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양치기의 편지 -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제임스 리뱅크스 지음, 이수경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영국



내가 아는 영국이란 나라는 옛날 신사의 나라,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방황하는 무서운 10대들로 유명한 영드 'Skins' 의 나라.

하지만 그 감성이라는 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과 잘 맞아서 

영드 '셜록' 에서부터 영화 '노팅힐','브리짓 존스 시리즈' 까지 감동을 주는 나라이기도 하다.
영국에 다녀 온 친구가 한 마디 한 적 있다. 

"미국 뉴욕 갔을 땐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는데, 영국 갔더니 정말 뭘 물어봐도 쌩~하니 지나가더라."

우리나라가 예전의 동방예의지국에서 이제는 노인을 경시하고 이기주의가 넘쳐나는 나라인 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영국은 내게 늘상 우울한 날씨가 만든 우울한 사람들과 맛없는 음식, 

한 편 날 흥분하게 하는 EPL (영국 프로축구 리그)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영화로 다가온다.

그런 나에게 '영국 양치기의 편지' 라는 에세이는 영국에도 도시가 아닌 공간이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많은 산간 지대와 시골에 대관령 양떼 목장과 삼양 목장까지 있는데, 

지구 저편 영국이라고 다를 바 있을까.
늘 읽던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기에 더욱 잘 알 수 있다.

현대 영국에서 양치기로 사는 게 어떠한지, 지금까지 양치기로 살아온 게 어떠했는지.

주인공이자 저자인 제임스 리뱅크스가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우리말로 하면 호수지역? 아니 호수마을이라고 해야 할까.
해외에서 온 여행자였다면 거의 알지 못했을 법한 도보여행의 성지로서, 

이 에세이를 읽음으로써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그 속의 삶을 엿보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느 미국인이 우리나라의 고창을 그리 흔히 가 보겠는가.

내게도 마찬가지로, 언젠가 영국을 간다고 할 지언 정 갈 곳은 런던, 옥스포드, 리버풀 등으로 정해져 있다.

외국인들을 위한 여행책자 속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딱 그런 곳이다.

어쩌면 평생 가 보지도 못 할 곳을 책으로나마 알게 되어 기쁘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 는 그렇게 영국 속 또다른 영국을 보여주고 있다.






영문학



나는 대학 시절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순전히 '영어' 라는 언어가 좋아서 덩달아 영문학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리뱅크스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야말로 영국인이다.

그가 종종 언급하는 작가들이 내가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배운 바로 그 작가들이라서 반갑다.


누군가는 이 책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비교하였다.

대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겼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 역시도 그 의견에 동감하는 바이나, 아이러니한 것은 비교 대상인『월든』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거다.

미국의 월든 호수를 그리고 있는 책을 읽으면서 어찌나 지루하기 짝이 없던지, 보다 졸던 끝에 책을 덮어 버렸다.

총 503페이지를 견딜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영국 양치기의 편지』는 하루만에 다 읽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생각와 생활을 기록한 '에세이' 류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가하면 이 에세이 속에서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인물이 윌리엄 워즈워스이다.

그의 시 'My Heart Leaps Up' 은 학생들의 문제집, 영어교과서 중간, 심지어 모텔 객실 벽을 장식하는 유명 시가 되어 버렸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출신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1810년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볼 수 있는 눈과 느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해 즐길 수 있도록 일종의 국유재산이 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p. 21-22



윌리엄 워즈워스만큼 자연을 사랑하고, 직접 농장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지었던 

현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대표시 중 하나인 'Mending Wall ' 은 저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비유적으로 쓰인다.


여덟 살쯤때부터 할아버지는 내게 돌담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셨다. 

(중  략)

농장 일을 사랑했던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담장 고치기를 주제로 아름다운 시를 썼다. 프로스트는 담장이 튼튼해야 이웃 사이가 좋다고 노래했는데, 맞는 말이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고, 손자인 나도 그걸 깨달을 수 있길 바라셨다.


p. 77



학부 시절 담장을 쌓는 것이 과연 이웃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로버트 프로스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할 때 

이웃과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 교수님과 학생들이 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로버트 프로스트는 중의적인 시를 잘 쓰는 시인이었다.


우리 학교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소설 『파리 대왕』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p. 126



『파리 대왕』이라고 하면 원서를 읽은 후 레포트 쓰고 시험까지 본 도서인데,

 역자의 뒷받침 설명 없이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문학적 언급이 많다는 사실에 매우 기쁘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과 관련된 수많은 작가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단연 베아트릭스 포터다. 그녀는 힐리스 부인이라고도 불렸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양치기들을 몹시 존경했다. 그녀는 진 윌슨과 내가 흥정하는 과정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녀 자신도 양치기와 양을 거래하는 흥정을 해본 경험이 많으니까.

p. 333



베아트릭스 포터라면 내가 사랑하는 캐릭터 '피터 래빗' 을 그린 장본인이자, 영화 '미스 포터' 속 실제 주인공이 아니던가.

그저 작가인 줄로만 알았던 베아트릭스 포터가 양을 흥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니.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실제로 베아트릭스 포터와 피터 래빗을 주제로 한 베아트릭스 포터 월드가 있다고 한다.

참 세상은 내가 알면 알 수록 모르는 거 투성이이다.







할아버지와 소년





어느 이야기에서건 사랑스러운 주제라고 여겨지는 게 '노인과 아이' 이다.

