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로마는 2층으로 되어있다. 비유가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 도시는 계속 생존해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건물을 지을 때 (수고와 비용을 아끼느라 옛 건물의잔해를 해체하지 않고 흙으로 덮기만 하고 새 건물을 올렸다. 그러다 보니로마의 지대는 5~18미터나 높아졌다. - P24
‘그에게 정통성이라는 선물만 주어졌더라면.‘ 아아 역사에서의 가정은 아무리 헛되고 쓸모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후의 병자호란을 생각한다면 너무 비탄하다. 조금 더 광해군시절의 디테일의 역사를 엿볼수 있어서 기다려지는 책이다.결국에는 한명기 선생님의 병자호란. 그리고 엄광용님의 ‘광개토태왕 담덕‘ 레이황의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The Ming Dynasty in Decline 까지 가게 되네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말씀에 깃든 리듬이 우리 삶의 리듬을 제어하도록 하고 그로 말미암아 시편의 리듬에서 기도의 표현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더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최선의 기도다. - P97
명이 보낸 국서를 처음 보았을 때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명과 후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명의 병력으로 누르하치를 일거에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본 그는, 명에 보내는 답장에 "경솔하게 정벌하지 말고 다시 헤아려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구절을 집어넣으라고 지시했다. - P210
광해군은 이이첨등의 출병 주장에 대해 피폐한 상황에서 나약한 군대를 보내봤자 ‘농부를 호랑이 굴에 집어넣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바야흐로 광해군과 비변사신료들사이에 출병을 놓고 심각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 P211
그는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강홍립은 전통사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인물,이었다. 광해군 생각에, 원정군의 사령관은 군사적 재능도 중요하지만장차 마주치게 될 명군과후금군 사이에서 유연하고 무리 없이 행동할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명군과 말이 통해야 했다. 그런면에서 강홍립은 탁월한선택이었다. - P212
더욱이 당시는 왜란이 끝난 지 겨우 20년. 아직후유증을 치유해야 할 시기였다. 그 와중에 장정들을 뽑고, 군량을 대기위해 세금을 다시 매기고, 그것을 수천 리 바깥의 만주까지 수송할 인부도 징발해야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누르하치로부터 보복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 P213
다음으로, 광해군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추진 중이던 일련의 사업들이 전쟁 때문에 방해받는 것이 싫었다.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한창 짓고있던 인경궁과 경덕궁의 공사도 걱정이었다. 재정이 고갈된다는 볼멘소리가 높았고, "토목공사와 전쟁은 병행할 수 없다"며 궁궐 가운데 하나는포기하라고 아우성들이었다. - P213
당시 명군 지휘부가 가장 탐낸 병력이 바로 조선의 조총수들이었다. - P216
광해군이 이미 쫓겨난 뒤인 1627년 강홍립은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정묘호란 당시 그는 향도로서 차출되었던 것이다. 그는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를 알현했다. 강화 협상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인조 주변의 신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인조는 의외로 그를 감싸주었다. - P225
강홍립 등이 군사기밀을 후금에게 누설함으로써 명군은 패하게 되었다.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기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강홍립 등이 책임져야 한다.인조반정 이후 서인들 사이에서 불거져 나왔던 극단적인 주장이다.과연 그럴까? 연합군이 패하고 요동을 상실한 것이 강홍립과 조선군의책임일까? - P227
더욱이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은 독자적인 작전권도 없었고, 군량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악전고투했다.‘살리호전투‘에서 명군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명군은 병력의 숫자, 병사들의 자질, 무기와 장비, 지휘관의 작전 능력, 군기 등 승패를 가늠하는 모든 조건에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P228
조선과 예혜에서 차출한 병력이 2만5천가량이나 되었다. 순수 명군 병력은 기껏 7만 안팎이었다. 후금군의 병력은 대략 5만~6만 정도였다. 승패를 가르는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을 때, 보통 공격하는 측의병력이 수비하는 측보다 3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정설이다. 그럼에도 명군은 자체 병력이 부족해서 조선과 해서여진의 객병을끌어다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 P228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 조총수들을 서로 끌어가려 했다. 화력이 변변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1619년 2월 강홍립의 장계를 보면, 유정 휘하의 명군은 대포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아니라"명군은 조선군만 믿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가 올라와 광해군을 놀라게했다. - P229
1587-아무 일도 없었던 해의 저자로 잘 알려진 중국인 사학자 레이황(Ray Huang, 중국명 명군의 패전을 당시 명나라 사회가 안고)은있던 총체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한다. 환관들은 미쳐 날뛰었고, 관료들은 무능하고 안이했다. ‘광세지폐‘ 등에서 비롯된 명의 쇠퇴 조짐은 총체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켰고, 그것이 그대로 ‘살리호전투‘의 패전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 P230
내정에선 때로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였던 광해군이었지만,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의외로 냉철했다. 그리고 과감하고 준비성이 있었다. - P233
제사장이라는 자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고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종교 전문가라는 자들은 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통치자들은 내게 도전했고,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전하면서, P허망한 꿈과 우둔한 계획에 지나지 않는 우상을 좇았다.5-11 그래서 이제 내가 너희를 고발한다."하나님의 포고다."너희와 너희 자녀와 너희 자손들을 고발한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