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할머니 - 사라지는 골목에서의 마지막 추억
전형준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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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받으면 동물이든 사람이든 빛이 난다. 오랜만에 해가 얼굴을 내밀자 녀석은 담 위로 넘어가 잠깐 쏟아지던 햇빛을 만끽했다.

p. 24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양이와 할머니 - 나는 이 둘 다를 별로 좋아하지않지만 - 는 둘 다 어느 정도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길냥이가 된 고양이는 중성화의 대상으로, 발정난 고양이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아기 울음소리같다며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

끊임없이 번식하는 듯한 길냥이를 안쓰럽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그저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한 편, 할머니는 인생의 내리막길에 서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을 인정받기보단 그저 늙고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 둘이 함께 만났다.

누구에게도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것만 같은 고양이와 할머니가 서로에게 애정을 주고 행복을 경험한다.

사랑을 받으면 절로 행복한 표정이 지어진다.

무섭게만 보이던 날카로운 눈매의 고양이조차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며칠 후 동네 사거리엔 조합원 환영 현수막과 재개발 반대 현수막이 차례로 걸렸다. 

p. 73


​이 도서의 배경은 부산의 재개발 지역이다.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수십년 살아오던 사람들도 곧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그 중엔 할머니들도 있다.                                                                                                                                                                                                                                                                                                                                                                                                                                                                                                                                                                                                                                                

부서지고 새로운 건물로 바뀔 자리에서 할머니는 고양이와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골목 길고냥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이가 떠나고나면, 길냥이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새로 들어선 건물에서 길냥이들이 설 자리가 있을까.

아직은 철거되지 않은 빈 건물을 서성이는 고양이들.

깨진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애처롭다.




찐이가 아무리 거묘라고 해도 설마 아기 옷이 맞겠나 싶었는데 단추를 잠그는데 묵직하니 둘레가 비슷하게 맞았다!

p. 143

나와 함께 사는 토끼인형인 헤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가끔 온라인으로 애완견 옷을 검색한다.

중대형견 옷 사이즈 정도면 헤니에게 아주 잘 맞는다.

헤니는 작고 아담한 귀여운 인형이지만, 손에 놓은 당근을 절대 떼어놓지않으려고해서 두께가 두툼한 크기의 옷이 필요하다.

얼마 전엔 크리스마스용 모자와 망토를 새로 사줬는데 아주 말 맞는다.


​똥똥한 고양이 찐이 역시 고양이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는다.

바로 사람 아기의 옷 말이다.

고양이들은 인간이 건드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옷을 입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사진을 보니 신기하기만 하다.




하루하루 할머니의 몸무게도, 기억의 무게도 줄어 가고 있었다.

p. 168


​처음에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더불어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령의 나이와 함께 점차 기억을 잃어가고 건강도 잃어가는 할머니.

사람보다 먼저 죽기 마련인 고양이.

이 둘은 이별할 운명이다.

하지만 무지개 다리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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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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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군산, 목포, 부산, 인천, 순천, 통영 등의 항구도시들에서 이른바 '적산敵産 가옥'의 보존과 복원에 대해서 여러 노력들이 있어 왔고 나름 지역의 관광 자산이 되기도 했다. 




p. 110







김진애는 다양한 도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저분한 간판, 아파트 공화국인 우리나라의 도시들도 나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는 게 요지이다.




물론 과거의 산물이 빠르게 사라져가고 현대의 성냥갑이 그 자리를 대신해나가는 와중에서도 유산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중 유명한 게 목포 근대 도시건축투어, 이른바 '손혜원 투어' 이다.




분명 암울한 우리네 역사가 담겨져있는 건물들인데 실제로 가 보면 예뻐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숲과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곳에 간 이 들 중 몇몇은 그저 예쁜 건물에 감탄할 것이고, 다른 몇몇은 그 속에 숨은 뜻까지 찾으려 애쓸 것이다. 




둘 중 어느 유형이든간에, 도시 지자체에 있어서는 분명 훌륭한 관광 자원이고, 과거사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자주 되뇌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다.


p. 114



그래서 다크 투어리즘이 필요하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반드시 장려해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쁜 궁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인스타 게시용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우리 민족이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고, 어떻게 이를 극복해왔는지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과거가 없는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고, 지난 날의 실수를 통한 깨달음 없이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네 역사도 모르는 무지한 옆나라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


이민자의 나라로 세워진 - 미국 원주민이 있지만 - 미국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뉴욕 자연사박물관는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다.






