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브레스 - 당신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미나미 교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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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셨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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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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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쪽

  아일랜드 북부 출신의 그레이스는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캐나다로 오던 중 엄마를 잃는다. 배 안에서 죽어 헌 시트를 감고 바닷속으로 던져진 엄마를 보며 그레이스는 창문을 열어주지 못해 엄마의 영혼이 배에 갇혔고 바닷속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토에 와서 파킨슨씨 댁 하녀가 된 그레이스는 메리 휘트니를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고된 생활을 하며 고작 2달러의 월급을 받았지만 그 때를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는 것은 메리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메리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운다. 자질구레한 일부터 윌리엄 라이언 메켄지 이야기나, 결혼하기 전에 누비 이불 세채를 마련해야 된다거나 특히 남자를 조심해야 하는 여자로서의 삶 등. 이 때의 배움은 그레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메리는 그레이스에게 결혼하기 전까지 절대 남자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리석은 사랑으로 임신을 하게 되고 낙태 후유증으로 엄청난 피를 쏟으며 죽었다.

  그레이스는 메리가 죽은 후에 키니어씨의 가정부 낸시의 제안으로 키니어씨 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엔 마굿간지기 맥더모트와 일을 도와주는 소년 제이미 월시, 그리고 키니어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가정부 낸시가 살고 있었다. 낸시는 그레이스에게 잘 해주는 때도 있었지만 키니어 씨와 그레이스가 함께 있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얼마 후 임신하게 된 낸시는 키니어씨의 외출을 틈타 눈엣가시였던 맥더모트와 그레이스에게 월급을 정산해줄테니 나가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낸시와 사이가 안좋았던 맥더모트는 낸시를 도끼로 쳐서 죽이고 키니어 씨는 총으로 쏴죽인다. 그리고 그레이스와 함께 귀중품을 챙겨 달아난다.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된다. 맥더모트는 진술을 번복하기는 했지만 교수형 당할 때까지 그레이스가 사주한 일이었으며 그레이스가 없었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거라고 했다.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지 못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변호사에 의해 진술을 번복하였다.

  맥더모트가 교수형을 당한 후에 그레이스는 감형되어 종신형을 살며 모범수가 되었다. 그레이스의 사면을 요구하던 사람들은 사이먼 조던이라는 신경학박사를 모셔와 그레이스에 대한 보고서를 호의적으로 작성해줄 것을 요구한다. 사이먼은 그레이스와 매일 상담을 하며 그녀 안에 있을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상담이 계속 될 수록 사이먼은 혼란에 빠진다. 차분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는 그레이스의 말에는 진실성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석연치 않은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사악하고 교활한 살인범일까? 맥더모트의 진술에 의하면 그레이스는 맥더모트를 조종해 주인과 그 정부를 살해하게 한 교활한 범죄자이다. 하지만 사건 이전의 그레이스는 평판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일을 잘했고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였다. 만약 그레이스가 범죄자라면 어릴 적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억압된 여성의 대표격인 어머니와 메리의 비극적인 죽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않고 일하는 고된 삶이 낸시를 만나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데 (출신, 인성, 일솜씨) 어쩌면 키니어의 부인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 자신에 가하는 부당한 대우에 그동안 억압된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그레이스에게 있어 낸시는 부정한 죄인이었다.

 낸시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고 쫓겨나서 대로변을 헤매다 건달들의 먹이가 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혼반지가 있는 어엿한 유부녀가 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부잣집 마님까지 되는 건 불공평했어요. 메리 휘트니는 그랬다가 죽었잖아요. 똑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누구는 상을 받고 누구는 벌을 받다니 말이 안 되는 일 아니에요? 407쪽

