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개정판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인연(因緣)을 읽고서···.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因緣)을 샘터 200152쇄로 다시 펼쳤다. 첫 독서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흐른 뒤에 다시 만난 이 책은, 같은 문장임에도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젊은 시절에는 관계를 스쳐 가는 우연쯤으로 받아들였다면, 육십 중반에 이른 지금의 재독은 인연을 시간과 선택, 책임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필연으로 읽게 한다. 독서가 삶의 이력과 함께 깊어진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피천득의 문장은 여전히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태도는 오늘날의 과잉된 언어 환경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신뢰를 준다. 이번 재독에서 새롭게 인식된 것은 그 담담함이 결코 체념이나 냉소가 아니라, 삶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온화한 수용의 태도라는 점이었다. 젊은 날에는 그저 맑다고 느꼈던 문장들이, 이제는 오래 견디며 살아온 사람의 숨결처럼 읽힌다.

 

특히 인상적인 사실은 이 수필들이 결코 청춘의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수필을 감성적이고 가벼운 장르로 오해하기 쉽지만, 피천득의 글은 서른여섯이라는, 이미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시점에서 비롯된 사유의 결과물이다. 삶의 무게를 어느 정도 감당해 본 이후에야 가능한 절제와 거리감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다. 오늘날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서른 중반은 이제 막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시대 감각으로 다시 읽을 때, 피천득의 중년성은 더욱 또렷이 다가온다. 그의 수필이 지닌 성숙함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날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263>

 

작품 전반에 스며 있는 시대의 결 또한 이번 재독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상이 수필 곳곳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 개인의 일상이 곧 시대의 초상이 된다. 과거에는 배경처럼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제는 애잔한 역사로 다가오며, 거창한 설명 없이도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딸에 대한 사랑 역시 이번 재독에서 가장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젊은 시절에는 다정한 가족애로 읽혔던 대목들이, 이제는 부모의 자리에 서 있거나 그 자리를 가까이서 바라보는 나이의 독자에게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과 함께 찾아오는 거리감,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애정과 절제된 슬픔이 과장 없는 문장 속에 고요히 담겨 있다.

 

유선전화에 얽힌 에피소드들 또한 인상 깊다. 전화 한 통을 위해 몇 년을 기다려야 했고, 전화선이 놓이는 일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던 시절의 풍경은 오늘날의 즉각적인 소통 문화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통화 한 번에 담긴 설렘과 긴장, 오해와 해프닝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느린 시간 속에서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겼던 인간적 리듬을 복원해낸 기록처럼 읽힌다.

 

<"세월은 충실히 살아온 사람에게 보람을 갖다주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다." 299>

 

인연에 등장하는 관계들은 대개 소박하다. 스쳐 간 사람, 오래 머문 사람, 이름조차 흐릿해진 인연들이 조용히 지나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인생을 지탱하는 것은 거대한 성취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소한 관계들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피천득은 이를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 설명이 없기에 독자는 자신의 기억을 불러와 그 여백을 채우게 된다.

 

또한 헤어짐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노년에 접어든 독자에게 특별한 위로를 건넨다. 그는 상실을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떠남 역시 인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남겨진 쓸쓸함마저 삶의 결로 인정한다. 그로 인해 독자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후회보다,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감사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인연(因緣)은 빠르게 소비되는 감정이나 극적인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숙성된 정서를 건네며, 인연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대하고 때가 오면 조용히 보내는 것임을 일러준다. 20여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읽은 이 수필집은 독자의 나이만큼 깊이를 더하며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오래되었으되 결코 낡지 않은, 개인의 기억과 시대의 시간이 겹쳐지는 여전히 현재형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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