동네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임대료를 천정부지로 올리니 원조 가게들이 버티지 못해서 나가고 그 자리에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들어선다.


p. 270




연예인 홍석천이 이태원 소재 음식점을 두어개 접은 게 크게 회자되었다.


매우 유명한 사람이 낸 인기 식당이 폐업한 것이다.


이태원, 가로수길, 합정, 상수에는 저마다의 분위기가 있다.


자유롭고 남의 눈 신경 안 쓰는 이태원, 8등신의 모델들이 많이 보이고 고급지며 깔끔한 분위기의 가로수길, 숨은 맛집이 많은 합정과 상수.


그런데 이 거리들이 높은 임대료를 이유로 전부 대기업의 프랜차이즈로 뒤덮인다면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갈 이유가 사라진다.


누군가는 맛 때문에, 누군가는 특이한 분위기때문에, 또 누군가는 인스타 감성의 포토존을 위해 가는데, 


프랜차이즈는 우리 집 근처에도 있기 때문이다.






ㅂ자 돌림병은 이른바 부정, 부패, 비리, 부실, 부당 이익 등에 내가 붙인 일종의 별칭이다.


 p. 238




이게 다 ㅂ자 돌림병에 기인한다.


땅과 건물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아 부당 이익을 취하려하는 이들,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하여 시의원, 국회의원, 


경찰과 검찰에게 부정부패를 일삼는 이들, 비리의 중심인 정치인과 검경, 결과적으로 부실 공사를 하는 건축사.


건축 자재를 살 돈을 얼마나 빼돌렸는지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외벽은 예전과 비교하여 너무나도 얇다.


이는 결과적으로 겨울철 결로와 같은 다양한 문제를 낳는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하여 4대강을 건드리고 강을 개발한답시고 뛰어든 여러 업체들이 계속하여 검은 돈을 번다.


오염된 4대강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약품을 뿌리는 업체들 또한 부당한 돈을 번다.


ㅂ자 돌림병이 있는한 대한민국은 부실 공사와 우울한 건축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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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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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구역 사람에게 물으면 열에 아홉은 롱롱을 말했다. 세상의 허물을 벗기는 전설 속의 뱀, 롱롱이 나왔다는 것이다.

p. 013

이 소설은 SF소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샤머니즘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허물로 뒤덮인 사람들이 격리된 D구역,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는 방제센터.

우리가 흔히 SF소설 (sci-fi)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시나리오인데,

동시에 샤머니즘적 요소가 나오니 흥미롭다.

계속하여 롱롱(뱀)을 신격화하면서 신에게 비는 노파가 등장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롱롱의 신화를 믿으면서 방역회사나 약보다는 거대한 뱀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위태롭고 생명의 존폐가 왔다갔다하는 순간엔 역시 가장 원초적인 믿음이 생겨나는 게 우리 인간인가보다.

종교라는 것을 믿지도 않고, 무속신앙은 더더욱이 아니지만,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흐름에는 어쩔수없이 밑바닥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T-프로틴은 피부가 깨끗해지라고 먹는 거니까, 혹시 알아? 이걸 먹고 뱀이 허물을 깨끗하게 벗어버릴지."

p. 128

영화 [설국열차] 에서 열차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 그들은 몰랐지만 - 단백질 블록인 양갱을 먹는다.

이 소설에서는 허물을 조금이라도 덜 나게 하기위해서 프로틴을 먹는다.

배경으로 헬스장이 등장하는 건 피식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프로틴 소비량이 많은 곳들 중 하나가 바로 헬스장일테니까 말이다.

단백질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SF소설에서는 마치 행군하는 병사들이 먹는 소금처럼 생명을 이어가기위한 최소한의 끼니로서 묘사된다.



믿을 거라곤 롱롱의 이미지 뿐이었다. 건강을 선물하는 롱롱, 근심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하는 롱롱, 소원을 묻지 않고도 알아서 이뤄주는 롱롱 등이었다.

p. 232

그 와중에 상업적(?)인 결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인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리사욕을 챙길 수 있는 존재인가보다.