  그레이스에게 낸시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키니어 나리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지 몰라도 낸시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맥더모트를 사주하여 살인하게 만들만큼 잔혹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는가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레이스는 보통 침착하고 차분하며 닭 모가지도 내리치지 못하는 여린 심성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누명을 쓴 희생양에 불과 할까? 그레이스가 살인이 저질러진 장소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니 그레이스가 교활한 범죄자가 아니라면, 이중인격에 의한 살인 조장 내지는 방조에 대한 혐의를 생각해봐야 한다. 메리가 죽고나서 그레이스가 의식을 잃는 동안 메리의 영혼의 빙의된 것 같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때 메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들렸어요. 나 좀 들여보내줘. 저는 깜짝 놀라서 메리를 뚫여져라 쳐다봤어요. 저희가 침대를 정리하느라 메리는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한 기미가 전혀 안 보였거든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죠. 그런데 문득 창문을 안 열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저는 얼른 달려가서 창문을 열었어요. 나 좀 내보내 줘라고 한 걸 잘못 들은게 분명했거든요. 266쪽

  그레이스는 엄마의 죽음 이후로 사람이 죽으면 창문을 열어 영혼을 내보내줘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그런데 메리가 죽고나서 들은 환청은 분명 나 좀 들여보내줘. 였다. 만약 빙의라면 메리의 영혼이 그레이스의 몸 안으로 들여보내달라는 뜻이었을 거다.

 또 이런 내용도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제가 열 시간 동안 누워 있었다고 해요. 아무리 꼬집고 때리고 찬물을 끼얹고 코밑을 깃털로 간질여도 일어나지 않더래요. 그러다 일어났을 때에는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레이스는 어디 있냐고 묻더래요. 그래서 네가 그레이스라고 알려 주었더니 믿지 않고 울면서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더래요. 그레이스가 없어졌다고, 호수에 몸을 던졌으니 찾아야한다고 하면서요. 267쪽

  그레이스의 말이 진실이라면 위 사건은 메리의 영혼이 빙의되어 이중인격을 보여준 증거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그레이스가 혼잣말을 할 때가 있어서 무섭다는 낸시의 말등은 이중인격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레이스에 관해서라면 미스터리의 인물 제러마이어를 빼놓을 수가 없다. 제러마이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그레이스에게 물을 세 번 건너지만 결국은 괜찮아진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 정말 결국 그렇게 되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그레이스에게 위안을 주고 경고도 해주는 그였기에 그레이스는 메리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 해준다. 둘은 비밀을 공유한다.

 그런데 그가 또 아주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너는 우리하고 비슷한 부류라고. 232쪽

  제러마이어가 그레이스에게 비슷한 부류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레이스가 교활한 범죄자라면 비슷한 부류라는 의미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의미가 될 테고 그레이스가 무죄라면 그레이스는 영매라는 의미이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그레이스의 꿈도 과학적인 의미로 보면 정신분석학이지만 그녀가 실제 깨어있었다는 의미를 보면 영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레이스와 상담을 계속 이어가던 사이먼도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문제는 기억하는 게 많아질수록 그녀의 말이 많아지고 그의 고충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자꾸 맥을 놓친다. 그녀가 그의 기운을 빼앗아 가는 것 같다. 신이 들렸을 때 영매가 그러는 것처럼 그의 정신력을 이용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불러내는 것 같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상상에 빠지면 안 된다. 428쪽

 사이먼은 상담과 별개로 점점 그레이스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혼을 생각할 만큼 빠져든다.

 문제는 그도 그녀의 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아미나이길 바란다. 그녀의 혐의가 벗겨지길 바란다. 474쪽

 생각해보니 그레이스 마크스는 지금까지 만난 중에서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여자다. 570쪽

  사이먼 박사는 그레이스가 정말로 기억상실증 환자인지 아니면 그럴듯하게 꾸며낸 정신병자인지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결론을 내리는데 실패한다. 설상가상으로 갈망하던 그레이스가 아닌 하숙집 주인 험프리 부인의 덫에 빠져 허우적 댄다. 사이먼 박사의 연구가 지지부진하자 그레이스 사면위원회는 제롬 뒤퐁 박사로 가장한 제러마이어에게 최면술을 맡긴다. 이 때 그레이스는 영혼이 빙의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사이먼은 충격을 받는다. 사이먼은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경우 자신의 업적에 방해가 될 거라 판단해 보고서 작성을 거부한다. 사이먼이 하숙집에 돌아오자 험프리 부인은 이틀 뒤에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며 남편이 돌아오면 사고사로 위장하여 살해해달라는 바람을 전한다. 곤경에 처한 사이먼은 사면을 위한 보고서와 험프리 부인의 올가미를 피해 어머니 핑계를 대고 본국으로 달아난다.

