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딜레마의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난제가 하나 자리잡고있다. 내가 이 공동체에 속한 것이 이들과 같은 신앙을 공유하기때문이라면, 신앙을 버릴 때 나는 어떻게 될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대학살과 같은성경의 논쟁거리에 눈을 감아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 P134
"하나님이 대량 학살을 눈감아 준다고 생각하세요?" 마지막 질문에 이르면 사람들은 대부분 서둘러 답했다것도 나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을 쓸어버리라고 하신 건 가나안 사람들이 악해서 그런 거죠. 우을 숭배하고 난잡한 파티를 벌이고 어린아이를 희생 제물로 ㅂ고………. 정말이지 역사상 그렇게 타락한 민족은 없었다고요. - P132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삼은 죄를아이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벌하신 거네요? 그거야 뭐 그땐 다 죽고 죽이고 그랬잖아요. 부족끼리 치고받고. 이스라엘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겠죠. 하긴 그렇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침략자였잖아요. 여호수아의 부대는 자기 땅을 지키려고 싸운 게 아니라 남의 땅을 뺏으려고 싸운 거죠. 아니,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수백만을 지옥에 보내고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가나안은그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었을 뿐이라고요. 당신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 거나 감사하세요. 괜히 다른 사람 걱정하지 마시고, 대개 이런 식으로 끝나는 대화에서 난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다 - P132
나는 마치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 『코뿔소』에 나오는 버랑제가 된 기분이었다. - P133
사실 이 희곡은 파시즘을 다루고 있지만, 나는 기독교 신자와 성경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코뿔소가 활개치며 인도를 더럽히고 고양이를 짓밟는데도사람들은 코뿔소를 두둔하는 데 익숙해져서 코뿔소라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뿔이 어떻고 꼬리가 어떻고 하면서겉만 빙빙 돌기 일쑤다. - P133
승리의 기적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저자는 수백 명의 이스라엘 군사가 수천수만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숫자들은 부풀려졌을 가능성이높다. 저자는 당시의 문학적인 관습을 따라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보다는 극적인 면을 부각해 일종의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 P138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쟁을 일삼던 부족들은 일방적인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 ‘전멸‘이니 ‘괴멸‘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흔했다. - P138
신학자인 폴 코판은 이를 두고 "전쟁 서사에서 관습적으로쓰이는 언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근동 지방의 독자는 누구나 이런 언어를 과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 P139
타문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전쟁을 미화했다. - P139
반면 역대기상하는 다윗과 밧세바의이야기는 물론, 다윗과 솔로몬의 정권 이야기에 있었던 볼썽사나운 폭력과 사건들을 통째로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무엘기와 열왕기가 바빌로니아 포로기 중에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 P140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저자가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바라보고 - P140
역대기의 저자는 역사의 치유와민족의 단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정시대를 향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두 가지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 P141
특정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있는 독자들을 마음에두고 글을 쓰기 때문에 고유한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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