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대국이야. 정말 무서운 대국이야. 조선, 미개한 조선은 당할 수밖에 없어. 일본에 비해 무엇이 하나 제대로 돼 있는 게 있는가 독립투쟁?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호랑이하고 토끼 싸움이지.
그렇지, 저 기선하고 저돛단배꼴이지. 그래, 딱 저거야. 저게 맞부딪치면 어떻게 되나. 독립 털끝만큼도 가망 없는 일이야. 일본의보호를 받으며 개명 발전해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인데 왜 그걸 모르는 것일까. 그래, 그놈들이 일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대국인지 그 본체를 몰라서 헛꿈들을 꾸고 있는 것이지……… - P9

아니야, 난 조선놈이 아니야 병신 같은 조센징이 아니야. 난 일장기 앞에서 벌써 몇 차례 황국신민 맹세의 예식을 치른 몸이야 난이미 일본사람이야. 일본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거야.
양치성은 불현듯 솟은 조선사람이라는 열등감을 뿌리치며 이렇게 스스로를 일깨우고 다짐하고 있었다. - P11

나남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식으로 꾸며졌다고 했다. 나남은 그야말로 군대가 중심이고 군인이 주인인 도시였다.  - P14

송수익은 그들을 교당 안으로 안내했다. 교당이라고 해야 규모가 조금 큰 초가일 뿐넓지를 못했다. 그러나 막힌 데 없이 트인 방안은 넓어 보이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방 안에는 고요와함께 엄숙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 종교적 분위기는 맞은편 제단 위에 모셔진 단군의 영정이 자아내는 것이었다. - P20

대종교에서 그렇듯 조직활동을 강화한 것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총독부는 작년 10월 1일에 종교통제안을 공표하였다. 모든종교는 총독부에 소정의 서류를 제출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다음부터 활동하라는 규제법령이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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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시대라고 불리는 고대에는 더욱 그러했지만, 기독교 교회는 신앙을 끝까지 지키면서 죽은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사도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바티칸에 세워졌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 • 산 조반니 교회와 더불어 로마의 4대 교회의 하나로 꼽히는 산 파올로(성 바오로) 교회도 ‘푸오리무라‘ (성벽 밖)라는 호칭이 보여주듯 사도 바오로가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성밖 가도 옆에 지어졌다. - P17

 전부터 라테라노 지구라고 불린 이곳에는 콘스탄티누스와 권력투쟁을 벌인 끝에 패배한 막센티우스 황제 휘하의 기병군단 막사가 있었다. 기독교 반대파이기도 했던 정적의 세력 기반을 파괴하고 그 터에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것은, 보기 드문 정치적 인간인 콘스탄티누스가막센티우스를 지지했던 로마 민중에게 승자로서의 자신을 과시하는행위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1년 뒤 공포될 ‘밀라노 칙령‘의 전주곡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 P18

‘아비뇽 유수‘가 끝난 뒤에는 교황의 처소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으로 옮겨진 모양이지만, 그래도 로마의 주교좌 교회라는 라테라노 교회의 지위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로마 주교이고, 지금도 이 겸직 상태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새로 선출된 교황이맨 처음 찾아가는 곳은 라테라노 교회다. - P19

CHRISTUS VINCU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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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바는, 각 개인의 용기와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아무리 사회적, 경제적 개선책을 찾은들 다 뜬구름 잡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P125

이처럼 도덕은 세가지 사항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번째,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번째,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 또는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번째,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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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즈음의 지중해 서쪽에서 로마제국은이름만 남아 있었다. 그 빈 공간으로 제국 경계 바깥에 살던 게르만족이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 침입자 또는 이주민 집단들은 현지인들과섞여 자연스레 크고 작은 국가들을 형성했다. 이제 그들은 외부인이 아니라 유럽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중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P367

로마제국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운 존재는 게르만족 말고도 또 있었다.
그리스도교다. 특히 고대 로마의 지적 유산과 제국 경영 노하우는 교회가계승하고 있었다.  - P368

15~16세기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사이에 있는 천 년은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혹은 근대)중간에 낀 과도기에 불과했다. 중세middle ages 라는 명칭에도 이런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엄밀히 말하면 ‘중세‘라는 시대 명칭과 구분 방식은 서유럽의 사정만을 반영하고 있다). - P369

유럽사에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476년엔 라벨나에 틀어박혀 있던 서로마제국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고트족의왕 오도아케르에게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 P369

오도아케르는 허울마저도 우스꽝스러워진 황제라는 호칭을 쓰기가머쓱했는지 이탈리아 왕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그러고는 동로마제국의황제 아래에서 영주로서 이탈리아를 대리 통치하겠다고 허락을 구했다(오도아케르는 마지막 황제의 제관과 의복, 자줏빛 망토를 콘스탄티노플로 공손히보냈다.  - P369

때로는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시대의 양상을 더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건축과 예술품의 자취를 살펴보면 이런 방식이 적어도 5백년 이상 더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세의 이런 흔적들을 후세인들(19세기 초의 학자들)은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다. ‘로마풍‘이라는 뜻이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 풍토는 수십 세대 동안 여전히로마였던 것이다. - P370

로마의 잔해가 서쪽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어졌다면, 동쪽에서는 비잔틴 양식으로 이어졌다.  - P371

두고 발전한 이런 양식을 비잔틴 양식이라고 한다. 로마 문명의 잔해에 그리스적이고 오리엔트적인 취향이 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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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은 독일 분단과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분단이후 250만 명 넘는 동독의 지식인과 기술자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자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부터 서베를린을 156.4km 장벽으로 에워쌌다. 최소 높이 3m의 담장에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폭15m 넘는 출입금지구역, 기관총을 거치한 감시초소, 사냥개, 지뢰, 차량 접근 방지용 해자까지 넘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장애물을 설치했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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