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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양치기의 편지 -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제임스 리뱅크스 지음, 이수경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영국
내가 아는 영국이란 나라는 옛날 신사의 나라,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방황하는 무서운 10대들로 유명한 영드 'Skins' 의 나라.
하지만 그 감성이라는 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과 잘 맞아서
영드 '셜록' 에서부터 영화 '노팅힐','브리짓 존스 시리즈' 까지 감동을 주는 나라이기도 하다.
영국에 다녀 온 친구가 한 마디 한 적 있다.
"미국 뉴욕 갔을 땐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는데, 영국 갔더니 정말 뭘 물어봐도 쌩~하니 지나가더라."
우리나라가 예전의 동방예의지국에서 이제는 노인을 경시하고 이기주의가 넘쳐나는 나라인 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영국은 내게 늘상 우울한 날씨가 만든 우울한 사람들과 맛없는 음식,
한 편 날 흥분하게 하는 EPL (영국 프로축구 리그)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영화로 다가온다.
그런 나에게 '영국 양치기의 편지' 라는 에세이는 영국에도 도시가 아닌 공간이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많은 산간 지대와 시골에 대관령 양떼 목장과 삼양 목장까지 있는데,
지구 저편 영국이라고 다를 바 있을까.
늘 읽던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기에 더욱 잘 알 수 있다.
현대 영국에서 양치기로 사는 게 어떠한지, 지금까지 양치기로 살아온 게 어떠했는지.
주인공이자 저자인 제임스 리뱅크스가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우리말로 하면 호수지역? 아니 호수마을이라고 해야 할까.
해외에서 온 여행자였다면 거의 알지 못했을 법한 도보여행의 성지로서,
이 에세이를 읽음으로써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그 속의 삶을 엿보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느 미국인이 우리나라의 고창을 그리 흔히 가 보겠는가.
내게도 마찬가지로, 언젠가 영국을 간다고 할 지언 정 갈 곳은 런던, 옥스포드, 리버풀 등으로 정해져 있다.
외국인들을 위한 여행책자 속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딱 그런 곳이다.
어쩌면 평생 가 보지도 못 할 곳을 책으로나마 알게 되어 기쁘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 는 그렇게 영국 속 또다른 영국을 보여주고 있다.
영문학
나는 대학 시절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순전히 '영어' 라는 언어가 좋아서 덩달아 영문학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리뱅크스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야말로 영국인이다.
그가 종종 언급하는 작가들이 내가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배운 바로 그 작가들이라서 반갑다.
누군가는 이 책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비교하였다.
대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겼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 역시도 그 의견에 동감하는 바이나, 아이러니한 것은 비교 대상인『월든』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거다.
미국의 월든 호수를 그리고 있는 책을 읽으면서 어찌나 지루하기 짝이 없던지, 보다 졸던 끝에 책을 덮어 버렸다.
총 503페이지를 견딜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영국 양치기의 편지』는 하루만에 다 읽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생각와 생활을 기록한 '에세이' 류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가하면 이 에세이 속에서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인물이 윌리엄 워즈워스이다.
그의 시 'My Heart Leaps Up' 은 학생들의 문제집, 영어교과서 중간, 심지어 모텔 객실 벽을 장식하는 유명 시가 되어 버렸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출신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1810년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볼 수 있는 눈과 느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해 즐길 수 있도록 일종의 국유재산이 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p. 21-22
윌리엄 워즈워스만큼 자연을 사랑하고, 직접 농장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지었던
현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대표시 중 하나인 'Mending Wall ' 은 저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비유적으로 쓰인다.
여덟 살쯤때부터 할아버지는 내게 돌담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셨다.
(중 략)
농장 일을 사랑했던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담장 고치기를 주제로 아름다운 시를 썼다. 프로스트는 담장이 튼튼해야 이웃 사이가 좋다고 노래했는데, 맞는 말이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고, 손자인 나도 그걸 깨달을 수 있길 바라셨다.
p. 77
학부 시절 담장을 쌓는 것이 과연 이웃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로버트 프로스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할 때
이웃과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 교수님과 학생들이 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로버트 프로스트는 중의적인 시를 잘 쓰는 시인이었다.
우리 학교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소설 『파리 대왕』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p. 126
『파리 대왕』이라고 하면 원서를 읽은 후 레포트 쓰고 시험까지 본 도서인데,
역자의 뒷받침 설명 없이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문학적 언급이 많다는 사실에 매우 기쁘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과 관련된 수많은 작가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단연 베아트릭스 포터다. 그녀는 힐리스 부인이라고도 불렸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양치기들을 몹시 존경했다. 그녀는 진 윌슨과 내가 흥정하는 과정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녀 자신도 양치기와 양을 거래하는 흥정을 해본 경험이 많으니까.
p. 333
베아트릭스 포터라면 내가 사랑하는 캐릭터 '피터 래빗' 을 그린 장본인이자, 영화 '미스 포터' 속 실제 주인공이 아니던가.