허물이 생기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인 단백질과 그들에게 신화적 존재인 뱀을 결합시킬 생각을 하다니.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돈벌이 수단을 찾아내는 인간은 대단하기까지하다.

프로틴은 여전히 프로틴일 뿐인데, 거기에 약간의(?) 이미지를 끼얹었더니 인기가 치솟는다.

비록 재난 상황에서 상점을 부수고 들어가 강도질을 하는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이 도시에서 공포는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는 알리바이입니다. 공포는 실재하니까 거짓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p. 153-154

우리는 공포마케팅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내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뒤쳐지면 안 되니 각종 학원에 보내야 한다.

수행평가 대비를 위한 특별 대비학원도 있고, 체계적인 입시 준비를 위한 입시 컨설팅 전문도 있다.

한 편, 언제 어떤 사고가 날 지 모르기에 다양한 보험에 가입해두는 건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고령화시대에 접어들어서 나이가 먹는 만큼 갖가지 질병이나 사고에 그만큼 노출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런가하면 사이비 종교는 '지구 종말론' 이나 악마 숭배 등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처음 종교란 게 생겨난 이유도

인간의 힘으론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자연 현상을 두려워하다가 우리보다 더 큰 어떤 존재, 즉, 신이 있다는 믿음에서부터이다.



이 소설은 뻔하디 뻔한 SF 배경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속보이게 구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회사, 크게 인류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명목하에 어떠한 실험도 마다하지않는 박사,

절박한 상황에서 미신에 기대는 사람들까지.

그래서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이나 상상 속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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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하다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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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서만 온다. 이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p. 021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

정확히 말하자면 살인적인 집값.

아무리 집값의 70-80%를 대출 받을 수 있다해도 뉴욕에서 살 일이 평생 가야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조승연 작가의 뉴욕과 뉴요커에 관한 에세이는 내게 더욱 아련하면서도 간절하게 다가온다.

아주 어린 나이에 집 앞에 가판대를 두고 레모네이드를 파는 아이.

그리고 스카우트 활동의 일환으로 쿠키를 파는 아이들.

이런 모습을 외화로 접하고 다소 생소하면서도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민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해보면 납득이 간다.

청교도적인 절제와 실용주의적 생활 방식 역시 그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 쓴다.

그래서 옷, 휴대폰, 자동차, 집까지 모든 걸 깨끗하고 삐까번쩍하고 새 것으로 가지길 원한다.

아직 멀쩡하지만 질리거나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 '타인의 시선' 에서 벗어날 때 진정으로 나다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대학교 1학년생이 된 첫 날부터 집에서 돈을 받아본 일이 없다.

과외와 장학금을 통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으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조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렸다.

경제적 자립이란 정말 중요한 거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성인으로 만들어주며 책임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한다.



뉴요커들은 굉장한 텐션으로 일한다. 하지만 24시간 일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사람에 비해 오히려 발걸음이 가볍고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는 군더더기를 빼고 고강도로 업무에 임해 필요한 일을 마친 후 가질 수 있는, 그들이 즐기는 '다운타임'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p. 028-029


퇴근 후 회식을 하거나, 더한 경우에는 아예 퇴근을 하지 못하고 야근을 한다.

집에 오면 피곤해서 운동이나 악기 배우는 따위의 취미활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주말이 되어서야 지난 5일간 못한 것들을 몰아서 한다.

혹은, 피로가 쌓여서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거나 잔다.

이는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우리나라 직장인의 생활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그렇다.

ㅎ.ㅎ

수영을 하고 싶어서 새벽 6시 수영반에 등록하였고, 1시가 전인 새벽 5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준비하여 수영장에 갔다.

평일 내내 그렇게 해도 피곤하다기보다는 하루의 시작이 개운해서 좋았다.

재즈 피아노나 영어 회화를 배운 적도 있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엔 주말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20살 때부터 계속 해 온 건 운동이다.

수영, 헬스, 마라톤, 크로스핏, 피겨스케이팅, 복싱 등 일주일 중 3~5일은 꼬박 꼬박 운동을 한다.

체중 감량이 목표이긴 하지만, 운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도 있다.

요새는 다소 정적인 필라테스와 요가 - 하지만 운동 중 몸의 움직임을 보면 정적이지도 않다. - 를 배우는데, 

몸매 관리는 물론이고, 심신에 안정을 주어서 꽤 맘에 든다.


