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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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카이도의 눈과 함께 아마 오래도록 마음에 깊이 새겨질 아름다운 소설이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로 처음 다가왔던 작가이다. 작품 곳곳에 깊게 스며든 여름의 싱그럽고 풋풋한 분위기를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이번에 <가라앉는 프랜시스>로 그는 독자들에게 온통 흰 눈이 모든 감각을 휘몰아 덮어버리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마을과 길을 뒤덮는 하얀 눈, 각각의 형태로 휘날리는 눈의 결정체, 우편물을 배달하는 게이코의 망설이는 마음, 마을 끝의 오두막. 프랜시스(작은 수력발전소 기계 이름이다)의 물소리. 그리고 하늘 끝에서 끝으로 펼쳐진 수억 수조 개의 별.

감각적으로 독자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는 소설이 최근에 있었을까.

도쿄에서 십삼 년간 다닌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훗카이도의 작은 시골 마을 안치나이 우체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게이코. 서른다섯의 그녀는 대학 초반(사회학과 학생이던 때) 원시림 시대 개간에 참여했거나 그 후손인 노인들을 인터뷰하러 이 마을에 온 적이 있었다. 또한 중학 시절 아버지의 전근으로 옆마을 에다루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안치나이는 사람 수도 적고, 하늘의 별을 실컷 볼 수 있는 광활한 농장이 있으며, 그리고 강이 흐르는 곳이다. 다소 소문이 빨리 퍼지긴 하지만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게이코는 모든 것에 만족하며 성실하게 우체국 업무를 한다.

그러다 마을 끝에 혼자 살며 프랜시스라고 이름 붙인 수력발전기 수차를 관리하는 서른여덟의 남자, 가즈히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가즈시코는 군살이 없는 몸집에 세상의 모든 소리, 음을 수집하고 녹음하여 깨끗한 전기를 통한 오디오로 감상하는 섬세한 남자다. 일종의 음향감독같은 기질이 그에게 있다.

성실하게 발전기를 관리하며 안치나이에 보내는 전기를 주관하는 가즈히코. 클래식을 듣고 침실에 흑요석과 선사시대 유물을 모아놓고 요리도 잘하는, 신비로운 남자인 그에게 게이코는 점점 빠져든다.

하얗게 휘날리는 눈 속에 잊지 못할 사랑의 장면을 각인시키려고, 마사시는 단단히 작정한 게 틀림없다. 작품 속 여러 장면이 마치 풍경화를 보듯 섬세하고 아름다웠지만, 압권인 것은 침실 사방의 유리창 블라인드를 모두 올리고 어지럽게 주위로 몰아치는 눈폭풍 속에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아마 이 소설이 영화로 나온다면, 가즈히코의 단층집과 그 안의 거실, 그리고 침실의 길고 긴 양쪽 유리창, 따뜻하고 넓은 욕실 등이 완벽하게 세트로 지어져야 할 것이다. 그만큼 가즈히코의 집과 그 아래 발전소 오두막, 언덕 위의 돔형태 건물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가즈히코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녹음하고 수집하려는 기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거실 소파에서 그 음을 들으면 게이코는 무엇이든 눈앞에 그것이 실제로 펼쳐지고 있는 상상을 한다. 이 작품은 '소리'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가즈히코가 수집한 그 모든 소리와 눈이 내리는 소리, 강물 소리, 프랜시스가 내는 소리, 비행기에서 들을 수 있는 경보음, 봄이 오는 소리, 싹이 돋아나는 소리, 가을 태풍과 비바람 소리,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별이 내보내는 빛의 광음 등 모든 생명과 지구에서 울리는 소리에 대한 경배가 작품 속에 담겨 있다.

