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되돌아 볼때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던 일제 강점기가 지나고 찾아온 시기에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또 다시 주변국가와의 영토문제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으로 우리의 역사는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광복의 기쁨 속에 우리 민족은 정부 수립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이 우리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분할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고 싶었고 미국은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에 반대해 남북으로 나누어 통치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가 실행 되었고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부를 세우고 싶었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우리 민족 내부에서도 입장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에 혼란한 상황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했고 북한에 있던 소련군도 철수한 가운데 북한은 남한까지 공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군사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한을 침략했습니다. 기습적인 북한의 공격에 정부는 부산을 임시정부로 내세우고 국민들은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습니다. 낙동강 유역 부근까지 내려온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수밖에 없었지만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을 되찾고 북한군을 몰아낼수 있었는데 중국군의 개입으로 치열한 전쟁은 끝날줄 몰랐고 너무나 큰 피해 속에서 휴전이 선포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국민들을 돌보지 않게 되자 나쁜 경제 상황과 실업에 지친 국민들의 불만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4.19 혁명으로 점점 더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 되었고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뀌는 계기가 마련 되었습니다. 5.16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가지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경제개발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 국토 곳곳이 황폐해져 농사도 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굶주림속에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재정 상황도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원조로 우리나라 경제는 도움을 받을수 있었지만 미국에서 들어오는 농작물에 농민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세계가 놀란 경제발전을 이룰수 있었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놀라운 발전을 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의 아픔을 겪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는데 이제는 통일을 준비해야 할때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마무리 합니다.
1910년 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경술년에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경술국치라고 불렀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국적이 사라진 우리 민족은 일제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한다는 명목하에 우리나라의 토지를 조사했는데 이것은 효과적인 수탈을 위한 식민지 경제 체제의 수립이 사실상 목적이었습니다. 결국 토지조사 사업은 소유자가 확인되지 않은 토지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이 나라에 정착하는데 이 토지들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서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3.1 운동이 되었고 그렇게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독립운동은 일본의 무지비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나라를 잃은 민족이 당할수밖에 없었던 아픔이라는 것을 지금도 고스란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3.1 운동이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결국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강했지만 그것을 이끌어 갈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이 일제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을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다른 정책으로 우리 민족을 분열 시켰습니다.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고 식민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고자 교묘하게 만들었습니다. 한쪽은 독립을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문화통치를 받아들이자는 사람들의 대립으로 우리 민족은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일본은 세계대전을 발판으로 공업화를 빠르게 진행시켜 연합군에 공업제품을 수출해 그것을 발판으로 경제를 성장시켜 나갔습니다.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숨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일제에 보여준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또 한번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나뉘어져서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걔속해서 우리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으로 괴롭혔지만 우리는 그에 맞서 싸워 나갔습니다. 일본이 잔인하게 우리를 탄압해도 독립을 향한 우리의 의지를 꺽을수는 없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고난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꿋꿋하게 버티어 저항했지만 일본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가운데서 우리 민족은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
개항기는 우리 역사에 가장 비극적이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세계적으로 식민지를 만들어 억압과 탄압을 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도 찾아온 일본의 침략은 너무나 슬픈 역사로 지금까지고 해결되지 못한 아픔으로 기억되고 남아 있습니다. 19세기에 조선 해안으로 몰려드는 서양의 배들 그 시절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서양에 졌다는 놀라운 사실로 인해 조선은 서양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천주교, 동학사상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항거하던 농민들의 봉기까지 일어나게 했고 국내외적으로 조선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권력을 잡고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체제를 정비해 나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프랑스의 목적은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목적이 맞지 않은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통상요구가 거부되자 약탈과 도굴 심지어 살인까지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양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더욱더 강하게 밀어 부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책이 서양을 물리칠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통상수교 거부는 결국에는 서양의 좋은 문물을 배우지 못하게 하였고 고립하는 정책은 주변국 정세를 놓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적 의도가 있었던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에게는 너무나 불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청난라와 일본의 텐진조약은 청일 양국이 조선을 사이에 