  사이먼의 도움은 없었지만 그레이스는 결국 사면받는다. 수감된지 30년이 지난 후였다. 의지할 가족도 집도 없는 그레이스는 교도소장 부인과 딸의 도움으로 새 거처로 떠나는데 그 곳에는 제이미 월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미 월시는 질투에 눈이 멀어 위증을 했으나 내내 후회했다고 했다. 아내와 사별한 후라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청혼하고 둘은 결혼한다. 그레이스는 제이미와 담백한 결혼생활을 하며 자신만을 위해서 처음으로 천국의 나무 패턴으로 누비 이불을 만들며 끝낸다.

  이 소설에서 퀼트 패턴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1부 부터 15부까지 <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 2부 가시밭길 3부 길모퉁이의 고양이 4부 젊은 남자의 환상 5부 깨진 그릇들 6부 비밀 서랍 7부 지그재그 울타리 8부 여우와 기러기들 9부 하트와 모래주머니 10부 호수의 여인 11부 쓰러지는 나무들 12부 솔로몬 성전 13부 판도라의 상자 14부 글자X 15부 천국의 나무> 모두 퀼트를 만들 때 쓰는 패턴의 이름이다. 그레이스는 사면받아 나올 때 짐상자 속에 있던 메리의 페티코트와 낸시의 드레스 조각을 잘라온다. 교도소장의 딸 재닛에게 부탁해 감옥에서 입었던 잠옷도 가져온다. 천국의 나무 패턴을 만들 때 이 세조각을 이어붙이며 말한다. '그러면 우리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겠죠' 670쪽

  셋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정말로 메리의 영혼이 빙의된 것이었을까? 최면술 중에 메리에게 빙의된 것으로 보이는 그레이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낸시도 아니야, 이 멍청아! 낸시는 아무 말도 못해. 목이 그렇게 됐으니 한마디도 못해. 옛날에는 아주 예쁜 목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낸시는 화도 안 내고, 상관하지도 않고, 내 친구야. 이제는 이해하고, 나하고 사이좋게 나눠 쓰려고 해. 자, 의사 선생님."590쪽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사건을 처음에 접했을 때는 그레이스가 유죄라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 하에 「하녀」라는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을 집필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어 좀 더 정확한 관점에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만들어 낸 결과물이 바로 『그레이스』다. 옮긴이는 이 작품을 애트우드가 독자들을 위해 마련한,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게임일지 모른다고 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나는 소설 초반부터 그레이스가 교활한 범죄자일리 없다고 생각하며 읽었고 마지막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제러마이어라는 인물이 궁금해서 놓친 퍼즐을 맞추자는 심정으로 그레이스가 범죄자라는 관점으로 재독했다. 역시나 결론은 미심쩍다. 그레이스를 범죄자와 희생양의 양 극단에 두고 작가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으나 끝까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대단하다 이 작가는. 사실 나는 애트우드가 만들어낸 소설 속 그레이스가 미치도록 매력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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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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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영화 '디 아워스'(디 아워스는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가칭이다.) 를 봤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니콜 키드먼과 줄리안 무어 그리고 메릴 스트립의 놀라운 연기로 담아낸, 각기 다른 시대를 사는 세 여인의 삶속에 담긴 우울의 심연.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인물들을 보며 잔잔해 보이는 삶이 이리도 무서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물살을 헤치고 강물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가던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시간이 지나도 그 우울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등대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바로 그 우울감에 갇혀 버렸다. 도저히 못견디고 책을 덮고 집 앞을 산책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책장을 펼쳤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뭔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였을까?

소설은 1부 창, 2부 시간이 흐르다, 3부 등대 이렇게 세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1부에서 렘지 부인은 등대에 가고 싶어하는 아들 제임스에게 내일 날씨가 좋으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렘지 씨는 내일 날씨가 좋지 않아 등대에는 가지 못할 거라며 어린 아들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렘지 부인은 이 대화를 안타까워하며 제임스가 절대로 이 일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한 건 오히려 렘지 씨였고, 그는 3부에서 아내의 유지를 따르듯 내켜하지 않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등대로 간다.

