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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엠마 힐리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 모드의 기억
모드는 치매 걸린 할머니이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들이 그러하듯 모드는 기억력 부분에 이상이 있고, 자신이 방금 전에 한 일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구매했던 복숭아 통조림을 또 구매하고, 자신이 왜 이 가게 안에 서 있는지 영문을 모른다.
모드와 그녀의 간병인 칼라, 그녀의 딸 헬런이 택한 방법을 무엇이든 적어놓기이다.
쪽지에 무언가를 적고는 보통 주머니 속에 넣거나 냉장고에 붙이는데, 이마저도 '적었다는 사실' 을 잊어서 문제가 된다.
이러한 모드의 습관은 마치 S. J. 왓슨의 소설『내가 잠들기 전에』에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 크리스틴이 매일 일어난 일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것과 같은 습관이다.
다만 둘이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리스틴은 일기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서 기억을 되집어가는 반면,
모드는 자신이 적은 메모가 어디 있는지, 혹은 발견한다 해도 언제 왜 적은 것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모드는 하루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메모지에 적힌 글귀들 - 이를 테면, 요리하지 않기, 외출하지 않기 - 을 일부러 무시하며 마음 속으로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지없이 우리가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의 정반대이다.
차를 끓여놓고는 금새 잊으며, 집 밖으로 나와 길을 잃어서 딸이 찾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의 기억도 깜빡깜빡하는 모드에게 어릴 적, 그 중에서도 수키 언니가 사라지기 전인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기억은 생생하다.
얼마나 정확하냐하면 각 장면을 그대로 이미지화해서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이다.
지하실의 창들은 벽돌로 막혔고, 환기를 위해 앞쪽에 창살만 질러져 있었다. 나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형부의 밴들이 서 있는 뒤뜰로 가보았다. 여기서는 개 짖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그 소리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움직여 마치 개가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서리가 내려 반들거리는 자갈 위에 밴 한 대만 서 있었는데,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제라드 이사' 라는 상호에 먼지가 쌓여 '라드 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제' 자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고 있을 때 위에서 뭔가가 약하게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낡은 마구간 창을 올려다보았다.
p. 76
어린 시절의 기억에 있어서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꽤나 상세하다.
그 시절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올라서 의사가 기억을 떠올리는 방편으로 사용하게 할 정도이다.
모드는 이렇게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손녀 케이티나 매장의 점원은 이해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며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보이도록 한다.
한 가지 괄목할 만한 점은 과거의 기억은 뒤죽박죽이 아니라 시간의 순서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이다.
마치 일일드라마를 보듯 '오늘은 여기까지' 그 다음엔 '다음 이 시간에' 가 연달아 나오는 셈이다.
모드가 부모님, 언니, 형부, 하숙인 더글라스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을 유독 잘 떠올리는 이유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의문점이 많이 들어 빈 공간을 메꾸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바로 수키 언니가 실종되기 전의 일상적으로만 보였던 일들이 할머니가 된 모드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니려고 한다.
- 미스 마플? 미세스 모드!
현재의 할머니 모드는 사라진 친구 엘리자베스의 일에 사로잡혀 있다.
어느날 발견한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Elizabeth is missing.)' 라고 적힌 메모지를 본 이후,
그렇게도 깜빡깜빡하는 그녀가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된다.
물론 때때로 자신이 누굴 찾고 있었는지 잊기도 하고, 심지어는 엘리자베스가 누구인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종이 의심되는 친구 엘리자베스를 찾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대단해서,
늘 퉁명스러운 태도의 엘리자베스의 아들 피터를 주요 용의자로 보는가 하면, 직접 실종 전단지도 접수하고 경찰서에도 간다.
경찰서에서는 거의 매일 오다시피하는 모드의 실종신고를 그냥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승강기가 멈춘다. 움직이기 싫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한참이나 서 있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나는 동그랗게 뭉친 화장지를 카펫에 떨어뜨려 내 자리를 표시해두고 층계참으로 걸어 나간다. 승강기는 텅 비어 있다.
p. 182
피터 내외 몰래 엘리자베스의 집 안에 들어와 숨어 있는 모드.
누군가 그녀를 발견한다면 영락없는 도둑에, 불법 침입자이자 엘리자베스에 집착하는 미친 할머니로 보일 게 뻔하다.
그런데도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여 계속해서 파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추리 소설의 대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 이 자꾸만 생각나는 건 오버일까.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 자리에 앉아서도 문제를 대번에 해결할 수 있는 총명한 미스 마플과는 달리,
자신의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겨워 보이는 모드이지만,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포기하는 그 의지 하나는 참으로 닮아 있다.
모두가 무시하고 모두가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겨도 자신의 소신을 갖고 나아가는 모드를 미세스 모드로 칭하겠다.
- 되돌아보면 이상한 점이 드러난다.
미세스 모드가 추리하는 건 현재의 엘리자베스 실종 사건뿐만이 아니다.
과거 그녀의 언니였던 수키의 실종 사건도 동시에 추리하고 있다.
모드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암시나 단서를 작가는 과거의 서술을 통해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나중에 더글라스가 영화를 보고 돌아왔을 때 내 이마에는 아직도 언니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립스틱을 문질렀다. 그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날 놀리면서 그 립스틱 색깔을 정확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빅토리 레드 (Victory Red).
p. 59
그들은 문간에 멈춰 서서 복도 쪽을 뒤돌아보았고, 경사는 바지에 묻은 케이크 부스러기를 털었다.
"저 청년을 보니 누군가가 떠오르는데." 그가 집을 나가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군지 생각이 안 나네요."
p. 127
순간 더글라스가 바로 그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그가 가방 옆면을 더듬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p. 179
더글라스는 자기가 본 영화에 대해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중략)
그는 경직된 몸을 내 쪽으로 휙 돌렸지만, 계속 신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p. 199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행동이나 발언들, 혹은 너무 어렸을 적이라서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 갑자기 떠오른다.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며, 연신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고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결국 우연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게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가끔은 창피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지곤 그 때의 내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기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100% 온전한 기억이라는 건 없다.
과거의 내가 느끼고 본 대로 기억하며, 그마저도 정확하지가 않다.
나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과거에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는가 하면, 그 땐 선명했던 사건들이 흐릿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수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간혹 최면요법으로 저편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나보다.
- 모든 것은 하나다.
자꾸만 과거에서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모드의 기억.
피터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없는 집에 방문하는 모드의 행동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수키 언니의 실종, 호박 씨를 어디다 심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집, 이 모든 건 하나였다.
모드는 부지불식간에 수키 언니 사건에 대한 큰 실마리를 제공하고 케케 묵은 사건이 해결된다.
엘리자베스 건은 별거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로 인해 수키 언니에게로 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불완전했던 과거의 조각들이 맞춰졌다.
이 소설은 매우 영리하고 매력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모드 할머니를 중심으로 흔한 치매 환자의 일상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실종사건' 이라는 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찌 보면 스릴러적인 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화자가 '느리고 힘 없는 노인' 이라 그런지 전혀 무섭지 않다.
편안하게 앉아 차 한잔에 케이크 한 조각 먹으면서 소설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