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목표에서 씌어졌다. 하나는 연산군과 그의 시대를 될 수 있는 대로 촘촘하고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과정에서 한국사의 주요한 통설인 ‘훈구-사림‘ 문제를 부분적으로 재검토해보는 것이다.  - P6

주석에서 밝혔지만, 이 책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인 ‘훈구-사람‘ 문제와 관련된 시각은 그 분의 견해에서 큰 계발을 받았다. 와그너 선생님은 그 책에서 사회를 비롯한 이 시기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을 ‘훈구사림의 구도가 아니라 삼사라는 관직의 역할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과 충돌로 파악했다.  - P6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와그너 선생님이 사화의 연구를 마친 뒤전혀 새로운 분야로 관심을 돌린 까닭은 새로운 지배 세력인 ‘사람‘의등장으로 사화가 촉발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훈구‘를 극복해대체하는 방식으로 조선의 역사가 전개된 것이 아니며, 변화의 본질을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긴밀하고 방대한 혈연관계로 짜인 당시 지배세력의 구조를 좀더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P7

좋은 글은 사실과 의견이 또렷이 구분된 것이라고 한 뛰어난 작가는정의했다. 그런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지만, 더욱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 P7

 신분은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의 하나다. 말 그대로 ‘몸의 구분‘을 뜻하는 신분은 그러므로 지배 신분과 피지배 신분이 본원적으로 다른 존재며, 그렇게 태생적으로 결정된 차이는 혈통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바꾸지 않는 한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엄중한 선언을 담고 있었다.
- P23

신분제도의 좀더 중요한 측면은 이런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차이‘
가 내면적이며 실질적인 ‘차별‘로 이어졌으며, 그런 차별을 대단히 합법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보호했다는 것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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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나 자신과 함께라서 다행이었다. 유체이탈을 하듯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왁자지껄한 순간에 펼쳐졌다.
얇은 옷에 코가 빨개진, 늦은 밤 피곤하고 취해도 택시를 탈수 없는, 인터넷이 없어 종이로 된 기차시간표를 외우다시피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 시간과 길을 묻는,
나 자신과 함께였다. 누구보다 외로웠지만 평생 잊지 못할 시간임에 틀림없었다.  - P75

글을 쓴다고 해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은 방법을 모르니 일단은 계속해 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좋았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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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다윗은 몹시 슬퍼하며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사람들도 모두 그와 같이 했다. 그들은 그날 남은 시간 동안 울고 금식하면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것과, 하나님의 군대와이스라엘 민족이 패전의 희생자가 된 것을 슬퍼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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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나님, 내가
주님의 강한 오른팔을 세상에 알리고,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그 유명한 의의 길을다음 세대에 알리겠습니다.
- P284

하나님, 주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으니
주님 같은 분,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로 하여금 고난을 보게 하신 주님,
나를 회복시키셔서,
이제는 생명을 보게 하소서. 
- P284

바닥까지 떨어진 나를 끌어올리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소서.
나를 돌아보시고, 너그럽게 대해 주소서.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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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현실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논리화된 역사구조로 파악해 내고, 그 해결방법을 정치형태의 변화에서 찾아내려는 당위성 앞에서 그는 공허를 느낄 뿐이었다. 이학송이나 김범우 같은 사람들의 인식이나 논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주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 것도 그 공허감을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 P296

종로5가 네거리에 이르자 대뜸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불타버린동대문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던 동대문시장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 시장에는 언제나 번잡과 소란이 들끓어넘치고 있었다.  - P297

"그게 무슨 소리야. 저리 폭격을 해대지 않으면 그 지독한 빨갱이놈들이 물러갔을 것 같애?"
"하긴 그렇지. 미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디 이렇게 햇빛을 볼수 있었겠어. 미군이 어련히 알아서 했을라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자네 동네 부역자놈들 색은 잘되고 있나?"
"응, 지금 한창 열이 올랐네." - P300

 그런데 순전히 미국 덕으로 빨갱이들을 다시 몰아치게 되었으니 그 고마움이야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저 미군들은 은인이고, 미국은 받들어야 할 고마운 대국이라는생각만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다. - P306

최서학은 염상구한테 며칠을 업혀 다니다가 읍내에 제일 먼저들어온 사람이 되었다.
"이거 조금만 늦었더라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뻔했군요."
고름투성이인 채로 검붉게 썩어들어가며 역한 냄새를 진동시키고 있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전 원장이 혀를 찼다. - P309

이제 나는 무엇인가, 조직에서 떨어져버리고, 입당을 하지 않았으니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그러나 엄연히 당사업에 협력했으니………… 부역자! 김범우는 어둠 속을 걸으며 쓰게 웃었다. 수많은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전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부역죄인들이 생길 것인가……… 그는 돌덩이를매단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아 가는 것을 느꼈다.  - P313

전쟁터에서 죽어간 사람들보다도 세상이 달라질 것을 믿으며 앞에 나섰다가 이제부역죄로 당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더 문제였다.  - P313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인공 3개월을 통해서 공산주의 의식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일소를 위해서도 부역자 처벌은 가차 없을 것이고, 반공의 강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삶의 악순환이고 역사의 악순환이었다.  - P313

