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녀의 가슴에서는 실타래가 풀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은정하섭에게 묶여있었다. 정하섭이 아무리 험한 길을 아무리 멀리 가도 끊어지지도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끝도 한도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었던 것이다. - P290
에게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그때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재판소의이 판사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이내 그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아니찢어버렸다고 해야 옳았다. 그는 중학교 선배였는데, 김범우가 경멸하고 비판하는 인물들 중의 전형이었다. 일제치하에서 고등고시라는 것을 거쳐 판검사가 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도 철저한 일제의 주구 노릇을 감행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친일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러했듯 그도 아무런 속죄의 표현도 없이 군정과 함께 다시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고 판사 노릇을 해먹고 있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지난 5월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애국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위해 분투한 것이 얼마며, 피해 받는 동포의 인권옹호를 위해 - P293
헌신한 것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목청을 돋우었다. 그건 친일지주계급들이 자위책으로 한민당을 결성하여 신속하게 미군정을 등에없었고, 그것도 불안하여 민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인물로이승만을 골라 당수에 앉히고자 했고, 민족개념이나 통일조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집권욕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이승만은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할 리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 힘이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확장되면서 그들의 정치형태는 시궁창보다 더 더럽게변해갔고, 마침내 이 판사 같은 인물이 애국자로 둔갑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나마 서글픈 다행은, 이 판사의 그 열렬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낙선이 된 점이라고 해야 할까. 한순간이나마 그런 인물을 도움 받을 대상으로 떠올리며 경찰서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신이 김범우는 한심스럽기만 했다. - P294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 그건 아무래도 걸맞지 않았다. 좌익을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만큼 체질적인 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나 ‘사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한 그건 이미 ‘감상‘이나 ‘환상‘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 그 최종목표는 실천에 있었다. 첫째가 의식의실천인 것이며, 둘째가 행동의 실천인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라는것은 그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처남은 그런 조건에 전혀 어울리는사람이 아니었다. - P298
그 경사를 은폐 삼아 역 쪽을 향해 총격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박살이 난 역사의 유리창들과, 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목에 떨어져 있는 탄피들과, 혹시 사건 경위를 미리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여수의 주둔군이 기차를 이용해서 순천으로 밀려들어왔음을 추리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292
봉건적 사회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극복어야 하고, 친일반민족세력을 냉정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서 민족단위의 국가를 만든 다음 모든 일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일은 농민이 8할을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필수적으로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범우와는 논리적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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