어떤 텍스트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단지 배울 점을 찾고 그것을 오롯이 흡수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것이 어떤-나조차도 몰랐던-세계와의 불화, 어긋남을 감각하게 되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끄러지듯 텍스트를 읽다가 ‘딴짓을 위해 멈추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이어령은 "독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멈출 지점을 만나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멈춤의 지점으로부터 텍스트와 내가 만나 무언가가 촉발되는 분기가 시작된다. - P-1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말한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길 위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돌멩이 가운데 아무것이나 적당히 주워몇십 분 동안 지그시 바라보는 버릇이었다. 이 드넓은 지구에서 ‘이‘ 순간에 ‘이‘ 장소에서 ‘이‘ 나에게 주워 올려진 ‘이‘ 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과 무의미함에 난 전율 - P-1
할 만큼 한없이 감동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은 분석할 수 없는 것, 그냥 그곳에있는 것, 색이 바래서 잊혀 사라지는 것이다. 난 인터넷을 뒤적거리면서 일반인들이 쓴 방대한 양의 블로그나 트위터를 쳐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물가로떠내려온 말라비틀어진 나뭇조각처럼 5년이나 업데이트하지 않은 블로그에서는 어떤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어딘가 학생이 쓰다 만 것 같은 ‘점심밥 나우now‘ 같은 중얼거림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회학자로서는 실격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분석할수 없는 것‘만 모아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기시 마사히코가 사랑하는 이런 "분석할 수 없는 것"-단편들은 일기와 두서없는 메모에서 불쑥 고개를 든다. 이런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사실 소용없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 삶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것들을 각별하게 모아가기 위해서는 애초에 분류가 있으면 안 된다. - P-1
메모라는 무형식의 형식이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무형식과 무분류는 반드시 일차적으로 메모가나를 경유-통과해가도록 한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이라면전혀 주목하지 않을 만한 것일지라도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끌리는 것들을 모으게 되기 때문이다. 유용한 정보들만을 받아보는 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구제불능의 잡동사니함이다. 언젠가 나는 ‘독서노트‘라는 최소한의 형식(분류)마저도 벗어버릴 것을 고민하고 있다. ‘계속해서 써가는 이들에게 일기는 특정 장르라기보다는 모든 분류될 수 없는 강렬한 상념과 잡동사니, 자투리들이 가장 수상한 방식으로 빛나는 집합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것들을 메모라고 부르고 싶다. 이런 종류의 글은 기본적으로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써 내려갈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틈틈이 가장 ‘영감‘ 이 강렬할 때 순간순간을 최대한 섬세하게 관찰하고, 또 낚아채려는 시도 속에서 이런 글들은 쓰일 수 있다. 모든 의무감, 눈치, 번거로운 것들을 벗겨내고 나면 종이에 남는 것은 자신의 글조차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메모‘다. 이미 발견되어 있는 화석을 모래사장에서 소중하게 집어 올리는 행위, 만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지친 얼굴에서 이미 존재했던 나의 얼룩을 찾는 행위.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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