노인은 세상을 많이 살았지만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어린 존재를 찾게 된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에서는 소년 제임스 리뱅크스와 할아버지 휴 리뱅크스가 그런 관계이다.



다른 동네는 어떨까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딱히 휴일도 없었다. 나는 늘 할아버지와 함께 목장 어딘가에 있었고, 하루 종일 할아버지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밤이면 할아버지네 침대에서 곯아떨어지곤 했다.


p. 90



소년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세상 전부였고 늘 대장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둘이 한 대 피운다." 는 농담을 즐겨하던 할아버지는 그에게 찬란한 햇살과 푸른 하늘로 넘실대는 여름이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철썩같이 믿고 따르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 

최근에 본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이 떠오른다.
주인공 소년 제이크는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신비한 힘을 가진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와 돈독한 사이이다.

머리가 크게 된 후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의문점을 품기 시작하지만, 결국 다시 믿게 되었다.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나는 조금씩 더 힘이 세졌고 건초를 더 높이 들어 올릴 수 있게 된 반면, 할아버지는 점점 더 힘이 약해지셨다.


p. 105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는 다시는 일을 하러 나갈 수 없었다.


p. 142



할아버지는 이제 영영 못 돌아올 곳으로 가셨다. 할아버지 없는 내 삶이 전과 똑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p. 145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려워 했던 장면, 하지만 필연일 수 밖에 없는 장면이 나오고 만다.

소년에게 세상 전부였던 할아버지는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소년은 갈 길을 잃는다.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살아 온 나 자신 역시 절대로 겪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어린 손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길 즐겨하던 할아버지를 나는 절대 잃고 싶지 않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동안 아버지와 양치기를 하면서 의견 차이로 갈등하던 소년은 

남자가 되어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한다.

할아버지라는 커다랗고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자라던 아이가 스스로 세상에 한 발 내딛기 시작한다.






관광지에 산다는 것





옥스포드 대학까지 간 '휘귀한' 양치기 제임스 리뱅크스는 대학 생활 후 다시 양치기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 놈의 낭만주의' 작가들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레이크 디스트릭트라는 관광지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며 살고 있다.

대학을 계기로 레이크 디스트릭트 밖의 삶과 소통할 줄 알게 된 그는 인기 트위터 계정을 소유하게 되었다.

나도 『영국 양치기의 편지』를 한국어로 읽었다고 그에게 트윗 날리니, 곧바로 리트윗해주는 발빠른 면모를 보였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을 한낱 휴양지로 여기며 찾아왔다가는 관광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딱히 내치지도 못했다.

중소규모의 목장을 소유한 양치기로는 안정되게 살기 힘든다는 걸 안 저자는 목장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을 병행한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처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지역들의 경제와 관련된 일을 하는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전문 고문위원으로서 일하며, 관광산업이 해당 지역 사회에 이익과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사람들을 거부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조금 더 자신의 공간과 모두에게 이로운 쪽을 찾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다시 말해, 레이크 리스트릭트를 보존하면서도 SNS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데, 

잘 보존된 양떼 목장과 호수마을을 보려는 관광객들로 관광산업이 고용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다고 한다.

물론 관광지의 수익과 삶의 터전을 맞바꾼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택의 60~70퍼센트가 외지인들의 주말이나 휴가용 별장이라서, 많은 현지주민이 자기 동네에서 살 집을 구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현지 주민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듯한' 이런 현실을 떨떠름하게 여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지역에서 이제 우리가 소수집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어떤 곳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손님들이 손님 맞는 집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처럼.


p. 22-23



한 달 전 친구 한 명과 청주 벽화마을에 놀러간 적이 있다. 여러 예술가들의 벽화들로 예쁘게 꾸며진 벽돌담이 특징인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벽화마을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주의해 달라는 내용을 보니, 관광객들이 얼마나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나 알 수 있었다.

멀리 찾지 않고 인터넷 뉴스만 봐도 제주도가 중국인 관광객들 문제로 얼마나 속을 썩이는 지 알 수 있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의 양치기가 계속하여 자신의 본업과 전통을 지켜나가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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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엠마 힐리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 모드의 기억





모드는 치매 걸린 할머니이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들이 그러하듯 모드는 기억력 부분에 이상이 있고, 자신이 방금 전에 한 일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구매했던 복숭아 통조림을 또 구매하고, 자신이 왜 이 가게 안에 서 있는지 영문을 모른다.

모드와 그녀의 간병인 칼라, 그녀의 딸 헬런이 택한 방법을 무엇이든 적어놓기이다.

쪽지에 무언가를 적고는 보통 주머니 속에 넣거나 냉장고에 붙이는데, 이마저도 '적었다는 사실' 을 잊어서 문제가 된다.

이러한 모드의 습관은 마치 S. J. 왓슨의 소설『내가 잠들기 전에』에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 크리스틴이 매일 일어난 일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것과 같은 습관이다. 

다만 둘이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리스틴은 일기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서 기억을 되집어가는 반면,

모드는 자신이 적은 메모가 어디 있는지, 혹은 발견한다 해도 언제 왜 적은 것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모드는 하루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메모지에 적힌 글귀들 - 이를 테면, 요리하지 않기, 외출하지 않기 - 을 일부러 무시하며 마음 속으로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지없이 우리가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의 정반대이다.