욜로, 워라밸, 모두 다 좋은 말이다.

나는 항상 욜로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모든 일에 임하고 즐기는 중이며, 

그 바탕에 워라밸을 두고 있다.



"그럼 몇 살 때쯤 그런 영화를 보여줄 거죠?"

"그 내용이 왜곡돼 있다는 걸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나이에 보여줄 거에요."

p. 127

여러 인종과 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에서는 특히 인종차별이 민감한 이슈이다.

따라서 단일 민족이나 단일 인종이 대다수인 지역들보다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대단한 뉴욕이다.

상황이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인식이지, 뉴요커가 다른 시민들보다 뛰어난 윤리적 의식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지난 몇 십년간 유입되어 온 영어 강사, 외국인 근로자, 관광객들로 인하여 

점차 차별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자성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 옛날 흑인을 보고 어른들이 '깜둥이' 라고 했었지만, 지금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진통을 조금만 더 겪고 나면 

우리나라 국민들도 피부색으로 누군가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도 뉴욕은 싱글들의 도시다. 한국에서는 30세만 넘어도 부모나 친지들이 결혼이 늦었다며 압박을 주기 시작하지만, 뉴요커들은 성공한 50대 중에서도 결혼을 안 한 사람이 많고 50대 중반이나 60대에 첫 결혼을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p. 145

미국은 성별에 따른 역할과 연애, 결혼에 있어서 매우 보수적이지만 뉴욕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게이' 스럽고, 여자가 이렇게 옷을 입지 않으면 '레즈비언' 같다는 고정관념이 있으나,

그에 반해 뉴욕은 세계 최대의 성소수자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가족 중심의 문화가 중요시되는 미국 안에서도 뉴욕은 싱글들의 천국이다.

이 쯤 되면, 내가 가야 할 곳 아닌가?

그래도 요즘은 나아져서 30대 후반쯤 되어야 결혼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다지만, 여전히 독신으로 사는 삶은 한국에서 피곤하다.

나는 괜찮고 행복한데, 주위에서 난리다.

아이를 한 명쯤 나아서 키워봐야하지 않겠나, 결혼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해야 하지 않겠나 라는 말은 꽤 비논리적으로 들린다.

아이를 낳지 않고 딩크족으로 행복하게 사는 친척을 보며 자라왔고, 

어차피 후회할 거 나는 결혼하지 않는 삶을 택하겠다는데 감놔라 배놔라 할 이유가 없다.



인간은 좋은 것이 서로 다르다. 굳이 타인의 호불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다르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이것이 뉴욕이라는 도시가 '다양성'이라고 하는 과제와 끊임없이 씨름하며 깨달은 결론이다. 내일이 아니면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사는 것' '인간은 원래 이래야 하는 것'이라는 정답을 미리 가지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감추고 남들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 

p. 191

여기서 드는 생각.

'집값만 아니면 진짜 뉴욕에서 살고 싶다. 아니면 하와이. 왜냐면... 하와이는 느긋하고 와이키키가 있고 서핑할 수 있고 자유로우니까.'

"걔는 대체 왜 그래?"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좋은가 보지." 라는 말로 답하는 나다.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데,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그의 인생에 내가 끼어들 권리는 없다.

나의 의견과 내가 아는 지식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내가 살아온 세계와 남이 살아온 세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랑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뉴욕.

몰랐다.

언젠가 여행가게되면 그 점을 꼭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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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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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다가 사십 되고 오십 되는 거다. 넌 병원균이다. 바이러스야. 넌 의미도 존재도 없는 벌레야. 알아들었냐?

p. 21

동생은 커피값을 계산했고 나는 봉투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 액수를 확인했다. 빳빳한 5만 원짜리 지폐가 무려 열 장이나 들어 있었다.

p. 55

아버지, 제가 해주 최씨의 일족이란 걸 한시도 잊지 않겠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여보, 내가 별 볼 일 없는 선생 사모님 소리 말고 5년 내에 국회의원 사모님 소리 듣게 해줄게.

p. 73

소설 속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누구를 나쁘다고 정의내리긴 어렵다.

왜냐면 다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나쁘니까.

