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가톨릭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외국인 과학자를 왕실성당에 안장했으니, 프라하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 P175
프라하는 그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룩셈부르크 왕가의 카렐 1세가 13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렐4세가 되자 위상이 크게 높아져 상업이 번창하고 신흥 부자가 대거 출현했다. 그들이 기부금을 낸 덕에 틴성당 신축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 P179
프라하 시내의 베틀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는데 여러 면에서 남달랐다. 무엇보다도, 종교 의전에서 라틴어를 쓰라는 로마 교황청의지침을 무시하고 체코 말로 설교했다. 신자들이 알아들어야 의미가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P181
설교 내용도 교황청을 화나게 했다. 그는 믿음의 근거를 교회가 아니라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범죄행위와 부정부패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교황청의면죄부 판매를 비난한 것이 특히 큰 문제를 일으켰다. - P181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붙잡혔다.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중교 법정에 끌려나갔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415 년 마지막 숨을내쉬는 순간까지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화형을 당했다. - P183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졌다. 요한네스 교황이 교황청 내부의 권력투쟁에 쓸 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 대량 판매를 강행하자 프라하 시민들이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바츨라프 4세는 면죄부 판매 비판 금지 명령을 어긴 청년들을 참수했다. - P183
교황청은 이 요구를 ‘체제전복 시도‘로 규정하고 여러 군주들이파견한 군인들에게 십자군 깃발을 주어 프라하로 보냈다. 이른바 ‘후스전쟁‘이 터진 것이다. 급진 후스파는 12년 동안 다섯 번이나 프라하외곽에서 십자군을 격퇴했지만 온건파가 교황청과 손잡고 배신한 탓에 결국 패배했다. - P184
베스트팔렌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같은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두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시대가 열린 것이다. - P185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를 저질렀던 종교권력을 향해 날선 비판을 퍼부었고 민중과 소통하려고 체코 말로 설교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 P185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보헤미아인‘ 에 해당하는 체코 말은 ‘체키‘인데 뜻은 정반대에 가깝다. ‘체키‘는 슬로바키아인이나 모라비아인 같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보헤미아의 체코인을 가리키는 체코 말이고, ‘보헤미안‘은 독일인과 집시를 비롯해체코인이 아닌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는 외국어였다. - P188
보헤미안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관습을 추종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생계 불안과 사회적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 서구사회에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히피(hippic)는 긴 머리카락과제멋대로 기른 수염, 미니스커트, 맨발, 샌들, 대마초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다음 세대인 여피 (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hippie)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명품과 사치품을 과시적으로 소비했다. 디지털혁명 시대를 선도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색 바랜 청바지와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녔던 이들은 보보스(bobos, Bourgeois Bohemians)라고 한다. 모두가 보헤미안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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