하얀 눈과 내면 세계, 사람들의 고독, 그리고 계절이 지나가는 풍경, 다소 망설임이 있는 사랑. 마쓰이에 마사시가 감각의 언어로 펼쳐놓은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또 한번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끼며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도록 할 것이 틀럼없다. 가슴 시리는 겨울이 다가오면, 훗카이도가 생각날 때면, 이 책을 필독하도록 많은 이들에게 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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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조니 선 지음, 홍한결 옮김 / 비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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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으로도 여름 휴가와 힐링이 떠오른다. 일과 성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한 방에 날리는 제목이다. 실제로 저자(난 그를 전혀 몰랐지만 엄청나게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아티스트로서 '타임'지나 '포브스'에도 이름이 언급되었다고 한다.)는 쏟아지는 엄청난 일들 속에서 번아웃을 느끼고 잠시 쉬어가는 일상의 휴식 속에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이 책 속에 바다와 파도와 서핑 이야기는 없다. 대신 식물 기르기와 새 이야기,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와 부모님과 동생, 떠나온 집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감정들이, 작은 파문이 아주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마이너스 2.5 배속으로 천천히 담겨져 있다. 그걸 같이 따라가며 읽고 느끼는 독자들의 가슴에도 이런 반가움과 안도감이 퍼진다. '이건 내 이야기네. 나도 바로 어제 이런 느낌을 가진 적 있는데.'

중국계 캐나다인인 저자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책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건, 사람이 가장 외롭고 힘들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부모님의 단골 식당에서 주인겸 주방장과 그의 가족이 나누던 대화들을 그리워한다. 그 모든 추억에는 '천천히'가 새겨져 있었다. 여전히 어른이 된 자신에게 스크램블 만들기나 차예단 만들기 등을 신나게 알려주시는 부모님, 자신이 버리고 간 식물을 잘 키워주신 부모님의 이야기에서 사람은 과거의 따뜻한 추억을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또 자신이 전에 살았던 집이 지금은 낯선 주인을 만나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용기가 없어 잠깐이라도 들어가보지 못한 일이나, 누군가와의 대화가 어려워 미리 대화의 각본을 준비해 가며, 실제 대화에서 준비 못한 전혀 엉뚱한 화제가 나오면 서둘러 대화를 끝내버린다는 소심함에 대한 고백은 인상 깊다. 그렇게 대화를 접고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 이렇게 말할 걸'하고 후회하는 모습은 사실 숱한 내향적 현대인들의 평범한 일상이기에.

저자가 슬픔을 '새'로 표현한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창가에 앉은 통통하고 귀여운 새의 일러스트를 꼭 만나보기를!) 행복이 언젠가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항상 슬프지만, 슬픔도 역시 떠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며, 요즘은 슬픔을 가지에 잠깐 내려앉은 새처럼 반기려 노력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슬픔은 반드시 떠나기 마련이며, 떠나기 위해선 먼저 찾아오는 게 당연한 거라는 진리.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이 보편적 진리를 문장으로 담담히 표현하기까지 저자는, 얼마나 가슴에 떠다니는 어지러운 감정의 부유물들을 체에 거르고 걸러 고요한 바닥에 알맹이만 남도록 애써야 했을까. 내면에 떠도는 어지러운 감정들에 현기증을 느끼는 많은 청년들이 그러하듯이.

......행복은 '일시적'이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만약 영원한 것이라면 특별한 이름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기쁨이 잠깐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보나 마나 사라질 감정을 굳이 자축하지 말라고 자책하는 대신, 자축할 수 있을 때 자축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 사리지기 전에. 이번에도 사라질 테니까.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러니 왔을 때 반갑게 맞아주는 게 어떨까.(235p)

행복한 순간이 왔을 때 '금방 사라질 감정이다. 오래가지 않을 감정이니, 행복해하는 건 기운낭비다'고 생각했던 저자가 뒤늦게 깨달은 위의 고백은 당연한 얘기처럼 보일지라도 불안을 달고 사는 주위의 청년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문장이다.

