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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유리의 검 1 ㅣ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누구든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오빠의 속삭임만이 들린다.
"아무도 믿지 마."
p. 302 , 1권
쉐이드 오빠는 메어에게 말한다. 아무도 믿지 말라고.
지금 메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믿었고, 어쩌면 은혈임에도 불구하고 적혈 편에 서길 원했다고 한 때 믿은 메이븐은, 이제는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렸다.
진홍의 군대가 어두운 커텐 뒤에서 무대 한 중앙으로 나오게 한 데에는 멋지게 배신당한 메어의 덕이 클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같은 적혈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그녀의 능력을 알아버린 은혈 사이에서도 '배신자' 혹은 '두려움의 대상' 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어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들과의 구분이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하다.
자신의 다른 오빠들 중에서도 트래미나 브리보다는 쉐이드를 훨씬 믿고 따른다.
그리하여 함께 진홍의 군대의 레이크랜즈 출신 대령으로부터 탈출 계획을 세운다.
쉐이드 오빠에 대한 메어의 특별하다싶은 애착에는 합당한 이유가 존대한다.
이 둘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신혈', 즉 돌연변이이다.
각각 번개소녀와 점퍼라는 애칭이 붙여진 이들은 마치 미드 'HEROES' 속 돌연변이들이 그러하듯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비록 쉐이드는 메어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 하였지만, 정작 자신만은 믿길 바라지 않았을까.
주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메어는 한 번 자기 사람으로 생각한 이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자신을 위해 왕궁을 배신한 대가로 죽은 줄만 알았던 줄리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어쩌면 그가 메어를 이용하려 돌연변이들의 목록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메어는 그 목록에 의지한다.
그런가 하면, 코로스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처음 본 아이즈인 존의 예언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
무엇보다도 칼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이 가장 두드러진다.
아마도 왕궁에 들어가기 전 그가 왕자인 줄 모르고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를 위한 칼의 배려때문이었을까.
진홍의 군대 속에서도 자신이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그의 말에 쉽게 납득하는 메어의 모습에서 칼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나는 그대의 혁명의 일부가 아니야."
속삭이는 칼의 목소리가 밤 속으로 거의 스러진다.
"나는 진홍의 군대가 아니야. 나는 이 일의 일부분이 아니야."
그가 화가 나서 발을 쿵쿵 찍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당신은 뭐죠, 칼?"
그가 입을 벌리고 대답을 뱉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혼란이 이해가 간다.
p. 240, 1권
사랑인가, 집착인가, 미련인가, 권력인가.
메어가 칼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사랑이다.
오히려 2부인 '유리의 검' 에서보다 1부인 '적혈의 여왕' 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왕궁과 맞서 싸우는 선두에 선 지금, 그녀에게는 사랑도 사치일 뿐이다.
그런 그녀를 대하는 칼의 태도는 짐짓 조용하고 차분하다.
아마도 동생의 배신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진홍의 군대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한낱 사랑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메어가 메이븐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떠한가.
메이븐의 과거를 알고 그의 가면이 한꺼풀 벗겨진 모습도 아는 그녀에게 왕위에 오른 메이븐은 낯선 존재이다.
그녀는 크게 뒷통수 맞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정도이다.
"메이븐이 그리워요. 내가 그였다고 생각한 바로 그 사람이 그리워요."
나는 칼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속삭인다.
내 다리에 얹힌 손이 동그랗게 주먹을 말고,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분노. 칼은 읽기 쉬운 사람이고, 거짓말하는 늑대 굴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 후라서 그 점은 환영할 만한 유예가 되어 준다.
"나도 걔가 그리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서, 나는 그를 휙 도로 쳐다본다.
p. 188, 2권
메어가 메이븐에게 느끼는 감정은 과거의 사랑, 그리고 추억, 그리고 아련함.
한 편 메이븐이 메어에게 느끼는 건, 그리고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가 그대를 찾을 거라고 했잖아."
째깍. 그의 손이 턱에서 목으로 움직이더니 꽉 조인다.
(중략)
"그리고 내가 그대를 구할 거라고도 했잖아."
p. 386-387, 1권
세상을 지배할 권력만을 원하는 것 같았던 메이븐에게도 일말의 감정이 남아있긴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마초적임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자하는 소유욕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약혼자가 모든 게 자신보다 나은 형을 좋아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이유나 방법이 어쨌든지간에, 메어와 메이븐, 이 둘은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
사랑의 부재, 혹은 사각관계.