1부에는 주로 등장인물인 렘지 부부와 자녀들, 릴리, 윌리엄 뱅크스, 탠슬리, 폴과 민터, 그리고 카마이클 등 초대받은 손님들에 대한 묘사가 렘지 부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램지부인은 대단한 미인으로 그려진다. 다소 무식하다는 평판을 듣기는 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배우지 않고도 아는 타입이었다. 그녀의 소박함은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깊이있게 이해했다. 그녀의 외골수 지력은 그녀를 돌처럼 곧바로 하강해서 새처럼 정확하게 목표 앞에 내려앉게 하여 자연히 그녀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지탱시켜주는 진리에 도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어쩌면 거짓되게일지도 모른다. 45쪽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자식들에게는 찬탄의 대상인 그녀지만 남편 렘지에게는 위축되는 모습을 보인다. 렘지 씨는 그녀가 책 읽는 모습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그녀가 책의 내용을 이해는 하는건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내를 무시한다. 철학 교수로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한다는 자부심 그 안에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이 깔려있다.

다른 사람은 우유 속에 지네가 빠졌어도 참는다. 그러나 램지 씨는 이렇게 자기 주위에다 권위의 울타리를 높이 쌓아 올리고 그 안에 군림하였기 때문에 비록 집게벌레 한 마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괴물이 빠진 것과 똑같았다. 274쪽

1부에서 릴리는 손님 중 한명으로 못생긴 편에 실력도 보잘것 없는 화가다. 릴리는 렘지 부인을 동경하며 그녀의 관심과 애정을 바랐다. 누구나 결혼해야 한다는 렘지 부인의 말에 백프로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렘지 부인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 안에서 여자의 삶에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던 릴리는 렘지부인이 죽고난 후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에 확신을 가지고 안도한다. 렘지 부인의 표현에 따르면 신통치 않은 실력을 가진 릴리는 자신의 그림이 다락방이나 구석에 처박힐 것을 상상하며 대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인생에 대한 질문과 다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단어들이나 그림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지만 내 그림은 다락방에나 걸릴 것들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으니, 그것은 둘둘 말려서 소파 밑에 처박힐 것이었지만 설사 그렇다손치더라도 심지어 이 그림같이 하찮은 경우에도 예술의 영원성만은 진실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것과 같이 극적거린 것에 불과한 이 그림에 대해서도, 어쩌면 이 실제의 그림이 아니라 이 그림이 시도한 것, 바로 그것이 '영원히 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려 하고 있었다. 248쪽

3부에서 릴리는 삶에 통찰력을 얻고 렘지 씨는 등대에 도달하며 소설은 끝난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면서 물었던 것은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럼 렘지 씨가 도달한 등대는 어떤 의미였을까? 등대에 조사 -로 를 붙인 의미는 무엇일까? 등대로 가는 길은 존재의 심연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였을까? 어둡거나 밝거나 평온하거나 폭풍우가 몰아치거나 항상 그 자리에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빛을 주고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삶의 지향. 렘지 씨에게 그것은 이타적인 삶에의 지향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렘지 부인의 지향하는 삶이기도 했다. 자기 안의 철학과 이기에 갇혀 밖을 보지 못했던 렘지 씨가 등대로 여행을 떠나고 지루한 항해 끝에 발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은 렘지 씨에게든 또다른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마 2부는 렘지 씨가 등대로 향하게 된 이유. 그의 변화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 같다. 1부의 하루와 3부의 하루 사이에 십년이 흘렀다. 렘지 씨는 집 안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렘지 부인이 죽고나서 딸과 아들도 하나씩 잃어야 했다. 십년 전과는 분명 다른 렘지 씨 였을 것이다.