차를 끓여놓고는 금새 잊으며, 집 밖으로 나와 길을 잃어서 딸이 찾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의 기억도 깜빡깜빡하는 모드에게 어릴 적, 그 중에서도 수키 언니가 사라지기 전인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기억은 생생하다.

얼마나 정확하냐하면 각 장면을 그대로 이미지화해서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이다.




지하실의 창들은 벽돌로 막혔고, 환기를 위해 앞쪽에 창살만 질러져 있었다. 나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형부의 밴들이 서 있는 뒤뜰로 가보았다. 여기서는 개 짖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그 소리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움직여 마치 개가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서리가 내려 반들거리는 자갈 위에 밴 한 대만 서 있었는데,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제라드 이사' 라는 상호에 먼지가 쌓여 '라드 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제' 자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고 있을 때 위에서 뭔가가 약하게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낡은 마구간 창을 올려다보았다.


p. 76



어린 시절의 기억에 있어서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꽤나 상세하다.

그 시절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올라서 의사가 기억을 떠올리는 방편으로 사용하게 할 정도이다.

모드는 이렇게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손녀 케이티나 매장의 점원은 이해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며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보이도록 한다.

한 가지 괄목할 만한 점은 과거의 기억은 뒤죽박죽이 아니라 시간의 순서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이다.

마치 일일드라마를 보듯 '오늘은 여기까지' 그 다음엔 '다음 이 시간에' 가 연달아 나오는 셈이다.

모드가 부모님, 언니, 형부, 하숙인 더글라스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을 유독 잘 떠올리는 이유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의문점이 많이 들어 빈 공간을 메꾸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바로 수키 언니가 실종되기 전의 일상적으로만 보였던 일들이 할머니가 된 모드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니려고 한다.








- 미스 마플? 미세스 모드!






현재의 할머니 모드는 사라진 친구 엘리자베스의 일에 사로잡혀 있다.

어느날 발견한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Elizabeth is missing.)' 라고 적힌 메모지를 본 이후, 

그렇게도 깜빡깜빡하는 그녀가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된다.
물론 때때로 자신이 누굴 찾고 있었는지 잊기도 하고, 심지어는 엘리자베스가 누구인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종이 의심되는 친구 엘리자베스를 찾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대단해서,

늘 퉁명스러운 태도의 엘리자베스의 아들 피터를 주요 용의자로 보는가 하면, 직접 실종 전단지도 접수하고 경찰서에도 간다.

경찰서에서는 거의 매일 오다시피하는 모드의 실종신고를 그냥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승강기가 멈춘다. 움직이기 싫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한참이나 서 있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나는 동그랗게 뭉친 화장지를 카펫에 떨어뜨려 내 자리를 표시해두고 층계참으로 걸어 나간다. 승강기는 텅 비어 있다. 


p. 182



피터 내외 몰래 엘리자베스의 집 안에 들어와 숨어 있는 모드.

누군가 그녀를 발견한다면 영락없는 도둑에, 불법 침입자이자 엘리자베스에 집착하는 미친 할머니로 보일 게 뻔하다.

그런데도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여 계속해서 파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추리 소설의 대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 이 자꾸만 생각나는 건 오버일까.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 자리에 앉아서도 문제를 대번에 해결할 수 있는 총명한 미스 마플과는 달리,

 자신의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겨워 보이는 모드이지만,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포기하는 그 의지 하나는 참으로 닮아 있다.
모두가 무시하고 모두가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겨도 자신의 소신을 갖고 나아가는 모드를 미세스 모드로 칭하겠다.







- 되돌아보면 이상한 점이 드러난다. 




미세스 모드가 추리하는 건 현재의 엘리자베스 실종 사건뿐만이 아니다.

과거 그녀의 언니였던 수키의 실종 사건도 동시에 추리하고 있다.

모드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암시나 단서를 작가는 과거의 서술을 통해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나중에 더글라스가 영화를 보고 돌아왔을 때 내 이마에는 아직도 언니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립스틱을 문질렀다. 그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날 놀리면서 그 립스틱 색깔을 정확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빅토리 레드 (Victory Red).


p. 59




그들은 문간에 멈춰 서서 복도 쪽을 뒤돌아보았고, 경사는 바지에 묻은 케이크 부스러기를 털었다.

"저 청년을 보니 누군가가 떠오르는데." 그가 집을 나가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군지 생각이 안 나네요."


p. 127




순간 더글라스가 바로 그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그가 가방 옆면을 더듬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p. 179




더글라스는 자기가 본 영화에 대해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중략)

그는 경직된 몸을 내 쪽으로 휙 돌렸지만, 계속 신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p. 199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행동이나 발언들, 혹은 너무 어렸을 적이라서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 갑자기 떠오른다.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며, 연신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고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결국 우연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게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가끔은 창피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지곤 그 때의 내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기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100% 온전한 기억이라는 건 없다.

과거의 내가 느끼고 본 대로 기억하며, 그마저도 정확하지가 않다.

나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과거에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는가 하면, 그 땐 선명했던 사건들이 흐릿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수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간혹 최면요법으로 저편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나보다.










- 모든 것은 하나다.





자꾸만 과거에서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모드의 기억.

피터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없는 집에 방문하는 모드의 행동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수키 언니의 실종, 호박 씨를 어디다 심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집, 이 모든 건 하나였다.

