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백록담에서 한바탕 맴돌이질 친 바람이 산줄기를타고 내리며 나뭇잎들을 떨구기 시작할 즈음이면 백두산 언저리북쪽땅은 벌써 얼음이 꽁꽁 얼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 P9
‘야산‘이라고만 싸잡아 불리었다. 그 수없이 많은 산들은 그냥 땅만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품었던 물들을 골짜기 골짜기마다 흘려보내고, 그 물줄기들은 서쪽으로 흘러내리며 서로 합쳐지고 모아져 나머지 3할의 들녘들을 적셔주는 크고 작은 강들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 자연의 조화를 따라 까마득히 먼 세월부터 사람들은 삶의 터를 일구어왔다. 그 역사를 셈하여 5천 년, 그 무리를 일컬어 한민족이라 하였다. - P10
백두산이 담아 인물을 ‘천지‘라 하였고, 한라산이 담아 인물을 ‘백록담‘이라고 한 것이다. 그 두 이름이 갖는 공통점은 ‘하늘‘인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못‘이라는 뜻인천지에는 절대한 존재인 하느님이 막연하게 상징되고 있는 데 반하여 ‘흰 사슴의 못‘이라는 백록담에는 하늘에만 산다는 하얀 사슴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터라서 그런 이름이 지어진 거라는 사연이었다. - P11
울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슬픔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칠월칠석 즈음에는 계절적으로 비가 많은 때이고, 또 견우와직녀가 밟고 오가는 탓에 까치들의 머리털이 빠진 것이 아니고 칠월칠석을 고비로까치들은 털갈이를 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들을 유심히 관찰해내서 전설에 접합시킴으로써 하늘과 만상과 윤회법칙을 일깨우는 한편, 이야기의 생동적 실감을 송두리째 획득해 내는 이중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 P14
제비가 나락에 기생하는 여러 해충들을 잡아먹는 길조라면, 까치는 나무들에 기생하는가지가지 해충들을 잡아먹어 산림을 돕는 길조였다. 까치에 비해까마귀를 흉조로 꺼리는 것은 그 식성이 육식이어서 사람의 시체까지 뜯고 덤비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까치는 부부애가 돈독해 사랑의 아픔으로 가슴앓이하는 견우와직녀 부부를 만나게 해주는배역을 맡기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또한 그 부부애는 원앙새 다음으로 윤리의 규범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 P15
이렇듯 철저한 논리성과 과학성을 바탕으로, 삼라만상과 인간의관계를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키면서, 인간의 하늘에 대한 의문과경배를 가슴 저리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엮어낸 이런 완벽한 전설이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 있는가. ‘세계적‘이라고 가치부여를 하는 그리스 신화에도 그런 요건을 고루 갖춘 이야기는 없다. - P15
"편제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군대에 대하여 당우위를 지키기 위해서요. 그리고 비상시 위기상황 속에서도당이 당중앙과 모든 연락이 두절상태에 빠졌을 때도당의 결정은 곧 당중앙의 결정으로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 P25
‘빨치산은 먹이도 무기도적으로부터구한다. 적의 무기로 적을 무찌르는 것이 빨치산이다. 그는 이 빨치산의 기본 투쟁방법을 다시금 가슴 한복판에 말뚝으로 박았다. 할정도밖에 안 되는 무장을 5할, 6할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도 투쟁을치열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 P30
이학송은 강한 울분과 혐오를 느꼈다. 인천상륙작전 때 민간인대피를 예고하지도 않은 채 그리도 무지막지하게 폭탄을 퍼부어대위로는 불바다를 만들고 아래로는 피바다를 만들며 인간살육을자행했던 자들이 국경선에 와서는 눈속임의 잔꾀를 부리고 있었던것이다. - P34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은 예리하게 날을 세운 얼음조각들이나 날카로운 칼날들을 품고 있었다. 그 혹독하게 맵고 독한 바람은 줄기차게 불어닥치면서 온몸을 따끔따끔 쏘아대다가, 갈가리 찢어대는가 하면, 속살을 후벼팠고, 끝내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그런 바람을 맞받으며 걷자니 숨은 숨대로 막히고, 몸은 몸대로 얼어붙었다. 얼굴이며 손발은차츰 마비증상을 일으켰다. 거의가 남쪽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상상조차 할 수 없는 칼바람이었고, 혹독한 추위였다. 그리고 그들의 옷은 그런 추위를 막아내기에는 어림도 없게 허술했다. - P37