그는 그냥 앉아서 섬을 바라보고 우리는 각자 외로이 죽어간다, 아니면 드디어 나는 그것에 도달했다, 나는 드디어 그것을 찾아내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284쪽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 예민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빛나는 지성이었지만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로 트라우마를 지닌 한 사람으로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 버지니아 울프가 연상되어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의식의 흐름기법이라는 소설사적 업적을 굳이 따지지 않고도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로 가득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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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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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시녀이야기> 이후 이어진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 <증언들>이다.

<시녀이야기>를 읽는 내내 궁금했던 주인공 오브프레드의 이름이 밝혀졌다. 그녀의 이름은 준.

준은 딸이 다섯살 때 아이를 빼앗기고 시녀가 된다. 아이는 카일 사령관의 아내 타비사의 선택을 받아 아그네스 제미마라는 이름으로 살게된다.

시녀이야기 마지막에 오브프레드가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는데 증언들에 그 아이가 나온다. 아기 이름은 니콜이다. 준과 닉은 아이를 낳아 캐나다로 아이를 빼돌리고 자신들도 탈출한다. 이 아기는 길리어드의 상징적 의미가 되어 길리어드 밖의 세계에 외치는 구호가 된다. 아기 니콜을 길리어드로 돌려달라! 아이는 본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닐과 멜리사에 의해 데이지라 불리며 자란다.

<시녀이야기>에서 시녀들이 공식적으로 지워진 자신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서로의 이름을 나누며 기억해주는 것처럼 <증언들>에서도 억울하고 쓸쓸하게 죽어간 오브카일의 이름을 아그네스가 기억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두 작품 모두 이름의 의미를 중요시 여긴다. 아그네스 제미마의 이름에도 의미가 있다. 아그네스 제미마는 어린양이며 빼앗긴 딸이라는 의미다.

제미마라는 이름은 성경의 일화에서 따온 거예요. 제미마는 아주 특별한 여자아이였는데, 그 애의 아버지 욥이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 온갖 불운을 겪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최악의 사건이 욥의 자식 모두가 죽임을 당한 것이에요. 아들들, 딸들 모두 다요. 죽어버렸죠!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욥의 마음이란, 참담했을 거예요.

하지만 욥은 시험을 통과했고, 하느님이 그에게 다른 자식들을 주었어요. 아들 여럿, 그리고 세 딸도요. 그래서 다시 욥은 행복해졌대요. 그리고 제미마는 그 딸 중 하나예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어요. 곰곰이 되짚어 생각하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에요. 하느님이 새 자식들을 옜다 던져 주면서 이제 죽은 자식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척 살라고 했는데, 욥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게 허락했던 걸까요? 31~32쪽

증언들은

길리어드 창설자 리디아 아주머니

오브프레드의 두 딸인 아그네스 제미마와 니콜

세 여자의 증언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그네스의 증언은 증언 녹취록 369A 로 니콜의 증언은 증언 녹취록 369B로 기록된다.

길리어드의 피해자 준의 딸들은 다행이도 양부모의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거짓의 삶을 살아야했다. 평범한 일상이 흔들리며 거짓을 자각한 후 리디아에 의해 정의를 찾아 부모를 찾아 캐나다로 탈출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창설자이면서 아르두아홀의 총책임자이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본래 판사였다 잡혀와서 조직에 적합한 사람인지 여러 단계의 시험을 거친 후 여성을 관리하는 조직의 창설자가 되어 엄격한 관리통제 능력을 보여주며 일인자가 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지략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직의 일인자였지만 한 번도 조직에 진심으로 충성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피시험자로서 굴욕을 당하는 내내 리디아는 그 순간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후반에서는 니콜을 데려와 탈출시키고 길리어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리디아가 조직을 창설하고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니콜과 함께 캐나다로 탈출시켰기에 길리어드는 짧은 시간내에 무너질 수 있었다.

