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친원 세력의 입지는 점차 강화됐다. 특히 14세기후반에는 공녀 출신인 기씨가 원의 황후가 되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는 친원세력의 권세가 국왕을 능가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이들은 고려의 정치에 개입하고 사익을 추구했는데, 특히 충목왕 때 정치도감의 개혁 활동을 기황후가 직접 개입해 좌절시키기도 했다. - P259

하지만 개혁은 공민왕의 의도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공민왕에게도 즉위 전 원에서 시종했던 측근 세력이 있었는 데다 반원운동 이후 왕권이 회복되면서 측근 정치가 재현됐기 때문이었다. 정방이 재설치된 것이 단적인 예였다. 게다가 1359년부터는 홍건군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혁이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 P260

홍건군 14세기 중반, 중국 강남 지방의 농민을 중심으로 백련교를 내세운 반란군이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다양한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모두 붉은 두건과 옷을 입었기 때문에 홍건군으로 불렀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도 홍건군의 한 계열이었다. - P260

성리학은 원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고사회문제에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수기치인(修己治人)).
- P261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을 불문하고, 성리학자로서 과거에 급제한 문신 관료를신흥유신(新興儒臣)이라고 부른다.
- P261

이 시기에 조준(趙浚,
1346~1405), 정도전 등이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개혁을 모색했다. 신흥유신과 신흥무장의 결합이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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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이 고려왕조에 충성하던 마음과 별개이다. 그러므로 최영을 죽인 조선의 건국 주체를 비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익은 자신의 시대인 조선의신하로서의 의리론과 사대질서의 명분론으로 최영을 평가했다. - P122

최영은 명나라 변방에 사건을 일으켜명나라황제의 분노를사게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렇게 해서 기획된 것이 요동 정벌이었다.
정벌 사령관으로 이성계를 임명하고, 나중에 그에게 책임을 전가해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 P122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잠식하려하자, 이에 반발하여 우왕과 최영이 주도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한 것이라는 그동안 학계의 연구성과와 아주 다른 견해이다.  - P123

이익의 주장에 따르면, 최영의 음모론은 1388년(창왕즉위년) 6월 최영의 체포와 12월 최영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익은 최영의 유배 이후에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움직임도 최영 음모의 연장으로 간주하며 1388년 10월 이색(李穡)의 명나라 사행을 음모의 예로 들었다. - P124

이익은 최영의 죽음이후 1390 년(공양왕2) 5월 윤이(尹)와 이초(李初)사건도 최영 음모의 또 다른 연장으로 보았다. 윤이와 이초 등이 명나라황제에게 이성계가 왕씨가 아닌 자기인척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고,
그에 반대한 이색 등의 고위관료들을 살해하거나 유배시키고 명나라를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 P125

최영의 요동 정벌 음모론은 이익이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 심광세(沈光世, 1577~1624)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익은 심광세의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심광세의 최영 음모론은 그의 문집 《휴옹집(休翁集)》에 실려 있다. - P126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요동정벌에 대한 사론을 작성하면서, 심층세의 이 글을 인용했다. 또한 그는 이익의 주장도 받아들여 《동사강독》에 반영했다.  - P126

이익의 《성호사설》에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안정복은 이익의 요동 정벌 음모론을 받아들여 《동사강목》서술에 반영했다. - P127

이익은 조선사람으로서 조선 건국의필연성과 건국자 이성계 중심의 의리론 관점에서 최영의 요동 정벌을 평가했다. 또한 화이론(論)에 근거한 사대명분론의 관점에서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자기 시대의 제약과 한계 속에서 최영을 평가했다.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는 역사 서술과 평가는 불가능한 것일까? - P128

당대의 제약과 한계를 직시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역사 서술과 평가를 시도하는 일이 도리어 역사학의 발전에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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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혜종,
제 3대 정종,
제4대 광종이
모두 태조대왕의아들들이네.
- P165

어쨌거나 광종은 충주 호족인 외가와 황주호족인 처가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 P166

그날 이후 광종은 항상 <정관정요》를읽고 또 읽었다.
정치학 교과서,
제왕학 교과서로딱이지. - P167

그리고 마침내 쌍기의의견을 받아들여 과거제를실시하기에 이른다. - P173

반면, 양민의 노비화는 나라에는 큰 손실이다.
우리 양민은농사짓고세금 내고부역하고군역까지담당하는나라의근본.
불법 노비를 양민으로되돌리는 것은나라를 튼튼히 하고왕권을 강화하는 일이며 - P170

호족이나 공신의 자식이 아니어도관리가 될 수 있게 된 현실은그만큼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왕권 강화되었다는의미이기도 하지. - P174

서필 홀로 사양했다.
경은 어째서받지 않으려하는가?
신은 재상의 자리에앉은 것만으로도이미 은덕이 넘치는데금그릇까지 내려주시면분수에 넘치는 일이라사료되옵니다. - P176

서필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서필은하급관리에서 시작해 재상에까지 이른 인물. - P176

서필은 뒤에 만나볼강동 6주 개척자서희의 아비입니다. - P177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내구마가 죽자, 광종은 담당자에게벌을 내리려 했다.
아니되옵니다.
공자께서는마굿간에 불이 났을 때사람이 다쳤는가를 물었지말에 대해서 묻지않았나이다. - P177

서필은 광종 16년에 죽었는데 이 시기의광종에게 직언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배짱장난 아니네.
목숨 걸고직언하누만.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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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본래 한 권의 책이었다. 사해문서에서 이 둘은하나의 두루마리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본래 한 권이던 사무엘서가 상하 두 권으로 나뉜 것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부터다.  - P17

[칠십인역(LXX)] 기독교인들에게 칠십인역이 중요한 이유는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칠십인역으로 구약을 읽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구약의 오경을 인용할 때, 자주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아닌칠십인역을 인용한다. 성경 원문의 복원을 목표로하는 본문비평학자들에게 칠십인역은 마소라 본문과 다른 본문 전통을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18

사무엘서를 쓴 사람이 미상이라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저자 혹은 저작권 개념이 없었던 고대 근동 세계에서 정경적 문학 작품은 대개 오랜 세월의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수정, 첨가, 편집되어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사무엘서를 포함한 일부 성경도 이 점에 있어서 예외일 이유는 없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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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아리차 #4(고소한 맛)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피니쉬가 짧아서인지 이 커피가 담고 있는 느낌을 제대로 못...조금 아쉽네요. 산미가 거의 없는 깔끔한 단맛이 좋지만, 예가체프 이름 치고는 너무 단조로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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