그저 작가인 줄로만 알았던 베아트릭스 포터가 양을 흥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니.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실제로 베아트릭스 포터와 피터 래빗을 주제로 한 베아트릭스 포터 월드가 있다고 한다.
참 세상은 내가 알면 알 수록 모르는 거 투성이이다.
할아버지와 소년
어느 이야기에서건 사랑스러운 주제라고 여겨지는 게 '노인과 아이' 이다.
노인은 세상을 많이 살았지만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어린 존재를 찾게 된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에서는 소년 제임스 리뱅크스와 할아버지 휴 리뱅크스가 그런 관계이다.
다른 동네는 어떨까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딱히 휴일도 없었다. 나는 늘 할아버지와 함께 목장 어딘가에 있었고, 하루 종일 할아버지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밤이면 할아버지네 침대에서 곯아떨어지곤 했다.
p. 90
소년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세상 전부였고 늘 대장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둘이 한 대 피운다." 는 농담을 즐겨하던 할아버지는 그에게 찬란한 햇살과 푸른 하늘로 넘실대는 여름이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철썩같이 믿고 따르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
최근에 본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이 떠오른다.
주인공 소년 제이크는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신비한 힘을 가진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와 돈독한 사이이다.
머리가 크게 된 후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의문점을 품기 시작하지만, 결국 다시 믿게 되었다.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나는 조금씩 더 힘이 세졌고 건초를 더 높이 들어 올릴 수 있게 된 반면, 할아버지는 점점 더 힘이 약해지셨다.
p. 105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는 다시는 일을 하러 나갈 수 없었다.
p. 142
할아버지는 이제 영영 못 돌아올 곳으로 가셨다. 할아버지 없는 내 삶이 전과 똑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p. 145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려워 했던 장면, 하지만 필연일 수 밖에 없는 장면이 나오고 만다.
소년에게 세상 전부였던 할아버지는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소년은 갈 길을 잃는다.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살아 온 나 자신 역시 절대로 겪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어린 손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길 즐겨하던 할아버지를 나는 절대 잃고 싶지 않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동안 아버지와 양치기를 하면서 의견 차이로 갈등하던 소년은
남자가 되어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한다.
할아버지라는 커다랗고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자라던 아이가 스스로 세상에 한 발 내딛기 시작한다.
관광지에 산다는 것
옥스포드 대학까지 간 '휘귀한' 양치기 제임스 리뱅크스는 대학 생활 후 다시 양치기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 놈의 낭만주의' 작가들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레이크 디스트릭트라는 관광지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며 살고 있다.
대학을 계기로 레이크 디스트릭트 밖의 삶과 소통할 줄 알게 된 그는 인기 트위터 계정을 소유하게 되었다.
나도 『영국 양치기의 편지』를 한국어로 읽었다고 그에게 트윗 날리니, 곧바로 리트윗해주는 발빠른 면모를 보였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을 한낱 휴양지로 여기며 찾아왔다가는 관광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딱히 내치지도 못했다.
중소규모의 목장을 소유한 양치기로는 안정되게 살기 힘든다는 걸 안 저자는 목장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을 병행한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처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지역들의 경제와 관련된 일을 하는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전문 고문위원으로서 일하며, 관광산업이 해당 지역 사회에 이익과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사람들을 거부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조금 더 자신의 공간과 모두에게 이로운 쪽을 찾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다시 말해, 레이크 리스트릭트를 보존하면서도 SNS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데,
잘 보존된 양떼 목장과 호수마을을 보려는 관광객들로 관광산업이 고용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다고 한다.
물론 관광지의 수익과 삶의 터전을 맞바꾼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택의 60~70퍼센트가 외지인들의 주말이나 휴가용 별장이라서, 많은 현지주민이 자기 동네에서 살 집을 구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현지 주민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듯한' 이런 현실을 떨떠름하게 여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지역에서 이제 우리가 소수집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어떤 곳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손님들이 손님 맞는 집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처럼.
p. 22-23
한 달 전 친구 한 명과 청주 벽화마을에 놀러간 적이 있다. 여러 예술가들의 벽화들로 예쁘게 꾸며진 벽돌담이 특징인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벽화마을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주의해 달라는 내용을 보니, 관광객들이 얼마나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나 알 수 있었다.
멀리 찾지 않고 인터넷 뉴스만 봐도 제주도가 중국인 관광객들 문제로 얼마나 속을 썩이는 지 알 수 있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의 양치기가 계속하여 자신의 본업과 전통을 지켜나가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