모드는 부지불식간에 수키 언니 사건에 대한 큰 실마리를 제공하고 케케 묵은 사건이 해결된다.

엘리자베스 건은 별거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로 인해 수키 언니에게로 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불완전했던 과거의 조각들이 맞춰졌다.


이 소설은 매우 영리하고 매력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모드 할머니를 중심으로 흔한 치매 환자의 일상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실종사건' 이라는 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찌 보면 스릴러적인 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화자가 '느리고 힘 없는 노인' 이라 그런지 전혀 무섭지 않다.

편안하게 앉아 차 한잔에 케이크 한 조각 먹으면서 소설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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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볼
브래들리 소머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피시볼은 제목 그대로 '세빌 온 록시' 라는 원룸형 아파트 27층 발코니 어항 속에 살던 물고기 이언이 

모험을 찾아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일어난 거주민들의 에피소드들을 모아둔 것이다.







-  이언 : 단순함 



수컷 - 이게 어떤 차이를 낳겠냐마는 - 물고기 이언은 '물고기는 3초 기억력을 지닌다.' 는 말이나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 혹은 '도리를 찾아서' 의 물고기들이 

계속해서 누군가를 처음 본다고 생각하여 자기 소개를 끊임없이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언에게 조금 더 나은 점이 있다면 3초가 아닌 15분마다 기억이 재생성된다는 점 정도?


이언과 같은 물고기에겐 시간이나 공간이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언제나 행복하며 깊은 성찰이나 한탄이란 건 해 본적이 없다.

그러한 이언의 모습은 애인, 아기, 직업, 결벽증 등으로 고민하는 인간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언에게 어울리는 말은 Carpe Diem, 혹은 Seize the day이다.

늘 미래를 향해 내일을 위해 사는 인간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고 최대한 즐기라는 말은 사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오랜 시간 노력해도 그에 합당한 성과를 얻거나 대가를 받기 힘든 상황에서는

어떻게 현재를 즐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이언처럼 늘 그래왔다.

내일도 중요하지만 다신 못 만날 오늘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최대한 즐겼다.

남들이 "괜찮겠어?" 라고 물어보는 도전을 해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떠났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좀비를 피해 달린 적도 있고, 밤새 클럽에서 춤추고 한 숨도 못 잔 다음날 아침 바로 일 한 적도 있으며,

정말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땐 상사에게 가서 하소연하고,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중학생 때는 김동성과 안톤 오노 사건으로 열이 받아 IOC와 국제빙상협회에 정중하지만 동시에 단호한 항의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물론.. 이렇다 할 해결책이나 친절한 말로 가득찬 답변은 못 받았지만...) 


이언은 말한다. 생각을 줄이고 행동하라고.

그의 말은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두 번 더 생각해라." 라고 말하는 인간들의 그것과는 정확히 반대된다.

이언이 전적으로 옳진 않지만, 그래도 항상 틀린 건 아니다.

비록 어항 속 물고기의 말이라도 때때로 귀 기울일 필요는 있는 법이니까.



이언이 말을 할 줄 안다면 "계획을 세우는 건 실패를 향한 첫걸음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p. 18



아무런 생각없이 사는 것 같은 이언은 '멍청하게' 숨만 뻐끔뻐끔 내쉬는 다른 물고기들과는 다르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10년 이상 오래 사느니 모험이 낫다고 생각한다.

뛰어 내리는 게 물고기가 하는 타당한 행동이라 생각하면서 이를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소설 '갈매기의 꿈' 에서 조나단과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려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고 

제자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쳐 준다는 데 반해, 

물고기 이언은 27층에서 떨어져서 또 다른 '어항' 인 '스포츠물병' 안 물 속에 안착한다는 것이다.

물 없이 살 수 없는 물고기에게는 이 또한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겠지.





- 다르다는 것 = 외롭다는 것?



이언이 아파트 발코니 어항에서 곤두박칠치기 전에, 치는 동안, 친 후에 과연 세빌 온 록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가 찰나의 순간을 경험하는 동안, 인간들은 고장난 엘레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세빌 온 록시 거주민 중에 대가족은 없다.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건 그저 동거하는 애인 관계의 2인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원룸 형태의 아파트라서 다들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지닌 채 살고 있다.


세빌 온 록시를 관리하는 히메네스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관리인이다.

여자들에게도 인기 없는 그는 그림으로 치자면 주인공 뒷 편 배경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심지어 육감적인 미인 케이티를 보고도 사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제대로 된 친구도 가족도 없는 그에게 남은 건 외로운뿐이다.



히메네스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건 외롭기 때문이다. 집에 가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늦게까지 일하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일을 하고 있으면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처럼,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p. 36



공사판에서 일하는 가스는 자신의 큰 덩치와 위협적인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걸 잘 안다. 

그는 케이티 옆을 비껴 갈 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온화한 표정도 지어보고 말도 걸어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의 외모와 그에 상반되는 취향은 더욱 더 안으로 내몰고 있다.
스스로에게 여자가 되고 싶다거나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합리화시키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여장남자가 되는 걸 좋아한다. 

시작은 우아한 여자 드레스를 입는 것으로 했겠지만 그 끝은 성전환수술일 지 누가 알겠는가.

8층에 살고 있는 클레어는 성인 전화를 받는 일을 하는 결벽증을 가진 은둔형 외톨이이다.