(그래도 이혼 후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잘 팔리지도 않는 건물 하나로 오빠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여동생 동주는

다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칭찬해주고 싶다.)

'나' 로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집 안의 아들인 동석이는 영화 <엑시트>의 주인공인 용남을 떠올리게 한다.

집에서 벌레 취급을 당하는 동석은 20대 중반부터 현재 30대 중반까지 무직 상태로 집 안의 골칫덩어리이다.

교직 시험도 봤었고 대기업 시험도 봤었지만 무려 80회 넘게 낙방하였고,

그나마 소개 받은 몇몇 회사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 작은 회사라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았다.

물질만능주의 세상 속에서 완벽하게 자본주의형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기생충> 도 생각난다.

동석은 갑자기 찾아온 할머니와 그녀의 자본을 가지고 무얼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동생이 준 돈에 감격해 마다하지 않는다.

돈과 함께 음식, 그 중에서도 진수성찬이나 과식이 세속적인 인간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밥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이라든가, 고모와 함께 간 비싼 호텔 음식점, 혹은 동석의 어머니가 작정하고 차린 식사 등이 그러하다.


"일본에서 택시 회사를 했다. 이번에 정리했더니 한국 돈으로 한 60억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주면 세금을 제하고도 거의 40억은 된다고 하더라."

(중 략)

할아버지 악다구니 속에서 나머지 식구들은 침묵했다. 각자 계산이 바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 남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표정이 나올 때 모습이었다. 고모는 '주여' 소리를 다섯 번 냈다.

p. 39

백파(白波) 최종태 선생. 고결한 흰 물결처럼 평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산, 이 시대 인텔리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전쟁 후 사업 실패 뒤에도 다른 나약한 지식인들과는 달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성실하고 강직한 사내. 늘 책과 사색을 가까이했던, 어느 동네에 살든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던 고매한 인품의 그가 85세 나이에 한밤중 전립선이 막혀 가족들 앞에서 때굴때굴 구르다가 무른 똥을 지렸고 민족을 배반한 더러운 계집에게 짝불이와 조그만 그것을 마사지당했다.

p. 96

할머니는 애초에 내 병간호 따위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밥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할머니는 도대체 병실에 붙어 있질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병원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의사, 간호사, 병원 직원, 환자, 보호자, 방문객을 가리지 않고 실로 오만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p. 119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웃기는 대사들이 재치있게 등장하는 장면도 있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인물의 행동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도 있다.

이러한 블랙코미디가 수년 전 시리즈로 봤던 킬링타임용 연극 <라이어> 를 떠올리게 한다.

중간 중간 박장대소하게 하면서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 상황은 점점 극단으로 흘러가서 엔딩은 해피 엔딩도 배드 엔딩도 아니다.

웃기지만 슬픈, 그러한 블랙코미디이다.

굴러온 돌인 할머니가 박힌 돌 며느리에게 살림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는데, 정작 할머니 본인은 욕실을 지나치게 더럽게 쓴다.

늘 선비와도 같았던 고고한 인품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악을 쓰며 욕이란 욕은 다 한다.

할머니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신분은 시시각각 듣는 사람에 따라서 바뀐다.

물론 순간적인 묘사는 웃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슬프고 걱정스럽다.

가족이 처한 환경과 할머니의 등장이 결코 긍정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늘 정직하고 바르고 온유했던 아버지가, 노동자, 농민의 친구이며 약자를 위해 투쟁하는 아버지가 어머니 따귀를 때렸다.

p. 257

할아버지는 아내인 할머니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다.

고매한 인품을 지녔다는 그의 입에서 각종 상스러운 욕이 터져 나온다.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아들에게 못하는 말이 없다.

집 안의 장남이라는 아들은 벌써 몇 년째 무직인 상태로,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인을 빼앗아간 친구와 연을 끊기는 커녕, 거의 매일 만나 술을 마시고 PC방에서 고스톱을 친다.

남자들이 영 말이 아니다.

반면, 이유야 어쨌든간에 할머니는 여지껏 나름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는 늙은 나이에도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다.

돌싱인 딸은 교수로 일하면서 건물 한 채를 소유하고 있고, 오빠에게 용돈을 준다.

여자들의 생활력이 엄청나다.

소설을 읽으면서 웃기도 했지만 불편하면서 짜증이 났던 게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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