아아 만주, 말로만 듣던 추위가 바로 이런 것인가. 11월 중순 추위가 이 지경이면 정작 1, 2월 추위는 어떨 것인가. 그는 이를 악물고 걸으며, 이런 땅에서 독립을 찾겠다고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이제 여기를 왜 왔는가. 민족해방을 위해서・・・・・・? - P37
그래, 역사의 바른 편에 서고자 했던 의지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니냐 역사는 당장 손에 잡히는 실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 P37
명분으로 장개석과 화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홍군은 깃발을 내리고 장개석 군대의 제8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 명분은 당당하고떳떳한 것이었습니다만, 세상은 그 사실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장개석이 승리감에 도취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들이나 세계의 눈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이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표피관찰이었죠." - P46
그 정신에 제국주의적 훼손을 입거나 무슨 병이 들겠습니까? 저사람들에게 트럼프라는 건 그저 오락의 재미를 주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저것보다 더 여러 가지 묘미를 주는 어떤 도구가 생기면 그들은 트럼프를 미련 없이 팽개쳐버릴 겁니다. - P47
그런데 겉에 드러난 그런 하찮은 현상을 가지고 그들의 기본적인 정신상태나 의식문제 같은 걸 판단하려고 의미확대를 하는 건 위험천만한 병적경직이고, 편벽된 아집이라 그겁니다. - P47
그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들이 화투를 즐기는 것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느니, 식민지시대를 그리워한다느니, 하는 식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우를 범하는 일입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화투를 친다고 해서 어디 일본놈들에 대한 증오나 원한이 약해집니까?" - P47
만주의 눈이 어느 한 많은 여인의 사무침처럼 진하게 내리고 있었다. - P48
"그렇소. 나 강진이오. 동무는 어디요?" 이학송은 반갑게 말했다. "전 벌곱니다, 보성 옆에 있는…………" "아니, 벌교!" - P49
이학송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커졌다. "벌교를 아시는군요." 젊은이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알고말고요. 혹시 김범우라는 사람 아시오?" "네에? 김범우 선생님…… 그, 그분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분은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반갑소, 나 이학송이라고 하오." 이학송이 젊은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는 정하섭이라고 합니다." - P50
"저어, 회의석상에서 인민군이 국군보다 낫다는 내용의 발언을했지요?" "뭐라고요!" 심재모는 머리가 쿵 울리는 충격을 느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또 모략의 그물에 걸렸다는 것을 느꼈다. - P56
북상전진에 따라 징병지역이 확대되면서 훈련소가 여러 곳에 생기게 되었다. 심재모는 부산을 떠나 대구 근방으로 이동하면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 빠른 진급은 전시라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않았다. - P57
군인을 양성해 내는 훈련소를 그만큼 중요시한다는 증거였다. 진급이 나쁠 것은 없지만 최전방에서 사투를 하고 있고, 죽어가는 장교들을 생각하면 꼭 마음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을수행하기 위해서는 훈련소가 인체의 심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사실이었지만, 거기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최고의 안전도를 보장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혜택이라면 최고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 P57
그런 탓으로 사병이든 장교든 줄을 타고 훈련소로 파고들려는 뒷공작이 치열했고, 기왕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밀려나지 않으려고 또한 뒷공작이 치열했다. 그래서 인사참모는 물론이었고 그 아랫사람들까지도 줄줄이 돈방석에 앉아 있다는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 P57