행복의 질량이나 부피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행복이란 아주 깃털만한 것이라도, 이 순간에 내 가슴에 찾아왔다는 그 자체만으로 중요한 거라고 알려주고 싶다. 정체모를 불안과 꽁꽁 숨겨두고 싶은 열등감, 외로움에 빠져 있는 청년들에게. (저자인 조니 선이 그랬던 것처럼) 실패의 인정, 꿈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수긍, 매사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그리고 끊임없이 작고 소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숨결 등이 얼마나 우리 삶에 소중한 것인지를 느껴보도록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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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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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어울리는 소설이다.

 

표지의 청량한 여름 분위기는 단연코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을 안겨준다. 초록 숲 가운데로 드러난 푸른 하늘, 그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지개는 홀로그램으로 눈부신 싱그러움과 입체감을 발산한다. 가운데 자리한 초록옷을 입은 붉은 머리 만화 캐릭터는 신비함과 궁금함을 던진다. 그저 아무 자극과 긴장도 없이 휴식을 취하듯 편한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면, 어느새 중간 부분을 훌쩍 가볍게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본 어느 시골 마을, 도심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언덕과 산이 많은 종달새 마을에 붉은 머리의 마녀가 '마법상점'을 열었다. 마법을 써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고(아주 드물게 자신의 마음이 내킬 때만), 약초와 각종 찻잎을 파는 이 상점은 어느 정도 유명하기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각종 사연을 가진 평범한 이들이 저마다 불씨만한 희망을 가지고 마법상점을 찾는다. 화상 흉터를 없애려는 소녀, 죽음을 앞두고 아끼는 고양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내는 노화가,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작가, 상처받은 형의 감정을 치유하고 싶어하는 동생... 그들은 자신을 위해, 또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보려고 마법상점을 찾아온다. 찾아와서 마녀에게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고, 애원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며 자신의 내면 가까이 다가간다. 마법상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내면 바닥에 있는 가장 솔직한 진실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이유를 찾는다.

  

다섯 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처음인 '봄이 깃든 흉터'는 특히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메이는 자신의 팔에 남겨진 화상을 볼 때마다 친구 유토가 자책한다고 여기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종달새 마을 마녀를 찾아간다. 하지만 거절당한 메이는 자신의 내면에 망설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토와 함께 다시 마녀를 찾아간 어느 날, 메이는 뜻밖에도 마법상점에서 유토의 고백을 듣게 된다.

 

'가을비의 이정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하루코의 이야기다. 종달새 마을에서 여러 다정한 이웃들의 힘과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하루코는 슬럼프를 딛고 인생 최고의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간다. 마을에 단 하나뿐인 서점, 하루코의 성공을 짐작하게 하는 마지막 장면은 훈훈하고 흐뭇한 미소를 불러온다.

 

마지막 이야기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에선 ''이라는 고아가 어떻게 스승을 만나 '스이'가 되었는지 잔잔한 사연을 풀어간다. 인간 부모에게서 버림받았지만, 자신과 같은 종인 마녀를 만나 사랑과 돌봄을 느끼며, 진정한 마법사로 탄생하여 독립적인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스토리다.

 

판타지를 빌리지 않고는 위안과 대리만족이 힘들 정도로 각박한 현실이다. 다섯 이야기의 평범한 인물들처럼 우리는 곧잘 힘들고 아파하지만, 언젠가 한번쯤은 만나고 싶은 마법의 존재를 책에서나마 흡입하며 여전히 우리는 녹록지 않은 이 세상을 견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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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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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스트 잉의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은 미국 속에 벌어지는 인종 차별, 특히 중국과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이야기다. 아마도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어릴 때부터 겪어온 수많은 경험들을 녹여낸 이야기들일 것이다.