처음부터 그녀가 아파트 밖에 나가지 않았던 건 아니었고, 큰 실망감이 심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20대 후반,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육아와 대출금이라는 부담을 안고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가자 사는 게 별로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평생 변치 않는 따스한 우정과 동지애 대신 공허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끊어질 유대라면, 그렇게 쉽게 시들어버릴 우정이라면, 그녀에겐 필요 없었다.


p. 55



 마구 마구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지금 내 주변에도 국가시험을 준비해서 연락이 끊겼다가 합격한 다음에는 일이 많다고 연락이 없는 친구, 

결혼한 다음 두 아이와 남편이 세상 전부가 되어 친구들에게는 연락을 일체 하지 않는 친구 등 

다양하게 절교 신호를 보낸 친구들이 있다.

매우 실망스럽지만 동시에 그리 신경쓰이지 않는 건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허먼은 자신이 순간이동을 한다고 믿으며 과학을 좋아하는 소위 'geek' 으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의식을 잃는 허먼은 할아버지에게 홈스쿨링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는 진짜 혼자가 된다.


이런 네 명의 각기 다른 외로움은 서로가 서로를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만남으로써 해결되는 듯하다.


자신의 집 싱크대를 고치러 온 히메네스 뒤에서 드레스를 입고 말을 거는 가스.

가스 앞에서 히메네스 역시 늘 숨기기만 했던 자신의 꺼풀을 벗기고 둘은 춤을 춘다.

히메네스와 가스는 서로가 있음으로 지금껏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한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임산부인 피튜니아 딜라일라는 허먼과 클레어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함께 사는 애인 대니는 일하다 지나가는 여자 - 이 경우에는 특히 케이티 - 를 보고 야한 상상을 하는 그런 남자이다.

산통을 심하게 느끼고 아이를 낳으려는 순간 대니는 일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한다.

양수가 새어 몸을 질질 끌고 복도로 나온 그녀의 눈에 띈 건 의식을 잃은 소년 허먼이다.

그녀는 허먼까지 질질 끌고 가 도통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던 클레어가 처음으로 문을 열고 사람을 들이게 한다.

119 신고센터 상담원과 통화를 하던 클레어는 상대편이 자신의 성인전화 고객인 제이슨이라는 걸 알고 둘은 만날 약속을 한다.

피튜니아 딜라일라는 자신의 배에서 아기가 나오는 걸 도와준 허먼을 가족처럼 생각하기로 한다.
임산부의 처절한 고통은 다섯 명을 동시에 연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 사랑, 사랑?


 

케이티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타입인데 남자보는 눈은 그리 없는 듯하다. 

그래도 사랑에 빠지는 건 그녀 최고의 능력으로, 요새는 남자친구 코너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코너 래들리는 여성들과 육체적인 관계 하는 걸 좋아한다.
변태적인 취향의 데브와 관계를 맺는 것도 황홀하고, 양성애자인 페이와 관계를 맺는 것 역시 좋다.

그런 그에게 최근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한다.

휴대폰에 있었던 데브와 페이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케이티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아무래도 자신의 원룸 아파트 안 여기저기 남아 있는 케이티의 흔적을 보고 느낀 게 있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머그잔은 케이티가 선물해준 것이다. 다른 여자들이 아닌. 그녀는 티셔츠와 단추와 스티커에 색다른 무늬를 찍어주는 전문 가게에서 컵을 저렇게 만들어왔다. 이언 역시 케이티의 선물이다. 그가 노인들만 있는 동네에서 개와 함께 외롭게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고기를 사온 것이다.


p, 131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 차를 끓였다.

이제, 소금밭 같은 흔적을 남긴 얼그레이의 남은 찌꺼기에서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의 이런 단편들이 항상 그의 주위에 있다.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p. 132



집으로 찾아온다는 케이티의 전화를 받고 집을 치워야겠다고 느끼고 페이와 함께 있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코너는 

자신이 진정으로 케이티를 사랑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녀는 코너를 웃게 하고 이야기하게 하는 존재이며, 그의 잘못을 후회하게 만드는 여자이다.

그는 살면서 이토록 확신이 든 적은 없었다.



케이티와 평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데브를 버릴 수 있다.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닐 수도...... 데브와 페이는 보통 여자들이 아닌데, 포기할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처음 생각으로 돌아간다. 케이티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가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해준다면, 그리고 그녀도 그를 사랑해준다면, 데브와 했던 것들을 케이티와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분명 사랑에는 희생만큼 보상도 따르는 거니까.


p. 192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이다. 궁합만큼 속궁합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케이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동시에 다른 여자들과의 잠자리를 비교하며, 케이티에게도 변태적인 성행위를 요구할 생각을 해 본다.

코너는 살면서 이토록 확신이 든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순간의 확신일 뿐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건 절대 바뀌지 않는다. 결국 그는 다시 바람을 필 테고, 좀 더 새로운 관계를 찾을 것이다. 

케이티가 코너의 사과와 눈물에 넘어가지 않은 건 정말 잘 된 일이다. 





이언에게 생각이 없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다.

늘 계획을 세워야 하고, 계획한 대로 일을 해나가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경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의 성적 취향을 고민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게 틀린 일은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아이를 낳는 순간엔 그동안 나를 잘 돌보지 않은 남편이 죽일 듯이 밉다.