아그네스의 친구 베카가 성적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결혼을 거부하고 자살기도를 하자 리디아 아주머니는 베카를 아르두아홀(리디아를 위시한 창설자 아주머니들이 관장하는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드 사령관(아르두아홀 창설에 관여한 고위 사령관이며 리디아 아주머니에게 영향력을 끼치나 시간이 지날수록 리디아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유지하는 인물)과 결혼을 앞둔 아그네스에게 결혼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암시를 주고 떠난다. 아그네스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만 엄마로 알고 있던 타비사가 사망하고 새로 엄마가 된 폴라의 구박과 동생 마크의 탄생으로 집에서 소외된다. 결정적으로 베카의 아버지인 그로브 박사에게 추행을 당한 후 결혼을 통해 아내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아르두아홀로 간다. 여기서 리디아의 지략가적인 면모가 매우 돋보인다. 니콜의 언니 아그네스를 아주머니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친구 베카는 결혼을 피해 아르두아홀로 오게 된 것에 대해 리디아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되기 위해 수련의 과정을 하나씩 마쳐가며 아그네스와 베카는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고른다. 베카는 임모르텔 아주머니 아그네스는 빅코리아 아주머니가 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진주 소녀라는 하부 조직을 만들어 국외에서 전도사업을 펼치는 임무를 맡기고 있었다. 사실은 이 사업을 통해 리디아는 길리어드 밖의 세상과 정보를 주고받았으며 양부모를 잃은 니콜을 안전하게 길리어드 내로 유입시킨다. 니콜이 길리어드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긴 저드 사령관은 매우 기뻐하지만 리디아는 바로 니콜을 넘겨주지 않고 진주 소녀가 될 준비를 하던 두 아그네스와 베카에게 니콜의 교화를 맡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궁지에 몰린 저드 사령관이 서둘러 니콜을 공개하라고 한다. 리디아는 서둘러 아그네스와 베카에게 니콜의 정체를 밝히고 캐나다 탈출 계획을 일러준다. 아그네스와 니콜이 떠나고 베카는 아르두아홀에 남아 자신을 희생해 둘의 탈출을 돕는다. 베카의 희생이 매우 마음아팠는데 이에 대한 복선이 있었다.

에스테 아주머니가 한숨을 쉬었어요.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희생해야 한단다." 달래는 말투였지요. "남자들은 전쟁에서 희생을 치르고 여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희생해야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세상이 나뉜 거란다."…"나는 절대로,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 애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어요. 118~119쪽

임모르텔은 불멸 불사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다. 선을 베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베카에게 작가는 불멸의 이름을 선물해 준 듯하다.

아그네스가 고른 이름은 승리의 뜻인 빅토리아였다. 그 이름대로 아그네스와 니콜은 탈출에 성공한다.

리디아는 모든 기록을 마무리한채 죽음을 준비한다.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은 꼭 같이 읽어야한다.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는 편이 낫다. 전편의 미스터리가 후편에서 풀리면서 쾌감이 들고 무척 재미있다. 작가의 소설가적 역량이 대단하다. 참신한 소재, 긴장감있는 서사, 디테일한 심리묘사, 인간본성에 대한 의문, 신화와 성경에 대한 통찰이 작품을 꿰뚫고 있다. 구석구석의 모든 요소들이 작가의 의도대로 배치되었고 모두 제 역할을 해낸다.

아그네스는 제미마라는 이름에 얽힌 성경 이야기를 하며 그 이야기가 얼마나 부당한가에 의문을 갖는다. 베카는 아주머니가 되어 확인한 성경의 열두 조각으로 잘린 첩 이야기에서 첩이 스스로 희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제물로 내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성에게 공정하지 못한 성경 안의 이야기 그것은 곧 길리어드라는 정부의 부조리함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여성을 걸어다니는 자궁으로만 취급하고 그 외의 어떠한 자율권도 주지 않는 정부. 여성에게 읽고 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은 정부는 그들이 멸시했던 여성들에 의해 파괴된다. 아그네스가 5살 때 시작된 독재가 24살에 끝났으니 어리석고 미개한 정부는 20여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리디아가 아니었으면 길리어드 정부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창설자가 종결자가 되었다는 플롯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보다 완벽한 서사가 있을까? 소설 중반에서 아그네스와 니콜의 캐릭터가 리디아에 비해 조금 약한게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원숙한 여인인 리디아에 비해 아기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고 자란 어린 소녀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 있는 설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책. 처참하지만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 책. 이성을 자극하고 경계심을 불러오는 책. <증언들>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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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환상적 모험을 통한 신랄한 풍자소설, 책 읽어드립니다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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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동화책으로 익히 알고 있던 책. 피부색이 검고 희거나 코가 크고 작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 책. 그 책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다.