군수품 빼돌려 팔아먹는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듯이 훈련소 인사관계의 부정도 군부타락의표본 중의 하나였다. - P57
평소부터 군대 안에서 마구잡이로 자행되고 있는 구타에 대해 심한 혐오감과 함께 심각한 문제로 생각해 오고 있었는데다가, 참모들의 어물거림이 유소위가 가진 소위 빽 때문인 것을알게 되자 심재모의 태도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것이었다. 심재모는 참모회의에서 정식으로 그 문제를거론하고 말았다. - P58
"맞아요. 조선놈은 때려야 말을 들어요." 누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심재모는 허리가 꺾이는 것을 느꼈다. 그건 학병에 끌려가서 일본놈한테 진저리쳐지게 들었던 말이었다. 심재모는 그때서야 좌중의 다섯 명 모두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 P60
"다 좋은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군대는 일본 군대가 아닙니다. 우리 군대는 체제는 미국식이면서 운영은 일본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체제가 미국식이고, 무기도 미국 것이면 그 운영도 미국식으로 해서 폭력행위를 근절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일본식으로 폭력을 쓸 것입니까. 미국군대는 폭력 없이도 잘만 돼나가고 있습니다." "거 자꼬 미국식, 미국식하지 맙시다. 우린 어디까지나 엽전이오, 엽전." - P60
"소령님의 뜻을 알겠습니다만, 그 말은 듣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발이 나한테 안 들어오고 특무대로들어갔을 경우에도 그 말의 해석이 똑같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아닙니까?" - P61
그러나 심재모는 이내 그 생각을 눌렀다. 군대에 들어와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해내고 있는 몫은 엄연히 있었던 것이다. 그 몫이나마 지켜나가는 것이 돈만 버는 장사보다는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P63
그나마 자신이 있기 때문에 부대원들은 맞지 않고 군대생활을 하는 것이고, 자신이 진급을 해감에따라 그 숫자는 점차로 늘어났던 것이다. 그 몫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군대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소임이라는 것을 그는자각하고자 했다. - P63
"할로, 할로, 쪼코레또 기브 미이" "할로오, 짬짬 껌 헤브 예스?" 찬 바람 속에서 아이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미군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니미씹이다." 미군 하나가 감자를 먹여대며 소리쳤다. "궁뎅이 얼마입니까." - P63
공교롭게도 40년 만에 내습한 한파라고 했다. 평안남도 이북지역의 추위는 계속적으로 영하 20도를 밑돌고 있었다. 기온이 낮을뿐만 아니라 매서운 바람이 끊임없이 불면서 사흘거리로 눈까지퍼부어대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한층 더 낮았다. - P64
북쪽에서 몰려오는 그 추위와 강풍의 응원이라도 받듯이 인민군과 중공군들은 무서운 기세로 몰아닥치고 있었다. 날이갈수록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국군과 미군의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인해전술‘이란 말이 무슨 전염병처럼 전선마다 퍼져나가면서 병사들은중공군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 P64
‘인해전술에 걸리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 중공군들은 마술로 사람을 홀려 정신을 뺀 다음에 몰살을 시켜버린다. • 중공군들은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500리를 간다. 그런 종류의 말들이 수도 없이 진중에 떠돌면서 병사들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그 황당한 것 같은 말들은 특히 미군들 사이에서 번창하고, 공포스러운 신뢰도도 컸다. - P65
김범우가 보기에는 더 중요한 심리적 요인이 있었다. 그 두 가지에앞서서, 국군이나 미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함으로써 전쟁에 이겼다. 고 마음을 다 풀어버린 점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상대는 반격을 위한 총력전을 전개하려고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 현격한 차이로부터 다시 시작된 전쟁에 계절적 조건이 이익과 불이익으로 첨가되고 있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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