이런 저런 귀찮은 일과 생각을 겪어도 되지 않는 이언은 정말이지 축복받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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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 칼럼 - 남무성, 볼륨 줄이고 세상과 소통하기
남무성 글.그림 / 북폴리오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칼럼


칼럼을 모아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칼럼이라는 걸 읽어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일부러는 아닐 지라도, 우연히, 혹은 지나가듯 칼럼을 꽤나 읽어본 듯 싶다.

미용실에서 헤어 시술 받다가 남녀의 성차이에 관한 칼럼을 읽어 본 적도 있고,

개봉 예정 영화에 대한 검색을 하다가 시사회에서 미리 그 영화를 접한 평론가의 칼럼을 읽은 적도 있다.


칼럼은 결코 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만의 주관이나 고집이 꽤나 강한 편이라서,

 남들이 "내 생각은 이런데 좀 읽어볼래?" 라고 말하는 듯한 류의 글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유일하게 선호하는 장르는 소설이다.

소설 중에서도 가볍게 읽히는 해피 엔딩의 칙릿과 요리와 추리가 섞인 퀴진 미스테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잔의 칼럼』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건 말할 수 있겠다.

머리가 복잡할 때, 여행지에서 30분~1시간 정도 시간 때울 만한 게 필요할 때, 

움직이는 교통 수단 안에서 집중할 필요없이 읽을 게 필요할 때 칼럼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여러 단편의 칼럼을 모아 두어서 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주제나 사건에 대한 길고도 지루한 의견이 아닌, 짤막짝막한 글들을 모아 두었다.

게다가 원래 그런 건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자가 굉장히 큼직큼직하다.

렌즈를 끼고도 크게 보일 정도인데, 렌즈를 벗으면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눈이 아프지 않고 한 면 안에 있는 글이 몇 초면 다 들어온다.


만화와 그림도 한 몫 단단히 하였다.

초등학생 때 자주 읽던 세계명작도서나 '소라는 OOO (예를 들면, 소라는 요리사, 소라의 맵시 등등.)' 시리즈 이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림이다. 

최대한 실감나게 상상하기 위해 한 글자 한글자 심혈을 기울여 읽으며 머리 아파할 필요 없다.
각 제목과 소재에 해당하는 그림이 칼럼 하나당 하나씩 있어서 눈도 쉬고 동시에 머리도 쉰다.

그런가하면, 작가가 직접 그린 만화는 마치 중학생 때 풀던 문제집 속 '쉬어가는 페이지' 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만화는 굳이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냥 책을 덮은 상태에서 진한 색으로 보이는 만화 페이지 먼저 펴서 읽으면 그만이다.


아무튼 독서에 대한 만족도는 상당히 높다.

다 읽는데 겨우 30분이 소요되었으니 이만하면 공중화장실 변기 앞에 하나씩 비치해도 될 듯하다.

책의 무게는 모르겠으나, 크기는 비교적 작은 편이니 한 권 정도 휴대해서 여행가도 될 듯하다.


늘 이야기 속에 빠져버려서 주인공에 동화되어 감정이입하거나 함께 고뇌할 필요 없이,

stress-free 책읽기가 이 칼럼이라는 거다.

한 면을 채 다 채우지 않은 글자들이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공간을 생산하여, 

현대의 복잡한 매체 속에서 잠시간의 아날로그식 휴가를 갖는 기분이다.






음악 애호가



『한잔의 칼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 음악, 과거와 오늘, 그리고 전원생활.

솔직히 말하자면 뒤의 두 부분은 전혀 내게 와닿지 않았고 - 특히나 전원생활 부분이 그랬다. - 기억에 남는 글이 없다.

반면 가장 첫 부분인 '음악 인생에, 한잔' 을 읽을 때에는 맞장구 치고 싶은 부분이 어느 정도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알아주는 음악 애호가라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과 '룰라' 의 팬이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마이마이에 넣고 테이프 속 필름이 늘어져라 듣곤 했다.

마이마이로는 라디오도 많이 들었다.

특히나 영화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눈을 감고 그 영화 속 장면을 상상하며 듣곤 했다.



그렇게 라디오를 벗 삼던 소년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고 음악평론과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p. 11 



학창 시절에는 무언가를 '수집' 하는 걸 좋아했다.

그게 때로는 영화 포스터와 비디오, DVD 였으며, 때로는 H.O.T 관련 모든 물품들이었다.

그러니깐...

테이프, CD, 콘서트 비디오, 화보집, 향수, DNA 목걸이, 썬칩 과자, 미스터 해머 과자 등등이 있었다.



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부모님 몰래 레코드판을 계속 사 모았다.

p. 31



요새는 CD는 구닥다리가 되어서 서랍 안을 몇 년동안 차지하기만 하거나, 진열장에서 먼지만 소복하게 쌓여 있다.

mp3 플레이어는 어디다 둿는지 모를 지경이고, 폰이나 컴퓨터, PMP로 듣는 음악이 전부이다.



LP 역시 판을 닦고 턴테이블을 올려서 바늘을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CD의 출현 이후 찬란했던 시대의 종지부를 찍었다. 하물며 지금은 MP3가 등장했다. 아무데서나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가 유행이다. 컴퓨터를 켜고 선곡 리스트를 돌리면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다.

p. 28



나는 멜로디가 밝은 분위기의 음악을 좋아한다.

때로는 그 음악이 아이돌의 댄스 음악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클럽 음악, 때로는 R&B나 힙합, 때로는 재즈가 되기도 한다.

