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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볼
브래들리 소머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피시볼은 제목 그대로 '세빌 온 록시' 라는 원룸형 아파트 27층 발코니 어항 속에 살던 물고기 이언이
모험을 찾아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일어난 거주민들의 에피소드들을 모아둔 것이다.
- 이언 : 단순함
수컷 - 이게 어떤 차이를 낳겠냐마는 - 물고기 이언은 '물고기는 3초 기억력을 지닌다.' 는 말이나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 혹은 '도리를 찾아서' 의 물고기들이
계속해서 누군가를 처음 본다고 생각하여 자기 소개를 끊임없이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언에게 조금 더 나은 점이 있다면 3초가 아닌 15분마다 기억이 재생성된다는 점 정도?
이언과 같은 물고기에겐 시간이나 공간이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언제나 행복하며 깊은 성찰이나 한탄이란 건 해 본적이 없다.
그러한 이언의 모습은 애인, 아기, 직업, 결벽증 등으로 고민하는 인간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언에게 어울리는 말은 Carpe Diem, 혹은 Seize the day이다.
늘 미래를 향해 내일을 위해 사는 인간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고 최대한 즐기라는 말은 사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오랜 시간 노력해도 그에 합당한 성과를 얻거나 대가를 받기 힘든 상황에서는
어떻게 현재를 즐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이언처럼 늘 그래왔다.
내일도 중요하지만 다신 못 만날 오늘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최대한 즐겼다.
남들이 "괜찮겠어?" 라고 물어보는 도전을 해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떠났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좀비를 피해 달린 적도 있고, 밤새 클럽에서 춤추고 한 숨도 못 잔 다음날 아침 바로 일 한 적도 있으며,
정말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땐 상사에게 가서 하소연하고,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중학생 때는 김동성과 안톤 오노 사건으로 열이 받아 IOC와 국제빙상협회에 정중하지만 동시에 단호한 항의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물론.. 이렇다 할 해결책이나 친절한 말로 가득찬 답변은 못 받았지만...)
이언은 말한다. 생각을 줄이고 행동하라고.
그의 말은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두 번 더 생각해라." 라고 말하는 인간들의 그것과는 정확히 반대된다.
이언이 전적으로 옳진 않지만, 그래도 항상 틀린 건 아니다.
비록 어항 속 물고기의 말이라도 때때로 귀 기울일 필요는 있는 법이니까.
이언이 말을 할 줄 안다면 "계획을 세우는 건 실패를 향한 첫걸음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p. 18
아무런 생각없이 사는 것 같은 이언은 '멍청하게' 숨만 뻐끔뻐끔 내쉬는 다른 물고기들과는 다르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10년 이상 오래 사느니 모험이 낫다고 생각한다.
뛰어 내리는 게 물고기가 하는 타당한 행동이라 생각하면서 이를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소설 '갈매기의 꿈' 에서 조나단과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려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고
제자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쳐 준다는 데 반해,
물고기 이언은 27층에서 떨어져서 또 다른 '어항' 인 '스포츠물병' 안 물 속에 안착한다는 것이다.
물 없이 살 수 없는 물고기에게는 이 또한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겠지.
- 다르다는 것 = 외롭다는 것?
이언이 아파트 발코니 어항에서 곤두박칠치기 전에, 치는 동안, 친 후에 과연 세빌 온 록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가 찰나의 순간을 경험하는 동안, 인간들은 고장난 엘레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세빌 온 록시 거주민 중에 대가족은 없다.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건 그저 동거하는 애인 관계의 2인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원룸 형태의 아파트라서 다들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지닌 채 살고 있다.
세빌 온 록시를 관리하는 히메네스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관리인이다.
여자들에게도 인기 없는 그는 그림으로 치자면 주인공 뒷 편 배경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심지어 육감적인 미인 케이티를 보고도 사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제대로 된 친구도 가족도 없는 그에게 남은 건 외로운뿐이다.
히메네스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건 외롭기 때문이다. 집에 가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늦게까지 일하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일을 하고 있으면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처럼,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p. 36
공사판에서 일하는 가스는 자신의 큰 덩치와 위협적인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걸 잘 안다.
그는 케이티 옆을 비껴 갈 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온화한 표정도 지어보고 말도 걸어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의 외모와 그에 상반되는 취향은 더욱 더 안으로 내몰고 있다.
스스로에게 여자가 되고 싶다거나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합리화시키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여장남자가 되는 걸 좋아한다.
시작은 우아한 여자 드레스를 입는 것으로 했겠지만 그 끝은 성전환수술일 지 누가 알겠는가.
8층에 살고 있는 클레어는 성인 전화를 받는 일을 하는 결벽증을 가진 은둔형 외톨이이다.
