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누구를 나쁘다고 정의내리긴 어렵다.
왜냐면 다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나쁘니까.
(그래도 이혼 후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잘 팔리지도 않는 건물 하나로 오빠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여동생 동주는
다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칭찬해주고 싶다.)
'나' 로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집 안의 아들인 동석이는 영화 <엑시트>의 주인공인 용남을 떠올리게 한다.
집에서 벌레 취급을 당하는 동석은 20대 중반부터 현재 30대 중반까지 무직 상태로 집 안의 골칫덩어리이다.
교직 시험도 봤었고 대기업 시험도 봤었지만 무려 80회 넘게 낙방하였고,
그나마 소개 받은 몇몇 회사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 작은 회사라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았다.
물질만능주의 세상 속에서 완벽하게 자본주의형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기생충> 도 생각난다.
동석은 갑자기 찾아온 할머니와 그녀의 자본을 가지고 무얼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동생이 준 돈에 감격해 마다하지 않는다.
돈과 함께 음식, 그 중에서도 진수성찬이나 과식이 세속적인 인간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밥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이라든가, 고모와 함께 간 비싼 호텔 음식점, 혹은 동석의 어머니가 작정하고 차린 식사 등이 그러하다.
"일본에서 택시 회사를 했다. 이번에 정리했더니 한국 돈으로 한 60억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주면 세금을 제하고도 거의 40억은 된다고 하더라."
(중 략)
할아버지 악다구니 속에서 나머지 식구들은 침묵했다. 각자 계산이 바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 남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표정이 나올 때 모습이었다. 고모는 '주여' 소리를 다섯 번 냈다.
백파(白波) 최종태 선생. 고결한 흰 물결처럼 평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산, 이 시대 인텔리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전쟁 후 사업 실패 뒤에도 다른 나약한 지식인들과는 달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성실하고 강직한 사내. 늘 책과 사색을 가까이했던, 어느 동네에 살든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던 고매한 인품의 그가 85세 나이에 한밤중 전립선이 막혀 가족들 앞에서 때굴때굴 구르다가 무른 똥을 지렸고 민족을 배반한 더러운 계집에게 짝불이와 조그만 그것을 마사지당했다.
할머니는 애초에 내 병간호 따위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밥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할머니는 도대체 병실에 붙어 있질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병원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의사, 간호사, 병원 직원, 환자, 보호자, 방문객을 가리지 않고 실로 오만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웃기는 대사들이 재치있게 등장하는 장면도 있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인물의 행동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도 있다.
이러한 블랙코미디가 수년 전 시리즈로 봤던 킬링타임용 연극 <라이어> 를 떠올리게 한다.
중간 중간 박장대소하게 하면서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 상황은 점점 극단으로 흘러가서 엔딩은 해피 엔딩도 배드 엔딩도 아니다.
웃기지만 슬픈, 그러한 블랙코미디이다.
굴러온 돌인 할머니가 박힌 돌 며느리에게 살림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는데, 정작 할머니 본인은 욕실을 지나치게 더럽게 쓴다.
늘 선비와도 같았던 고고한 인품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악을 쓰며 욕이란 욕은 다 한다.
할머니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신분은 시시각각 듣는 사람에 따라서 바뀐다.
물론 순간적인 묘사는 웃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슬프고 걱정스럽다.
가족이 처한 환경과 할머니의 등장이 결코 긍정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늘 정직하고 바르고 온유했던 아버지가, 노동자, 농민의 친구이며 약자를 위해 투쟁하는 아버지가 어머니 따귀를 때렸다.
할아버지는 아내인 할머니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다.
고매한 인품을 지녔다는 그의 입에서 각종 상스러운 욕이 터져 나온다.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아들에게 못하는 말이 없다.
집 안의 장남이라는 아들은 벌써 몇 년째 무직인 상태로,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인을 빼앗아간 친구와 연을 끊기는 커녕, 거의 매일 만나 술을 마시고 PC방에서 고스톱을 친다.
남자들이 영 말이 아니다.
반면, 이유야 어쨌든간에 할머니는 여지껏 나름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는 늙은 나이에도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다.
돌싱인 딸은 교수로 일하면서 건물 한 채를 소유하고 있고, 오빠에게 용돈을 준다.
여자들의 생활력이 엄청나다.
소설을 읽으면서 웃기도 했지만 불편하면서 짜증이 났던 게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