"안 돼, 다른 증거를 대. 바로 당신의 그 유창한 영어가 스파이라는 증거야. 그 완벽한 미국식 영어로 우리 미군을 상대로 기밀을탐지해 내는 스파이! 그렇지, 내 말이 맞지!"
소위는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기초정보교육을 받은 장교다운논리의 왜곡이고, 수사적 올가미였다. 잘못 어물거리다가는 꼼짝없이 스파이로 몰릴 판이었다. 스파이로 몰리면 그의 한 방 총으로세상은 끝장이었다. - P324

말조심해! 당신이 유창하다고 인정하는 내 영어는 바로 당신네육군이 막대한 정부 예산 들여가며 가르쳐준 거야. 내가 1945년 8월15일까지 뭐였는지 알아? 바로 일본을 무찌르기 위한 미국의 스파이 OSS였다. 당신 OSS가 뭔지나 알아? 당신이 육군 소위가 되기전에 벌써 내 신분은 당신네 정부와 육군이 보증했던 사람이라 그거야! 알겠어!" - P324

김범우는 그들 예법을 갖춰가며 그들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좋소, 말하시오."
"고맙습니다. 당신의 두 부하는 사격연습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여자들이 식수를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질그릇을 향해 총을 쏘아 그릇을 깨뜨리고, 물이 쏟아져 저 여자들의 온몸을 젖게하고, 총소리에 충격을 받아 놀라게 하는 야만적인 장난을 했습니다. 그 증거가 젖은 저여자들의 옷이고, 저쪽 우물가에 깨진 그릇입니다.  - P322

그리고 당신 부하들은 그것도 모자라 놀라서 몸을 피하는저 여자들을 겁탈하려고 바로 이 자리에다 쓰러뜨렸습니다. 난 더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을 뒤쫓아와 한방씩 갈겼고, 그들이 대검을 뽑아 덤비는데 장교님이 오신 것입니다. 상황이 급한 김에 당신부하들을 한 대씩 갈긴 것을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 P322

"오우,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소. 우리가 조회한 결과 당신의 진술은 모두 사실 그대로요. 반갑소, OSS대원 톰슨!" - P325

1년에 200일 이상 끼어 햇볕을 제대로 못 받아 허옇게 설익은 피부, 긴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열량 높은 육식만을 해서 비대해진 체구, 얼어붙은 땅에서 살기에 지쳐 얼어붙지 않는 땅을 빼앗으러 나선 식민주의자들의 후손, 엄연히 주인이 있는 땅을 침략하고 강탈하면서 ‘발견‘이니 ‘개척‘이니 하는 말로 인류사를 왜곡한 자들 - P325

아프리카·아시아·남북아메리카를 강탈하며 짐승을 사냥하던 총으로 원주민들을 무차별 사냥하면서 백인우월주의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자기들의 종교인 예수교로 합리화한 교활한 자들, 그러면서도 피지배민족들의 단합을 교란하고 해체시키기 위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평화‘라는 그럴듯하고도 혼란스러운 제국주의적 논리를 만들어낸 겹겹으로 교활한 자들…………. 김범우는 살집좋은 소령을 물끄러미 보며 쓰게 웃었다. - P326

"그래요? 설마 이 전쟁의 작전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아직까지 모르고 있진 않겠지요? 우린 언제든지 필요한 인력을 징집하고, 필요한 물건을 징발해서 쓸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거요."
- P327

소령이 어떠냐는 듯 비웃는 것인지 야유하는 것인지 모를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썅놈에 영감탱이, 작전권까지 넘겨가지고……. 김범우는 담뱃갑을 와락 끌어잡았다. - P327

전쟁의 후퇴는 침묵을 낳았고, 후퇴의 침묵은 민첩성을 낳았다.
- P329

이학송 일행도 강가에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빨며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파르고 각이 진 산들이 첩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올수록 산들은 많아져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산,산들에 갇히고산들에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 P329

그녀가 슬프다‘고 하지 않고 서럽다‘고 한 것이 묘한 감정을 느끼게했다. 그는 별다른 근거 없이 슬프다는 말은 서양 정서고 서럽다‘는 말이 울ㅋ의 청서 - P330

"날보고 그런 말하지 말고 동무나 총 우리헌테 넘기고 집에 가서 쉬는 것이 으쩌겄소? 빨치산 환갑나이 폴세 지낸 것 같은디."
조원제가 야무지게 쏘아붙였고, 그들 일행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이해룡은 무색함을 면하려는지 누구보다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나이를 빨치산 환갑이라고들 했다. - P349

아주머니의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그건 여자들이 치러야 하는 새로운 난리였다. 그 난리는 이틀 전에 한바탕 벌어졌다. 미군들이 지나가며 변두리 마을에서 분탕질을 쳐 여자들을 범한 사건이생겼다. 그날 밤에 처녀 둘이 목을 매 죽어버렸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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