미국 사회에 경제적 '위기'의 시기가 닥치고, 오랜 위기가 끝난 후 미국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PACT(독자정부같은 최고 권력기관)가 아이들을 납치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일들이 생긴다. 주로 중국계 아시아인에 의해 그들의 위기가 생긴 것이라는 확신이 전염처럼 미국에 퍼지고, PACT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거나 의문을 제시하면 예외없이 경찰에게 잡혀가는 공포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

중국계 미국인 마거릿 미우는 백인 남편 이선과의 사이에 아들 버드를 두었다. '위기' 속에서도 사랑으로 가정을 잘 지켜오던 마거릿은 점차 자신이 쓴 시(특히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로 인해 PACT에게 반동분자로 찍히게 된다. 마거릿의 시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PACT에게 저항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국가의 인종차별정책이나 아이들을 납치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일들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마거릿은 남편과 아들 버드를 위해 PACT에게 잡히기 전에 집을 떠나고, 이후 삼년 간 수많은 곳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이 책은 어린 버드의 이야기로 시작하기에, 어느 날 사라진 엄마를 찾으려는 어린 소년의 모험물이나 추리물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빠와 둘이 '튀지 않고', 엄마를 부정하며 죽은 듯이 살아가는 버드에게 어느 날, 엄마 마거릿이 보내온 편지 한 장이 도착한다. 고양이 그림만이 가득한 그 편지 한 장을 단서로 삼아, 결국 직접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떠나게 되는 버드를 지켜보며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왜 버드는 그렇게 이선과 함께 숨죽여 살아야만 했는지, 도대체 그의 엄마 마거릿이 어떤 반정부적인 일을 했는지, 버드는 과연 당국에 잡히지 않고 엄마를 만날 수 있는지.

그렇게 엄마를 찾아 떠나는 모험물은, 중반 이후 마거릿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인종차별과 사회적 갈등, 인권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압권은, 마지막에 마거릿이 심어놓은 수많은 병뚜껑 스피커를 통해, 그동안 수집해온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서 낭송되는 것이다.

당국에 저항하는 마거릿의 시는, 길 가는 모든 사람들을 멈춰 서게 하며 눈물을 흘리게 한다.

현재형 문체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인권에 대한 실상과 그 저항의 움직임을 다룬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탄압과 폭력이 현대에도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미국이 중국과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시각 중 가장 극단의 반우호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은, 그런 당국에 맞서 여러 가지 형태로 저항하는 시민들의 풍경이다. 마거릿 역시 직접 스피커를 만들며 도시 곳곳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파할 계획을 세웠지만, 그보다 앞서 페인트로, 뜨개실로, 여러 가지 예술적 작업들로 PACT에 저항하는 싸인을 보내는 숨은 저항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작가가 무엇보다 알리고 싶었던 건 바로 이 '저항'과 '회복'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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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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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세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인권을 알게 하는 혁명적인 소설이다.

트랜스 여성인 리즈와 트랜스 여성에서 다시 환원한 에임스, 그리고 시스젠더인 카트리나, 세 명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사랑과 행복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다.

리즈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트랜스 여성이다. 리즈와 탈리아 등 그녀의 친구들은 세상의 편견 속에서 용기있게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삶을 산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용감하고 솔직하다. 자신의 행복의 조건을 알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추구하면서 따뜻한 감성과 유머를 숨기지 않는다.

에이미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본능적 욕구를 위해 스탠리와 바람을 피우는 리즈. 에이미가 위치 추적 앱을 통해 리즈를 뒤쫓아 왔을 때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하듯 에이미를 대하는 장면에서는 아이러니하게 유머가 느껴졌다. 바로 그 장면이, 에이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스탠리를 때리고, 스탠리에게 맞아서 성형한 코가 부러지고, 결국은 쓰러져 흐느껴 우는 그 상황이, 에이미를 다시 에임스로 환원하게 하는 결정적인 문제의 장면이었음에도.

