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영화 '디 아워스'(디 아워스는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가칭이다.) 를 봤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니콜 키드먼과 줄리안 무어 그리고 메릴 스트립의 놀라운 연기로 담아낸, 각기 다른 시대를 사는 세 여인의 삶속에 담긴 우울의 심연.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인물들을 보며 잔잔해 보이는 삶이 이리도 무서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물살을 헤치고 강물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가던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시간이 지나도 그 우울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등대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바로 그 우울감에 갇혀 버렸다. 도저히 못견디고 책을 덮고 집 앞을 산책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책장을 펼쳤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뭔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였을까?

소설은 1부 창, 2부 시간이 흐르다, 3부 등대 이렇게 세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1부에서 렘지 부인은 등대에 가고 싶어하는 아들 제임스에게 내일 날씨가 좋으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렘지 씨는 내일 날씨가 좋지 않아 등대에는 가지 못할 거라며 어린 아들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렘지 부인은 이 대화를 안타까워하며 제임스가 절대로 이 일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한 건 오히려 렘지 씨였고, 그는 3부에서 아내의 유지를 따르듯 내켜하지 않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등대로 간다.

1부에는 주로 등장인물인 렘지 부부와 자녀들, 릴리, 윌리엄 뱅크스, 탠슬리, 폴과 민터, 그리고 카마이클 등 초대받은 손님들에 대한 묘사가 렘지 부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램지부인은 대단한 미인으로 그려진다. 다소 무식하다는 평판을 듣기는 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배우지 않고도 아는 타입이었다. 그녀의 소박함은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깊이있게 이해했다. 그녀의 외골수 지력은 그녀를 돌처럼 곧바로 하강해서 새처럼 정확하게 목표 앞에 내려앉게 하여 자연히 그녀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지탱시켜주는 진리에 도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어쩌면 거짓되게일지도 모른다. 45쪽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자식들에게는 찬탄의 대상인 그녀지만 남편 렘지에게는 위축되는 모습을 보인다. 렘지 씨는 그녀가 책 읽는 모습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그녀가 책의 내용을 이해는 하는건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내를 무시한다. 철학 교수로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한다는 자부심 그 안에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이 깔려있다.

다른 사람은 우유 속에 지네가 빠졌어도 참는다. 그러나 램지 씨는 이렇게 자기 주위에다 권위의 울타리를 높이 쌓아 올리고 그 안에 군림하였기 때문에 비록 집게벌레 한 마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괴물이 빠진 것과 똑같았다. 274쪽

1부에서 릴리는 손님 중 한명으로 못생긴 편에 실력도 보잘것 없는 화가다. 릴리는 렘지 부인을 동경하며 그녀의 관심과 애정을 바랐다. 누구나 결혼해야 한다는 렘지 부인의 말에 백프로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렘지 부인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 안에서 여자의 삶에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던 릴리는 렘지부인이 죽고난 후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에 확신을 가지고 안도한다. 렘지 부인의 표현에 따르면 신통치 않은 실력을 가진 릴리는 자신의 그림이 다락방이나 구석에 처박힐 것을 상상하며 대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인생에 대한 질문과 다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단어들이나 그림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지만 내 그림은 다락방에나 걸릴 것들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으니, 그것은 둘둘 말려서 소파 밑에 처박힐 것이었지만 설사 그렇다손치더라도 심지어 이 그림같이 하찮은 경우에도 예술의 영원성만은 진실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것과 같이 극적거린 것에 불과한 이 그림에 대해서도, 어쩌면 이 실제의 그림이 아니라 이 그림이 시도한 것, 바로 그것이 '영원히 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려 하고 있었다. 248쪽

3부에서 릴리는 삶에 통찰력을 얻고 렘지 씨는 등대에 도달하며 소설은 끝난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면서 물었던 것은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럼 렘지 씨가 도달한 등대는 어떤 의미였을까? 등대에 조사 -로 를 붙인 의미는 무엇일까? 등대로 가는 길은 존재의 심연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였을까? 어둡거나 밝거나 평온하거나 폭풍우가 몰아치거나 항상 그 자리에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빛을 주고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삶의 지향. 렘지 씨에게 그것은 이타적인 삶에의 지향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렘지 부인의 지향하는 삶이기도 했다. 자기 안의 철학과 이기에 갇혀 밖을 보지 못했던 렘지 씨가 등대로 여행을 떠나고 지루한 항해 끝에 발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은 렘지 씨에게든 또다른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마 2부는 렘지 씨가 등대로 향하게 된 이유. 그의 변화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 같다. 1부의 하루와 3부의 하루 사이에 십년이 흘렀다. 렘지 씨는 집 안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렘지 부인이 죽고나서 딸과 아들도 하나씩 잃어야 했다. 십년 전과는 분명 다른 렘지 씨 였을 것이다.

그는 그냥 앉아서 섬을 바라보고 우리는 각자 외로이 죽어간다, 아니면 드디어 나는 그것에 도달했다, 나는 드디어 그것을 찾아내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284쪽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 예민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빛나는 지성이었지만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로 트라우마를 지닌 한 사람으로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 버지니아 울프가 연상되어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의식의 흐름기법이라는 소설사적 업적을 굳이 따지지 않고도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로 가득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