모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설픈 러브 라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레드 퀸 : 유리의 검』은 환상적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여주인공은 줄곧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일으킨 상황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간간히 그녀가 칼을 아끼거나 메이븐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책 두 권의 분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진홍의 군대 내의 분파 이야기와, 그 속에서 탈출하는 주인공들,
그리고 은혈의 감옥에 가서 싸우는 내용이다.
킁킁~
어디서 심장이 타오르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와중에도 자신의 사랑을 피력하고, 좌절하고, 체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메어의 동네 친구이자 진홍의 군대에 속해 있는 킬런이 그렇다.
"네가 원하는 만큼 그를 사랑해도 돼. 난 너를 말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를 위해서, 네 부모님을 위해서, 우리 나머지를 위해서, 그가 너를 지배하게 두지는 마."
p. 35, 2권
킬런은 메어를 사라하고 그녀를 아끼며,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든 사랑하길 바란다.
심지어 그 대상이 은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메어가 메이븐에게서 벗어나 며칠 후 눈을 떴을 때, 킬런과 칼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래서 남녀간의 친구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던가.
둘 중 하나는 가슴앓이하는 짝사랑을 하고 말 테니까.
킬런이 오로지 메어바라기라면, 메어의 마음은 칼에게, 그리고 어느 부분은 메이븐에게 향한다.
모든 시체가 그대를 향한 메시지이자 나의 형을 향한 메시지야. 내게 항복해, 그러면 이 일은 끝날 거야. 항복해, 그러면 이 사람들은 살 수 있어.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메이븐.
p, 70, 2권
사랑의 작대기는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 버렸다.
만약, 이들이 하는 걸 '사랑' 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낙인 때문이었나...
메어는 처음부터 울고불고하는 나약한 소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상황에 따라 변신할 줄 아는 인물같다.
어떤 색을 칠하든 그 색깔에 맞는 분위기로 변신하는 흰 도화지 같은 사람.
작정하고 원한 직업도 아니었지만 왕궁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일을 받아 들인다.
몰랐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되고, 갑작스럽게 이어진 은혈 왕자와의 약혼자로서의 역할도 무리없이 해낸다.
그러다가 믿었던 왕자에게 배신당한 이후로는 반란군 편에 서서 싸우게 된다.
이를 보고 자신의 유리한 쪽으로 돌변하는 '박쥐같은 인간' 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아무도 내게는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동안 스스로에게 이미 발생한 일들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한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 길을 걷고 있으리라고 말해 왔다. 킬런을 징병에서 구하고, 내 능력을 깨닫게 되고, 진홍의 군대에 들어가오, 완젹하게 찢어지고, 싸우고, 죽이고, 번개 소녀가 되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정말로 모르겠다.
p. 256, 1권
모든 인생에는 전환점이 있고, 메어에게서 많은 전환점 중 하나는 쉐이드 오빠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오빠가 죽은 이후로 그녀의 목표는 뜻을 같이 하는 적혈, 은혈, 신혈들과 함께 감옥의 죄수들을 풀어내고,
사악한 은혈 고문관들 - 혹은 초능력자들 - 을 죽이는 것이다.
그녀는 지휘 본부의 은혈들을 죽이고 엘라라 왕비도 죽게 한다.
"엘라라는 죽었어."
그 말은 와인만큼이나 달콤하다. 그녀는 죽었어,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상처 줄 수 없어.
"그녀는 더 이상 누구도 조종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죽은 자들 누구를 위해서도 애도하지 않고 있잖아. 오히려 그들을 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지. 네 가족을 말 한 마디 없이 버려뒀고, 자신을 제어할 수도 없어. 시간의 반은 남을 이끄는 일에서 달아나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순교자인 것처럼 행동하며 죄책감을 뒤집어쓴 채 세상에서 대의명분이 주어진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뿐인 것처럼 굴잖아. (후략)."
p. 264, 2권
메어는 오빠의 죽음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동안 쌓인 고통이 한꺼번에 분출된 것일 수도 있는 이유때문에 은혈들을 죽이게 된다.
그렇다고 그런 메어를 비난하는 칼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메어가 메이븐이 새긴 낙인때문이든, 무슨 이유에서든지간에 늘 당하는 약한 존재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론 그녀가 단 한 번도 약했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던져 놓은 미끼는 많다.
메어는 메이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메이븐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을 하려 한다.
메어는 진정한 전사로 변한 듯 하고, 자신과 함께 한 킬런 외 진홍의 군대 친구들을 살린다.
1편의 마지막에서 느꼈던 갈증을 2편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줄이야.
여기 현기증 나는 사람 한 명 있으니 어서 3편이 나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