한 때는 재즈, 그 중에서도 acid jazz에 빠져서 끌로드 볼링과 일본 시부야계 음악을 주구장창 듣고, 직접 들으러 간 적도 있다.

그런데 관객석 맨 앞에서 들으려면 유명 재즈 뮤지션의 티켓 가격 15만원은 그냥 넘더라.



그때가 1994년, 해외 재즈 뮤지션들의 내한 공연이 가뭄에 콩 나듯하던 시절이었다. 별도의 관람 티켓을 끊고 지하로 내려갔는데 너무 작은 공간이어서 한 번 더 놀랐다.

공연장이라기보다는 연습실 같다고 할까. 구석에 무대가 있고, 서서 보는 스탠딩 공연이었다.

'아니, 세계적인 밴드가 이런 동네 지하실에서 공연을 하다니...'

(중략)

사실 세계 곳곳에서 라이브 클럽 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우리의 경우는 이상하게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이런 공연이 열린다. 당연히 관람료도 비싸다.

p. 41



이런 나도 음악 마니아라고 자칭하고 싶다.

오타쿠보다는 역시 마니아라는 말이 좋다.



마니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폭넓게 이해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게 되는데 비해 오타쿠는 한 가지에 집착하며 시야를 좁힌다.

p. 115







『한잔의 칼럼』은 세 단어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겠다.



smooth

refreshing

familiar



글을 쭉쭉 읽어 내려가는데 무리없이 매끄러우며, 일상의 찌든 삶에서 벗어나 머리를 맑게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쓴 글인듯 친근하다.

'이런 글은 나도 쓸 수 있겠는데?' 라는 오만한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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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유리의 검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누구든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오빠의 속삭임만이 들린다.

"아무도 믿지 마."


p. 302 , 1권



쉐이드 오빠는 메어에게 말한다. 아무도 믿지 말라고. 
지금 메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믿었고, 어쩌면 은혈임에도 불구하고 적혈 편에 서길 원했다고 한 때 믿은 메이븐은, 이제는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렸다.

진홍의 군대가 어두운 커텐 뒤에서 무대 한 중앙으로 나오게 한 데에는 멋지게 배신당한 메어의 덕이 클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같은 적혈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그녀의 능력을 알아버린 은혈 사이에서도 '배신자' 혹은 '두려움의 대상' 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어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들과의 구분이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하다.

자신의 다른 오빠들 중에서도 트래미나 브리보다는 쉐이드를 훨씬 믿고 따른다.

그리하여 함께 진홍의 군대의 레이크랜즈 출신 대령으로부터 탈출 계획을 세운다.

쉐이드 오빠에 대한 메어의 특별하다싶은 애착에는 합당한 이유가 존대한다.

이 둘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신혈', 즉 돌연변이이다.

각각 번개소녀와 점퍼라는 애칭이 붙여진 이들은 마치 미드 'HEROES' 속 돌연변이들이 그러하듯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비록 쉐이드는 메어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 하였지만, 정작 자신만은 믿길 바라지 않았을까.


주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메어는 한 번 자기 사람으로 생각한 이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자신을 위해 왕궁을 배신한 대가로 죽은 줄만 알았던 줄리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어쩌면 그가 메어를 이용하려 돌연변이들의 목록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메어는 그 목록에 의지한다.

그런가 하면, 코로스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처음 본 아이즈인 존의 예언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


무엇보다도 칼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이 가장 두드러진다.

아마도 왕궁에 들어가기 전 그가 왕자인 줄 모르고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를 위한 칼의 배려때문이었을까.

진홍의 군대 속에서도 자신이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그의 말에 쉽게 납득하는 메어의 모습에서 칼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나는 그대의 혁명의 일부가 아니야."

속삭이는 칼의 목소리가 밤 속으로 거의 스러진다.

"나는 진홍의 군대가 아니야. 나는 이 일의 일부분이 아니야."

그가 화가 나서 발을 쿵쿵 찍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당신은 뭐죠, 칼?"

그가 입을 벌리고 대답을 뱉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혼란이 이해가 간다.


p. 240, 1권








사랑인가, 집착인가, 미련인가, 권력인가.




메어가 칼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사랑이다.

오히려 2부인 '유리의 검' 에서보다 1부인 '적혈의 여왕' 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왕궁과 맞서 싸우는 선두에 선 지금, 그녀에게는 사랑도 사치일 뿐이다.

그런 그녀를 대하는 칼의 태도는 짐짓 조용하고 차분하다.

아마도 동생의 배신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진홍의 군대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한낱 사랑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메어가 메이븐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떠한가.

메이븐의 과거를 알고 그의 가면이 한꺼풀 벗겨진 모습도 아는 그녀에게 왕위에 오른 메이븐은 낯선 존재이다.

그녀는 크게 뒷통수 맞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정도이다.



"메이븐이 그리워요. 내가 그였다고 생각한 바로 그 사람이 그리워요."

나는 칼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속삭인다.

내 다리에 얹힌 손이 동그랗게 주먹을 말고,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분노. 칼은 읽기 쉬운 사람이고, 거짓말하는 늑대 굴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 후라서 그 점은 환영할 만한 유예가 되어 준다.

"나도 걔가 그리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서, 나는 그를 휙 도로 쳐다본다.


p. 188, 2권



메어가 메이븐에게 느끼는 감정은 과거의 사랑, 그리고 추억, 그리고 아련함.