동화와 또 다른 얘기가 더 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하고 책을 들었지만 기대이상이었다. 사회적 관습이나 법률 철학 등과 같은 굵직한 부분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인간성의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낱낱이 까발리는 클라스다.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걸리버의 여행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릴리퍼트 기행 (소인국)

걸리버는 동인도로 가던 중에 폭풍우를 만나 해변으로 떠밀려 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곳에는 15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학문을 장려한 황제의 정책 덕분에 수학과 기계공학이 매우 발달했고 줄타기와 같은 오락을 중시했다. 걸리버는 적국과의 싸움에도 공을 세웠지만 황제의 계획을 거부해 미움을 사 적국인 블레푸스쿠로 피신한 후 소인국을 떠난다.

통계에 따르면 작은 쪽으로 달걀을 깨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은 1만1000여 명에 이릅니다. 이 문제를 놓고 두툼한 책들이 수백권도 넘게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넓은 쪽으로 달걀깨는 것을 옹호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공직에 나서지 못하게 법룰도 제정되었지요. 59쪽

황제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아마 그는 블레푸스쿠의 영토까지 지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다음 그곳으로 망명한, 달걀을 넓은 쪽부터 깨야 한다는 파벌 사람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달걀을 작은 쪽부터 깨라고 강요하며 가장 위대한 황제로 남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65쪽

작은 사람들은 도둑질보다 사기를 더 큰 죄로 생각했다. 그래서 사기꾼은 늘 사형으로 처벌했다. ……그의 죄를 덜어줄 섬으로 단지 신용을 어렸을 뿐이지 않느냐고 말해버렸다. 황제는 변호한다고 늘어놓는 소리가 도리어 죄를 무겁게 하고 있으니 기괴망측하다고 했다. 71쪽

릴리퍼트에서 달걀을 깨는 방향으로 당파가 나뉘고 적대시하는 것에 실소가 터져나왔으나 뒷맛이 썼다. 우리는 뭐가 다른가? 이념과 종교 갈등으로 수천 수만명이 살상된 역사가 있다. 달걀이 곧 이념이고 종교나 다름 없다.

브롭딩낵 기행

다시 여행에 나선 걸리버는 항해도중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거인들이 사는 곳에 당도한다. 거대한 사람들은 걸리버를 매우 신기해하고 귀여워하며 하찮은 구경거리로 만든다. 걸리버는 거인국을 떠날 때까지 농부의 딸 글룸달클리치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처럼 작은 벌레들도 흉내를 내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실은 얼마나 하찮단 말인가!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관직이 있을 것이고, 작은 둥지나 땅굴을 만들어 집과 도시라 부르며 옷과 마차로 자신을 과시하려 들고, 연애하고, 싸우고, 논쟁하고, 속이고, 배신할 것이다." 134쪽

그런데 우리는 가장 먼저 그가 다른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른 문명의 관습과 견해를 알지 못하면 편견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렇게 먼 나라에 사는 국왕이 가진 선악에 대한 생각을 모든 인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171쪽

좁은 도량과 짧은 생각에서 나온 기묘한 결과였다. 뛰어난 재능, 위대한 지혜, 깊은 학문과 놀라운 통치력을 갖추어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는 국왕이 쓸데없는 염려 때문에 백성들의 생명과 자유 , 재산의 절대적 지배자가 될 기회를 어이없이 놓치고 만 것이다. 172쪽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기행

세 번째 항해에 나선 걸리버는 해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며칠 먹을 식량만 받고 홀로 버려져 섬들을 헤맨다. 라퓨타는 공중에 뜨고 날아다니는 신기한 섬이었다. 라퓨타 사람들은 더 기이했다. 머리는 모두 기울어져 있고 한 쪽 눈은 안쪽을, 다른 한 쪽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인들은 오줌통이 매달린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주인의 귀나 입을 살짝 쳐주어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이 사람들은 수학과 음악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자신은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생각해, 로마로 돌아간 후 자신의 배보다 더 큰 배의 함장이 죽었으니 그 배의 지휘권을 맡겨달라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청원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청원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는 바다라고는 본 적도 없는 풋내기의 차지가 되었고, 정작 자신은 직무태만 죄로 원래의 전함마저 부사령관 푸블리콜라가 아끼는 시종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265쪽