에임스는 어릴 때부터 여자들 속에서 편함을 느끼며 자신 속의 여성성을 서서히 깨달아 결국은 트랜스 여성이 된다. IT개발자로서 꽤 안정적인 백인 트랜스 여성인 에임스는 리즈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위의 스탠리 사건으로 인해 다시 남자로 환원하고, 직장 상사인 카트리나를 임신시키게 된다. 카트리나의 임신을 알고 결국 리즈와 카트리나, 자신 셋이서 함께 아기를 키우게 되는 파격적 제안을 하는 에임스.

카트리나는 아시아인 피가 섞인 혼혈 여성이기에 어찌 보면 또 다른 의미의 소수자이다. 이혼과 유산의 경험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딛고도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로서 유능한 업무 능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에임스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새로운 가정의 희망을 꿈꾸다가, 에임스가 트랜스 여성이었다가 다시 환원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리즈와 함께 셋이서 아기를 키우자는 그의 제안에 처음엔 몹시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책의 중반, 리즈와 카트리나가 동지애를 느끼며 누구보다 강한 친밀감으로 동화되어 함께 아기 용품을 고르고 다니는 장면에서는 미국 사람들의 유연한 생각의 전환이 참으로 부러웠다. 오히려 에임스가 소외될 정도로 친밀하게 서로 연대를 느끼는 리즈와 카트리나. 과연 우리나라에선 이런 정신적 연대가 가능할지.

이 책에서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하고, 가장 애정이 갔던 인물은 카트리나의 엄마다. 카트리나는 엄마로부터 "아기는 엄마들이 많을 수록 더 잘 크게 된다"는 조언을 듣고, 마음을 돌려 리즈를 받아들이고 트랜스 여성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카트리나의 엄마처럼, 편견 없이 바다와 같은 삶의 지혜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멘토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리즈와 에임스, 카트리나의 한 가족 되기 프로젝트에 위기가 온 것은 카트리나의 친구 남편이 리즈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다는 것을 카트리가 알게 되면서이다. 에이즈에 대한 걱정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돌출되면서 카트리나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어서 리즈가 바다에 빠진 것을 자살 시도로 오해한 카트리나와 에임스.(사실 리즈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인물이라 절대 자살같은 걸 시도하지는 않는다.)

책의 결말은 다소 아쉬웠다. 카트리나가 임신 중단을 선언하고 리즈와 에임스와 함께 모였을 때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호하게 마무리한 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주위에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이 세상에는 다양하고 많은 개인들이 존재한다는 걸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정상과 비정상이란 구분선을 짓고, 편견에 사로잡힌 거대한 폭력적 시선으로 이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들을 힘들게 한다.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 1층에는 트랜스 남성과 시스 남성이 살고, 2층에는 레즈비언 부부가 산다. 1층 시스 남성에게 정자를 받은 2층 여자들이 모두 아이를 가지고 각각 아들과 딸을 낳는다. 아이들이 크면서 두 명의 아빠들과 두 명의 엄마들과 한 집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 우리나라에서 이런 가족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질 날은 언제일까. 이런 가족에 대한 희망이 어째서 불가능하고 조롱받아야 하는 것인지, 이 책은 날카롭게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르면서 소중하듯, 누구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망을 등급 매기지 않고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리즈와 스탠리의 관계, 에임스와 리즈의 관계, 그리고 카트리나의 삶을 들여다 보며 인간이 저마다 다양한 피부처럼 갖는 욕망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그러한 체험은 또한 우리의 인식을 더 확장시키며 더 관용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 책을 많은 독자들에게 권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 사회는 더 많은 다양성으로 더 많은 따뜻함과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헐뜯고 비방하며 벽을 세우기 바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문학이야말로 사람들의 인식을 확장시키며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최상의 도구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낀다.

요즘 현대인이,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어떤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제발 정책을 정하고 펼치는 고위 공직자들, 특히 정치인들이 꼭 좀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생활동반자법과 차별금지법이 어서 도입되어 한 발 더 나아간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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