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태자 수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대왕구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태자의 말이 옳다. 실기를 하면 안 된다. 이 말이렷다? 허면 동진에 곧 사신을 파견하고, 목근자에게 파발을 띄워 1만의 지원군을 요청토록 하라. 헌데 동진에 보낼 사신으로는 누가 적임자라 생각하는가?" "막고해 장군을 보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P310
"아니다. 이번에 이 아비도 출전할 것이다" "그러면 한성은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시옵니까?" "달솔 진고도가 있지 않느냐?" - P311
대왕 구는 이미 진고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진고도는 왕후의 친동생으로, 대왕 구가 즉위한 후 진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요서지역으로 쫓겨 간 후뒤늦게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지만 진정이 강퍅한 성격의 강경파에 속한다면 진고도는 그 반대로 온건파였다. - P311
소신은 고구려의 하 대인보다 더 큰 대상이 되고 싶사옵니다. 그리하여 강남의 동진을 통해 서역으로 가서 명마를 수입해 오겠사옵니다. 그 명마들은 우리 백제의 기마대를 더욱 강력하게만들어줄 것이옵니다." 사기의 말을 듣고 난태자는 그 자리에서 그를 동진 사신단에 합류시켜 주기로 약속했다. - P313
"그대 야망이 마음에 든다. 내가 그대를 백제 최고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마." 태자 수는 밀정 역할을 하여 두 번이나 공을 세운 바 있는 사기가 더욱 믿음직스럽게 여겨졌다. - P313
그리고 민가에서는부락 단위로 돌팔매싸움·씨름·수박희·공차기·투호·윷놀이바둑·장기 등 각종 민속놀이를 즐겼다. 이렇게 부락 단위로 시합을 겨뤄 뽑힌 장정들이 압록강의 둔덕에 마련된 축제 현장에나와 본격적인 경연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 P316
민속놀이에서 돌팔매싸움과 씨름이 그중 흥미로웠다. 돌팔매싸움은 부락끼리 단체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결승전에 올라오게 되어 있는데, 그 결승전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 P316
말을 타고 두 사람이 겨루는데, 돌팔매로 상대편을 먼저 말에서 떨어드리는 자가 장원을 하게 되어 있었다. 먼 거리 싸움에선 화살이 유리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선 역시 돌팔매처럼 정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는 무기도 없었다. 장원을 한장정은 돌팔매로 백발백중 상대의 얼굴이나 몸통을 맞춰 말에서 떨어뜨리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 P316
동맹축제 때는 고구려 전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무사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장원을 하면 바로 장군의 지위에 해당하는 사자의 벼슬을 받아 일정 단계를 거치지 않고 젊은 나이에 곧바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 P317
그 한 달 기간 동안 수백 명의 무사들이 무술 경연을 벌였는데, 최종으로 뽑힌 무사는 세 명이었다. 세 명의 무사는 모두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호랑이·곰·용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 P317
불곰 무사는 월도를 들고 나왔고, 청룡 무사는 구겸창으로 응수했다. 월도나구겸창이나 자루가 길어서 서로 격투 공간을 넓게 쓰면서 겨루었다. 갈기를 세운 말과 말이 비껴나가면서 바람을 일으켰고, 창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 P318
"저 불곰 무사가 누군지 알겠어요." 왕자비 연화가 옆에 앉은 왕자 이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찌 저자를 안단 말이오?" "말 타는 기술이나 월도 다루는 솜씨가 추수 사범이에요." - P319
국혼을 치른 후에 추수는 이런 왕자의 무술사범으로 기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스승을두미의 추천서 덕분이었다. 거기에다왕자비의 적극적인 지지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었다. - P319
백호 무사는 환두대도를 불곰 무사는 먼젓번과 달리 쌍칼을 들고 나왔다. 환두대도는 베고 찌르는 데 유리했고, 쌍칼은베는 데 주로 쓰이나 두 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장점이있었다. - P320
그러자 세 명의 무사는 얼굴에 썼던 가면을 벗었다. 왕자비가 예견한 대로 불곰 가면을 썼던 무사는 추수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지막까지 결전을 벌였던 백호 무사는 예기치도 못했던 해평이었다. - P323
동수는 연나라 모용황의 친동생 모용인 휘하의 장수였었다. 그런데 대왕 사유가 부왕 미천왕의 뒤를 이어 위에 오른 지 7년이 되던 해에 고구려로 귀화했다. 대왕은 동수에게 장하독의 벼슬을 내려늘 가까이 두고 지냈으며, 20여 년간 동고동락을 해온 사이였다. - P324
장하독은 대왕의 신변을 책임지는 장수로, 그가 일찍 죽었을 때 친동기간을잃은 듯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청룡 무사가 바로 그 장하독 동수의 아들이라니 여간 반갑지 않았다. "동수 장군의 아들이라! 장하도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고?" "동관이라 하옵니다." - P324
당장 앞에 닥친 남쪽의 백제군도 문제지만, 다른 한편으로심히 걱정되는 것이 서북 변경이었다. 대왕은 연전에 연나라 태부모용평이 망명해 온 것을 오히려 포박해 전진의 부견에게 보낸 것을 백번 잘한 일이라고, 다시금 곱씹었다. - P329
석정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왕 사유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장 막고해를 동진에 사신으로 보내는 한편 고구려의 동맹축제를 틈타 평양성을 급습하는 전략은 백제왕 구를 결코 만만한 상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어쩌면 막고해를동진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은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고도의 위장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 P334
대왕은 명림수부라면 국내성을 마음 놓고 맡길 수가 있었다. 태자 구부의 장인이므로 왕실을 보전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설인물이기 때문이었다. - P335