따라서 문제는 언제까지나 청춘을 누리며 건강하고 부유한 사람을 살겠느냐는 것이 아니라, 노년과 함께 찾아오는 온갖 불편을 이겨내며 불멸의 삶을 누릴 수 있느냐는 것일세. 279쪽

휴이넘 기행

걸리버는 선장이 되어 항해에 나섰다 선원들의 반란으로 버려진 걸리버는 휴이넘에서 인간을 닮은 짐승 야후를 만난다. 그 곳에서 야후는 휴이넘이라고 불리는 말들 보다 못한 존재였다. 걸리버는 휴이넘 주인과 대화를 통해 인간 본성의 천함을 깨닫는다.

첫 번째는 두 배의 보수를 치르고 상대 변호사를 매수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신의 의뢰인에게는 공교롭게도 이쪽 주장이 더 정당하다고 하며 넌지시 배신을 때릴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반대로 제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이 소가 상대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되도록 자신의 소송이 부당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잘만 되면 이 방법으로 틀림없이 판사들의 동정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331~332쪽

또 포도주를 다른 나라에서 구해오는 것은 결코 물이나 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이 포도주를 마시면 모든 것을 잊고 유쾌한 기분이 되어 우울한 마음이 진정되고 머릿속에는 허황된 상상이 솟아나 희망이 생겨나고 불안은 사라지고, 얼마 동안 이성도 그 기능이 멈추어 손발도 말을 듣지 않다가 끝내는 깊은 잠에 빠지기 위해서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면 숙취가 남아 있고 과용하면 온갖 병이 생겨나 결국에는 생명마저 단축된 것도 이 것 덕분이지요. 338쪽

때때로 미친 것처럼 구석에 드러누워 울부짖거나 신음을 내다 누가 다가오면 발로 뻥 차는 야후가 있더구나. 아직 나이도 어린데다 건강한 야후였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인들은 도대체 무엇이 원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단다. 이런 경우에 유일한 치료법은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이었지. 그랬더니 제정신을 차렸단다. 353쪽

휴이넘은 배우자를 다른 휴이넘과 똑같은 사랑과 우정으로 대하기 때문에 질투나 맹목적인 사랑, 부부 싸움, 불만은 찾아볼 수도 없다.

주인은 우리가 남녀를 구별하며 여성에게만 가사를 가치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랬다간 주인의 말대로 영국 국민의 절반이 아이를 낳는 일 외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어버린다. 거기다 그런 쓸모 없는 동물에게 아이를 맡긴다는 것은 더욱 야만스러운 짓이라는 것이다. 362쪽

릴리퍼트 기행과 브롭딩낵 기행은 알던 내용이었지만 세밀한 묘사로 실제 있을 법한 나라를 여행한 기행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깜짝 놀란 부분은 라퓨타 기행이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했고, 한심한 연구원들을 풍자하는 장면에서는 기발한 사례에 혀를 내둘렀다. 휴이넘 기행은 말을 인간과 같은 이성을 갖춘 존재로 설정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기행을 겪고난 걸리버가 휴이넘을 진정한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각각의 나라를 다니며 환멸을 느낀 걸리버는 휴이넘의 덕성에 깊이 감화되어 자신의 덕성까지 향상되는 것을 느낀다. 반면에 인간의 본성 즉 탐욕, 음욕, 나태, 이성과 지성의 부재 등은 강하게 부정한다. 휴이넘은 병으로 죽는 말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 받고 교육받는다. 참으로 이상적인 나라다. 작가가 꿈꾼 세계였을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대영제국에 영광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그 시대에도 영국의 어두운 면을 보았고 이렇게 훌륭한 풍자소설을 남겼다. 1726년에 나온 소설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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