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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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쪽

  아일랜드 북부 출신의 그레이스는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캐나다로 오던 중 엄마를 잃는다. 배 안에서 죽어 헌 시트를 감고 바닷속으로 던져진 엄마를 보며 그레이스는 창문을 열어주지 못해 엄마의 영혼이 배에 갇혔고 바닷속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토에 와서 파킨슨씨 댁 하녀가 된 그레이스는 메리 휘트니를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고된 생활을 하며 고작 2달러의 월급을 받았지만 그 때를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는 것은 메리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메리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운다. 자질구레한 일부터 윌리엄 라이언 메켄지 이야기나, 결혼하기 전에 누비 이불 세채를 마련해야 된다거나 특히 남자를 조심해야 하는 여자로서의 삶 등. 이 때의 배움은 그레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메리는 그레이스에게 결혼하기 전까지 절대 남자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리석은 사랑으로 임신을 하게 되고 낙태 후유증으로 엄청난 피를 쏟으며 죽었다.

  그레이스는 메리가 죽은 후에 키니어씨의 가정부 낸시의 제안으로 키니어씨 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엔 마굿간지기 맥더모트와 일을 도와주는 소년 제이미 월시, 그리고 키니어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가정부 낸시가 살고 있었다. 낸시는 그레이스에게 잘 해주는 때도 있었지만 키니어 씨와 그레이스가 함께 있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얼마 후 임신하게 된 낸시는 키니어씨의 외출을 틈타 눈엣가시였던 맥더모트와 그레이스에게 월급을 정산해줄테니 나가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낸시와 사이가 안좋았던 맥더모트는 낸시를 도끼로 쳐서 죽이고 키니어 씨는 총으로 쏴죽인다. 그리고 그레이스와 함께 귀중품을 챙겨 달아난다.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된다. 맥더모트는 진술을 번복하기는 했지만 교수형 당할 때까지 그레이스가 사주한 일이었으며 그레이스가 없었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거라고 했다.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지 못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변호사에 의해 진술을 번복하였다.

  맥더모트가 교수형을 당한 후에 그레이스는 감형되어 종신형을 살며 모범수가 되었다. 그레이스의 사면을 요구하던 사람들은 사이먼 조던이라는 신경학박사를 모셔와 그레이스에 대한 보고서를 호의적으로 작성해줄 것을 요구한다. 사이먼은 그레이스와 매일 상담을 하며 그녀 안에 있을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상담이 계속 될 수록 사이먼은 혼란에 빠진다. 차분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는 그레이스의 말에는 진실성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석연치 않은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사악하고 교활한 살인범일까? 맥더모트의 진술에 의하면 그레이스는 맥더모트를 조종해 주인과 그 정부를 살해하게 한 교활한 범죄자이다. 하지만 사건 이전의 그레이스는 평판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일을 잘했고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였다. 만약 그레이스가 범죄자라면 어릴 적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억압된 여성의 대표격인 어머니와 메리의 비극적인 죽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않고 일하는 고된 삶이 낸시를 만나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데 (출신, 인성, 일솜씨) 어쩌면 키니어의 부인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 자신에 가하는 부당한 대우에 그동안 억압된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그레이스에게 있어 낸시는 부정한 죄인이었다.

 낸시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고 쫓겨나서 대로변을 헤매다 건달들의 먹이가 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혼반지가 있는 어엿한 유부녀가 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부잣집 마님까지 되는 건 불공평했어요. 메리 휘트니는 그랬다가 죽었잖아요. 똑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누구는 상을 받고 누구는 벌을 받다니 말이 안 되는 일 아니에요? 407쪽

  그레이스에게 낸시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키니어 나리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지 몰라도 낸시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맥더모트를 사주하여 살인하게 만들만큼 잔혹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는가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레이스는 보통 침착하고 차분하며 닭 모가지도 내리치지 못하는 여린 심성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누명을 쓴 희생양에 불과 할까? 그레이스가 살인이 저질러진 장소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니 그레이스가 교활한 범죄자가 아니라면, 이중인격에 의한 살인 조장 내지는 방조에 대한 혐의를 생각해봐야 한다. 메리가 죽고나서 그레이스가 의식을 잃는 동안 메리의 영혼의 빙의된 것 같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때 메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들렸어요. 나 좀 들여보내줘. 저는 깜짝 놀라서 메리를 뚫여져라 쳐다봤어요. 저희가 침대를 정리하느라 메리는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한 기미가 전혀 안 보였거든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죠. 그런데 문득 창문을 안 열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저는 얼른 달려가서 창문을 열었어요. 나 좀 내보내 줘라고 한 걸 잘못 들은게 분명했거든요. 266쪽

  그레이스는 엄마의 죽음 이후로 사람이 죽으면 창문을 열어 영혼을 내보내줘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그런데 메리가 죽고나서 들은 환청은 분명 나 좀 들여보내줘. 였다. 만약 빙의라면 메리의 영혼이 그레이스의 몸 안으로 들여보내달라는 뜻이었을 거다.

 또 이런 내용도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제가 열 시간 동안 누워 있었다고 해요. 아무리 꼬집고 때리고 찬물을 끼얹고 코밑을 깃털로 간질여도 일어나지 않더래요. 그러다 일어났을 때에는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레이스는 어디 있냐고 묻더래요. 그래서 네가 그레이스라고 알려 주었더니 믿지 않고 울면서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더래요. 그레이스가 없어졌다고, 호수에 몸을 던졌으니 찾아야한다고 하면서요. 267쪽

  그레이스의 말이 진실이라면 위 사건은 메리의 영혼이 빙의되어 이중인격을 보여준 증거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그레이스가 혼잣말을 할 때가 있어서 무섭다는 낸시의 말등은 이중인격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레이스에 관해서라면 미스터리의 인물 제러마이어를 빼놓을 수가 없다. 제러마이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그레이스에게 물을 세 번 건너지만 결국은 괜찮아진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 정말 결국 그렇게 되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그레이스에게 위안을 주고 경고도 해주는 그였기에 그레이스는 메리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 해준다. 둘은 비밀을 공유한다.