처음부터 그녀가 아파트 밖에 나가지 않았던 건 아니었고, 큰 실망감이 심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20대 후반,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육아와 대출금이라는 부담을 안고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가자 사는 게 별로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평생 변치 않는 따스한 우정과 동지애 대신 공허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끊어질 유대라면, 그렇게 쉽게 시들어버릴 우정이라면, 그녀에겐 필요 없었다.
p. 55
마구 마구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지금 내 주변에도 국가시험을 준비해서 연락이 끊겼다가 합격한 다음에는 일이 많다고 연락이 없는 친구,
결혼한 다음 두 아이와 남편이 세상 전부가 되어 친구들에게는 연락을 일체 하지 않는 친구 등
다양하게 절교 신호를 보낸 친구들이 있다.
매우 실망스럽지만 동시에 그리 신경쓰이지 않는 건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허먼은 자신이 순간이동을 한다고 믿으며 과학을 좋아하는 소위 'geek' 으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의식을 잃는 허먼은 할아버지에게 홈스쿨링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는 진짜 혼자가 된다.
이런 네 명의 각기 다른 외로움은 서로가 서로를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만남으로써 해결되는 듯하다.
자신의 집 싱크대를 고치러 온 히메네스 뒤에서 드레스를 입고 말을 거는 가스.
가스 앞에서 히메네스 역시 늘 숨기기만 했던 자신의 꺼풀을 벗기고 둘은 춤을 춘다.
히메네스와 가스는 서로가 있음으로 지금껏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한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임산부인 피튜니아 딜라일라는 허먼과 클레어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함께 사는 애인 대니는 일하다 지나가는 여자 - 이 경우에는 특히 케이티 - 를 보고 야한 상상을 하는 그런 남자이다.
산통을 심하게 느끼고 아이를 낳으려는 순간 대니는 일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한다.
양수가 새어 몸을 질질 끌고 복도로 나온 그녀의 눈에 띈 건 의식을 잃은 소년 허먼이다.
그녀는 허먼까지 질질 끌고 가 도통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던 클레어가 처음으로 문을 열고 사람을 들이게 한다.
119 신고센터 상담원과 통화를 하던 클레어는 상대편이 자신의 성인전화 고객인 제이슨이라는 걸 알고 둘은 만날 약속을 한다.
피튜니아 딜라일라는 자신의 배에서 아기가 나오는 걸 도와준 허먼을 가족처럼 생각하기로 한다.
임산부의 처절한 고통은 다섯 명을 동시에 연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 사랑, 사랑?
케이티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타입인데 남자보는 눈은 그리 없는 듯하다.
그래도 사랑에 빠지는 건 그녀 최고의 능력으로, 요새는 남자친구 코너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코너 래들리는 여성들과 육체적인 관계 하는 걸 좋아한다.
변태적인 취향의 데브와 관계를 맺는 것도 황홀하고, 양성애자인 페이와 관계를 맺는 것 역시 좋다.
그런 그에게 최근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한다.
휴대폰에 있었던 데브와 페이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케이티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아무래도 자신의 원룸 아파트 안 여기저기 남아 있는 케이티의 흔적을 보고 느낀 게 있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머그잔은 케이티가 선물해준 것이다. 다른 여자들이 아닌. 그녀는 티셔츠와 단추와 스티커에 색다른 무늬를 찍어주는 전문 가게에서 컵을 저렇게 만들어왔다. 이언 역시 케이티의 선물이다. 그가 노인들만 있는 동네에서 개와 함께 외롭게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고기를 사온 것이다.
p, 131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 차를 끓였다.
이제, 소금밭 같은 흔적을 남긴 얼그레이의 남은 찌꺼기에서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의 이런 단편들이 항상 그의 주위에 있다.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p. 132
집으로 찾아온다는 케이티의 전화를 받고 집을 치워야겠다고 느끼고 페이와 함께 있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코너는
자신이 진정으로 케이티를 사랑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녀는 코너를 웃게 하고 이야기하게 하는 존재이며, 그의 잘못을 후회하게 만드는 여자이다.
그는 살면서 이토록 확신이 든 적은 없었다.
케이티와 평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데브를 버릴 수 있다.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닐 수도...... 데브와 페이는 보통 여자들이 아닌데, 포기할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처음 생각으로 돌아간다. 케이티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가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해준다면, 그리고 그녀도 그를 사랑해준다면, 데브와 했던 것들을 케이티와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분명 사랑에는 희생만큼 보상도 따르는 거니까.
p. 192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이다. 궁합만큼 속궁합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케이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동시에 다른 여자들과의 잠자리를 비교하며, 케이티에게도 변태적인 성행위를 요구할 생각을 해 본다.
코너는 살면서 이토록 확신이 든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순간의 확신일 뿐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건 절대 바뀌지 않는다. 결국 그는 다시 바람을 필 테고, 좀 더 새로운 관계를 찾을 것이다.
케이티가 코너의 사과와 눈물에 넘어가지 않은 건 정말 잘 된 일이다.
이언에게 생각이 없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다.
늘 계획을 세워야 하고, 계획한 대로 일을 해나가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경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의 성적 취향을 고민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게 틀린 일은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아이를 낳는 순간엔 그동안 나를 잘 돌보지 않은 남편이 죽일 듯이 밉다.
이런 저런 귀찮은 일과 생각을 겪어도 되지 않는 이언은 정말이지 축복받은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