한 편 메이븐이 메어에게 느끼는 건, 그리고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가 그대를 찾을 거라고 했잖아."

째깍. 그의 손이 턱에서 목으로 움직이더니 꽉 조인다.

(중략)

"그리고 내가 그대를 구할 거라고도 했잖아."


p. 386-387, 1권



세상을 지배할 권력만을 원하는 것 같았던 메이븐에게도 일말의 감정이 남아있긴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마초적임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자하는 소유욕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약혼자가 모든 게 자신보다 나은 형을 좋아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이유나 방법이 어쨌든지간에, 메어와 메이븐, 이 둘은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








사랑의 부재, 혹은 사각관계.




모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설픈 러브 라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레드 퀸 : 유리의 검』은 환상적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여주인공은 줄곧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일으킨 상황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간간히 그녀가 칼을 아끼거나 메이븐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책 두 권의 분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진홍의 군대 내의 분파 이야기와, 그 속에서 탈출하는 주인공들, 

그리고 은혈의 감옥에 가서 싸우는 내용이다.

킁킁~

어디서 심장이 타오르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와중에도 자신의 사랑을 피력하고, 좌절하고, 체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메어의 동네 친구이자 진홍의 군대에 속해 있는 킬런이 그렇다.



"네가 원하는 만큼 그를 사랑해도 돼. 난 너를 말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를 위해서, 네 부모님을 위해서, 우리 나머지를 위해서, 그가 너를 지배하게 두지는 마."


p. 35, 2권 


킬런은 메어를 사라하고 그녀를 아끼며,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든 사랑하길 바란다.

심지어 그 대상이 은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메어가 메이븐에게서 벗어나 며칠 후 눈을 떴을 때, 킬런과 칼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래서 남녀간의 친구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던가.

둘 중 하나는 가슴앓이하는 짝사랑을 하고 말 테니까.

킬런이 오로지 메어바라기라면, 메어의 마음은 칼에게, 그리고 어느 부분은 메이븐에게 향한다.



모든 시체가 그대를 향한 메시지이자 나의 형을 향한 메시지야. 내게 항복해, 그러면 이 일은 끝날 거야. 항복해, 그러면 이 사람들은 살 수 있어.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메이븐.


p, 70, 2권



사랑의 작대기는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 버렸다.

만약, 이들이 하는 걸 '사랑' 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낙인 때문이었나...



메어는 처음부터 울고불고하는 나약한 소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상황에 따라 변신할 줄 아는 인물같다.

어떤 색을 칠하든 그 색깔에 맞는 분위기로 변신하는 흰 도화지 같은 사람.


작정하고 원한 직업도 아니었지만 왕궁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일을 받아 들인다.

몰랐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되고, 갑작스럽게 이어진 은혈 왕자와의 약혼자로서의 역할도 무리없이 해낸다.

그러다가 믿었던 왕자에게 배신당한 이후로는 반란군 편에 서서 싸우게 된다.

이를 보고 자신의 유리한 쪽으로 돌변하는 '박쥐같은 인간' 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아무도 내게는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동안 스스로에게 이미 발생한 일들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한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 길을 걷고 있으리라고 말해 왔다. 킬런을 징병에서 구하고, 내 능력을 깨닫게 되고, 진홍의 군대에 들어가오, 완젹하게 찢어지고, 싸우고, 죽이고, 번개 소녀가 되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정말로 모르겠다. 


p. 256, 1권


모든 인생에는 전환점이 있고, 메어에게서 많은 전환점 중 하나는 쉐이드 오빠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오빠가 죽은 이후로 그녀의 목표는 뜻을 같이 하는 적혈, 은혈, 신혈들과 함께 감옥의 죄수들을 풀어내고, 

사악한 은혈 고문관들 - 혹은 초능력자들 - 을 죽이는 것이다.
그녀는 지휘 본부의 은혈들을 죽이고 엘라라 왕비도 죽게 한다.



"엘라라는 죽었어."

그 말은 와인만큼이나 달콤하다. 그녀는 죽었어,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상처 줄 수 없어.

"그녀는 더 이상 누구도 조종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죽은 자들 누구를 위해서도 애도하지 않고 있잖아. 오히려 그들을 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지. 네 가족을 말 한 마디 없이 버려뒀고, 자신을 제어할 수도 없어. 시간의 반은 남을 이끄는 일에서 달아나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순교자인 것처럼 행동하며 죄책감을 뒤집어쓴 채 세상에서 대의명분이 주어진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뿐인 것처럼 굴잖아. (후략)."


p. 264, 2권



메어는 오빠의 죽음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동안 쌓인 고통이 한꺼번에 분출된 것일 수도 있는 이유때문에 은혈들을 죽이게 된다.

그렇다고 그런 메어를 비난하는 칼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메어가 메이븐이 새긴 낙인때문이든, 무슨 이유에서든지간에 늘 당하는 약한 존재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론 그녀가 단 한 번도 약했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던져 놓은 미끼는 많다.





메어는 메이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메이븐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을 하려 한다.

메어는 진정한 전사로 변한 듯 하고, 자신과 함께 한 킬런 외 진홍의 군대 친구들을 살린다.

1편의 마지막에서 느꼈던 갈증을 2편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줄이야.

여기 현기증 나는 사람 한 명 있으니 어서 3편이 나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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