 그런데 그가 또 아주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너는 우리하고 비슷한 부류라고. 232쪽

  제러마이어가 그레이스에게 비슷한 부류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레이스가 교활한 범죄자라면 비슷한 부류라는 의미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의미가 될 테고 그레이스가 무죄라면 그레이스는 영매라는 의미이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그레이스의 꿈도 과학적인 의미로 보면 정신분석학이지만 그녀가 실제 깨어있었다는 의미를 보면 영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레이스와 상담을 계속 이어가던 사이먼도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문제는 기억하는 게 많아질수록 그녀의 말이 많아지고 그의 고충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자꾸 맥을 놓친다. 그녀가 그의 기운을 빼앗아 가는 것 같다. 신이 들렸을 때 영매가 그러는 것처럼 그의 정신력을 이용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불러내는 것 같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상상에 빠지면 안 된다. 428쪽

 사이먼은 상담과 별개로 점점 그레이스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혼을 생각할 만큼 빠져든다.

 문제는 그도 그녀의 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아미나이길 바란다. 그녀의 혐의가 벗겨지길 바란다. 474쪽

 생각해보니 그레이스 마크스는 지금까지 만난 중에서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여자다. 570쪽

  사이먼 박사는 그레이스가 정말로 기억상실증 환자인지 아니면 그럴듯하게 꾸며낸 정신병자인지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결론을 내리는데 실패한다. 설상가상으로 갈망하던 그레이스가 아닌 하숙집 주인 험프리 부인의 덫에 빠져 허우적 댄다. 사이먼 박사의 연구가 지지부진하자 그레이스 사면위원회는 제롬 뒤퐁 박사로 가장한 제러마이어에게 최면술을 맡긴다. 이 때 그레이스는 영혼이 빙의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사이먼은 충격을 받는다. 사이먼은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경우 자신의 업적에 방해가 될 거라 판단해 보고서 작성을 거부한다. 사이먼이 하숙집에 돌아오자 험프리 부인은 이틀 뒤에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며 남편이 돌아오면 사고사로 위장하여 살해해달라는 바람을 전한다. 곤경에 처한 사이먼은 사면을 위한 보고서와 험프리 부인의 올가미를 피해 어머니 핑계를 대고 본국으로 달아난다.

  사이먼의 도움은 없었지만 그레이스는 결국 사면받는다. 수감된지 30년이 지난 후였다. 의지할 가족도 집도 없는 그레이스는 교도소장 부인과 딸의 도움으로 새 거처로 떠나는데 그 곳에는 제이미 월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미 월시는 질투에 눈이 멀어 위증을 했으나 내내 후회했다고 했다. 아내와 사별한 후라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청혼하고 둘은 결혼한다. 그레이스는 제이미와 담백한 결혼생활을 하며 자신만을 위해서 처음으로 천국의 나무 패턴으로 누비 이불을 만들며 끝낸다.

  이 소설에서 퀼트 패턴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1부 부터 15부까지 <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 2부 가시밭길 3부 길모퉁이의 고양이 4부 젊은 남자의 환상 5부 깨진 그릇들 6부 비밀 서랍 7부 지그재그 울타리 8부 여우와 기러기들 9부 하트와 모래주머니 10부 호수의 여인 11부 쓰러지는 나무들 12부 솔로몬 성전 13부 판도라의 상자 14부 글자X 15부 천국의 나무> 모두 퀼트를 만들 때 쓰는 패턴의 이름이다. 그레이스는 사면받아 나올 때 짐상자 속에 있던 메리의 페티코트와 낸시의 드레스 조각을 잘라온다. 교도소장의 딸 재닛에게 부탁해 감옥에서 입었던 잠옷도 가져온다. 천국의 나무 패턴을 만들 때 이 세조각을 이어붙이며 말한다. '그러면 우리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겠죠' 670쪽

  셋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정말로 메리의 영혼이 빙의된 것이었을까? 최면술 중에 메리에게 빙의된 것으로 보이는 그레이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낸시도 아니야, 이 멍청아! 낸시는 아무 말도 못해. 목이 그렇게 됐으니 한마디도 못해. 옛날에는 아주 예쁜 목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낸시는 화도 안 내고, 상관하지도 않고, 내 친구야. 이제는 이해하고, 나하고 사이좋게 나눠 쓰려고 해. 자, 의사 선생님."590쪽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사건을 처음에 접했을 때는 그레이스가 유죄라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 하에 「하녀」라는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을 집필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어 좀 더 정확한 관점에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만들어 낸 결과물이 바로 『그레이스』다. 옮긴이는 이 작품을 애트우드가 독자들을 위해 마련한,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게임일지 모른다고 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나는 소설 초반부터 그레이스가 교활한 범죄자일리 없다고 생각하며 읽었고 마지막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제러마이어라는 인물이 궁금해서 놓친 퍼즐을 맞추자는 심정으로 그레이스가 범죄자라는 관점으로 재독했다. 역시나 결론은 미심쩍다. 그레이스를 범죄자와 희생양의 양 극단에 두고 작가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으나 끝까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대단하다 이 작가는. 사실 나는 애트우드가 만들어낸 소설 속 그레이스가 미치도록 매력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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