놓고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이런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던 조선의 외교능력은 열강들에게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차지하고 싶은 매력적인 식민지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렇게 조선의 근대화는 걸음마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을때 일본은 조선 침략이라는 야욕을 숨기면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에 자유로울수 없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최제우에 의해 만들어진 동학 사상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세상과 백성을 구원한다는 뜻을 가진 동학사상은 민중들에게는 종교 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동학농민봉기를 수습한다는 핑계로 일본군의 조선파견과 경복궁 무단침입으로 명성왕후 살해 사건을 통해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항기에 세계는 격동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로 밖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일들은 우리의 역사에 잊을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다른 역사에 비해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의 정치상황과 사회적인 면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문화와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 나갔는지를 되돌아 볼수 있는 술술 한국사 조선 시대편을 통해 조선시대를 살펴 봅니다. 고려말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왕조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를 제거하고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세력을 바탕을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을 근본으로 유교정치 실현을 하나의 목표로 세우고 개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군인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인물로 집현전을 통해 유교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16세기에 이르자 중앙에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나뉘어져 서로 자신들의 세력을 앞세워 권세를 누리기 위한 당파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계유정난, 갑자사화가 일어나 피바람을 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두차례의 사화는 연산군을 왕좌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연산군 이후에 집권하게 된 중종은 혼란한 사회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에 유교정치를 위해 노력했고 조광조는 사림파의 지지속에서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했고 그렇게 조선의 개혁은 좌절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구는 줄었고 토지는 황폐해져 국가운영에 많은 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약탈되고 파괴되었습니다. 나이 어린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서 더욱더 혼란에 빠지게 된 조선은 세도정치 속에 환곡제도는 악성고리대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힘든 생활을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탐관오리를 비방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기 전에도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음모와 부패가 심했는데 그런 상황을 파타하기 위해 이성계가 세운 조선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오랜 갈등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속에서 백성들은 점점 삶이 힘들어졌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백성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이 우리의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자세하게 조선을 알수 있는 기회를 통해 드라마속 이야기가 아닌 상세한 우리의 역사를 알수 있었습니다.
통일 신라의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한 가운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신라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등을 돌리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부의 부패 속에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견훤과 궁예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견훤과 궁예는 후백제와 후고구려 세워 중앙정부의 부패에 저항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민심을 잃게 되었고 궁예의 뒤를 이어 나타난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려로 나라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신라에 이어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었는데 고려는 발해의 백성까지 받아들이는 포용정책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분열되었던 민족이 비로소 통합되는 결과를 이룰수 있었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때 도왔던 지방의 호족세력이 막강해지자 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기인제도는 호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호족의 자제를 일종의 볼모로 데려와 개경에 거주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태조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왕위쟁탈전에 관한 이야기는 드라마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데 치열했던 왕위 싸움에서 정종이 왕으로 추대 되었고 그후 즉위한 광종에 의해 실행된 과거제도는 호족세력을 관직에서 밀려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제도를 통해 왕권이 강화 되었고 호족세력을 약화시킬수 있었습니다. 고려사회의 또 하나의 병폐였던 문벌귀족들은 가문이 좋은 집안끼리 결혼을 해서 막강한 세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중 한명인 이 자겸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그것이 바로 이 자겸의 난으로 왕권까지 넘봤던 이 자겸이 척 준경에 의해 제거된 사건입니다. 이 자겸의 난은 문벌귀족들이 엄청난 권력에 대한 욕심을 엿볼수 있는 사건으로 우리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문신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만 갔고 결국 문신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던 무신들은 문신들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 많은 문신들이 무신들에 의해 죽게 되었고 의종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신정권은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이던중 무신정권을 좌우하던 이 의민의 죽음으로 한풀 꺽이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 너무나 많은 문신들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다른 나라의 많은 침략을 받은 기록이 있는데 그중 몽골의 침략에 맞섰던 삼별초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몽골의 무리한 요구에 맞서 몽골군에 항복한 정부를 대신해 끝까지 저항하는 용감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려시대가 만들어지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회유하고 압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몰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만들어질때 수 많은 인재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볼수 있었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잔인한 권력의 소용돌이를 엿볼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역사에 너무나 많은 주변국가의 침략이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그런 일이 없었다면 현재의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