간밤에 대왕이 걱정했던 것은 연나부였다. 만약 태제2차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출전할 경우, 이번에 왕자비간택에 실패한 연나부 세력이 어떤 야심을 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딸을 왕자비로 내세웠던 대사자 우신을사신으로 보내면, 그에 대한 위로도 되고 한편으로는 근심도덜게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335
우적은 전부터 어떻게 하면 하대곤과 해평을 떼어놓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그 자신만이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는 비밀이었다. 따라서 그 해결방법은 해평을 국내성으로 보내 관직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번 동맹축제 무술대회에 내보내자고 적극 권유한 것도 바로 그 자신이었다. - P340
하대곤은 해평으로부터 대왕 사유가 제1차 원군을 이끌고평양성으로 먼저 가고, 나중에 태자 구부가 서북 변방에서 차출한 제2차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출진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잠시 마음이 흔들렸었다. 대왕과 태자가 국내성을 비운다는 것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해평이 기마대 5백기를 이끌고 출진하겠다고 했을 때 확답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 P342
왕자비가 추수를 바라보았는데, 문득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엇갈렸다. 이때 추수는 얼른 눈길을 거두며 이런 쪽을바라보았다. - P345
"처음 출전을 하시는 사부께 뭔가 드려야 할 터인데…………" 왕자비는 문득 일어서더니 문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단도를 한 자루 꺼내 왔다. "......?" 갑작스러운 일이라 추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이 굳었다. 너무 긴장이 되어서 자세를 똑바로 한 채 상대를 쳐다보았다. - P347
얼굴을 살짝 붉히며 미소를 짓는 왕자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눈빛이 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호수처럼 맑았다. - P347
어쩌면 왕자비가 되기 이전부터 연화가 자신의 마음을 읽고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수는 생각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연화가 드러내서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여자의 감성이라면 충분이 느끼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추수는 그만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 P348
어서요. 사부의 마음 모르는 게 아니지만, 내가 연화로서 마지막으로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네요." 왕자비는 그러면서 추수를 외면했다. - P348
옷 위로 드러난 왕자비의 어깨선이 고왔다. 추수는 그 어깨선에 눈길을 고정시킬 수가 없어 다시 방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 P349
평양성 남쪽에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패수가 가로놓여 있었다. 또한 북서쪽에서 흘러내린 보통천의 지류가 패수와 만나큰 물줄기를 형성했다. 그래서 성은 서남 방면으로 강을 끼고있으면서 북동 방면은 모란봉을 비롯한 군소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 P351
목라근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공격하자는 일부 장수들과 달리, 그는 매사 신중을 기하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대장군께선 고구려왕 사유가 이끄는 원군 1만을그대로 평양성에 입성시키자는 것입니까?" - P354
문득 놀란 듯, 목자는 황소 같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장군이 배수의 진을 치는 걸 보고 알았소. 적으로 하여금우리를 얕잡아보게 하자는 것 아니겠소?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보기보다 고구려 원군이 강해 우리 군사를 수장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소." - P358
폐하! 바로 맞히셨사옵니다. 적은 지난 수곡성 전투에서 폐하가 산속에 매복시킨 우리 군에게 크게 당하지 않았사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고구려왕 사유가 좁은 산길로 군사를 몰아 칠성문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반드시 이곳 개활지를 지나 보통천을 건너 서쪽 성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허허실실의 전법입니다만, 이번에는 고구려 원군에게 패한척 길을 터주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접전을 하는 척하다가 고구려 원군이 강하게 밀고 들어오면 좌우로 갈라져 가운데를 비워주는 것이 이번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 P358
태자 전하께, 또 올 여름에는 수곡성 전투에서 폐하께,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당했습니다. 그 두 번의 실패 요인은 고구려왕의침착하지 못한 성격 탓이었사옵니다. 마음은 급하고 욕심이 많아, 당장 어떻게 해보겠다는 고구려왕 사유의 다급한 심리를소장은 맑은 물속 들여다보듯 읽고 있습니다. - P359
우리 백제의 본진인 2만 군사가 고구려 원군 1만을 감당하지 못해 길을 터주었다고 하면, 고구려왕 사유는 기고만장할 것이옵니다. 평양성에 들어가 일단 군사를 정비한 후, 기회를 보아 성문을 열고 나와 우리 백제군을 공격하려고 들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때 우리 군은 적을 성 밖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꾀어낸 후, 기습작전으로 몰아쳐 평양성 안까지 짓쳐들어가야 합니다." 대장군 목라근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왕 구는 적이 안심이 되는 얼굴이었다. - P359
고구려 태자 구부는 아비처럼 덜렁대지 않고 매우 진중한 성격의소유자라 들었소.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니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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