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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봄밤>
무엇을 잃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영경과 수환은 부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초라한 모습으로 만난 두 사람은 쪼개진 반쪽을 만난 사람처럼 한 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남녀 간의 만남에 있어서 상대의 외모나 능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사랑은 그런 것에 깃들지 않는다는 걸 말해주는 지 모르겠다. 모든 겉치레를 걷어내고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객관적이고 이해 가능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남는 그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그 전에도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겠지. 그러니까 타인의 횡포에 그렇게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간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놀랍다. 알콜 중독자인 영경은 술 마시는 일만 아니면 참 괜찮게 살만한 사람이겠다 싶으면서도 그렇게 술 마실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왜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방기했냐고 그들을 다그친들 나와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될까.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십대의 사랑과 권여선의 봄날에 나오는 중년의 사랑을 사랑의 불가해함과 인생의 비극적 허무함이라 요약한다면 이런 사랑, 무섭다.
모든 것을 걷어내고 그 한 사람만 본다는 거. 어떻게 볼 때 가장 잘 보는 걸까. 가장 제대로 본 걸까. 그 본다는 행위에 감정은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나. 걱정과 기대는 버리고 봐야 하나. 욕구와 미래는 제외해버려야 하나. 그럼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그냥 본다는 행위만이 남는다. 보기 위해서 본다.
미움이 왜 생기는 걸까. 인생이 그렇게 시키는 걸까. 장밋빛 인생이 아니어서 실망해서 그걸 그 시간을 같이 했던 사람을 파괴해서라도 복수하고 싶은 파괴적인 욕구. 그건 인생이 시켜서 한 일. 그럼 그 안에서 인간은 무슨 일을 했나. 꼭두각시처럼. 인생이 시켰다는 말은 그 깊은 층위를 다 들여다보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건 고통의 문턱만 밟고 그 위에 주저앉아 기왓장으로 피부의 종양을 긁어내는 일과 같다. 욥처럼. 상대를 추악하고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나도 추악하고 못난 사람일텐데. 그건 감정이 시킨 일이니 감정은 이성을 이기고 한동안 주인 노릇을 하겠다. 무력하게 그 일을 지켜보면서 남의 인생 보듯 적당히 괴로워하면서 분열적으로 살았으니 그 대가는 본인이 다 받을 일이다. 인생에 거저는 없다! 속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면서도 속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많은가. 모든 일이 떨어져서 보거나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좋은 길로 접어들 수 있는데 왜 그 당시 그 사람이 되면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리는가. 그걸 집착이라고 말하는가. 인생에 대해서 몰랐었다고 해두자. 그러니 인생이 펼쳐놓은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았던 게지. 그렇다고 지금 제대로 잘 살고 있는가. 조그만 일에 화내고 미워하고 말을 하는 일상, 상처받고 분열되고 불안정한 내면. 이제는 자신 있다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적어도 모른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아는 것과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다. 식은 죽은 먹기는 쉬워도 먹고 싶지는 않다. 며칠을 굶었더라면 그것도 맛있겠지만 다 먹고 나면 심드렁하게 바라보겠지. 내가 현재 어떠한 상태인가가 중요하다. 나의 결핍과 어리석음과 외로움을 매번 확인하고 되뇌인다면 나의 정신적인 결핍을 기억하겠지. 거들먹거리지도 다 알겠다는 포즈도 취하지 말고.
다시 봄밤으로 와보자. 이 소설의 제목이 봄밤인 것은 인생의 한 때, 스치듯 지나가는 어떤 날의 사건을 그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사랑이라는 게 인생의 봄 같은 거라는 의미도 있겠다. 아무리 병들고 알콜중독에 빠져있더라도 인생은 흐르고 아름다울 수 있다. 다만 밤이라는 거.
<이모>
한 사람의 인생을 3자의 눈으로 관찰하고 설명하는 방법이 좋았다. 화자가 시어머니, 남편의 입장을 전달하고 이모의 구술을 전달한다. 중요한 사건이나 감정은 이모가 직접 이야기하고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화자의 렌즈를 통해 진술하는 기법.
이모는 무조건적인 이해와 헌신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도박에 빠진 남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다. 그리고 오십 세에 그러한 인생의 구도를 변경시킨다. 그 이후의 인생에서 그녀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남은 돈을 다 탕진하고 살다가 죽으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어느 날의 사건이 그녀를 살도록 변화시킨다. 그게 뭘까.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생각이 없는 이웃 부부와 아파트 기사, 노숙자, 도서관 사서 그리고 대학 1학년 때 두 손을 내밀며 사랑을 호소한 남학생. 이모는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두 손을 맞잡아 주기를 바라며 벌렸던 손바닥을 담뱃불로 눌러 끈다. 관심 없는 남자가 사랑을 표현하니 죽을 맛이다. 귀찮고 성가셨다는 표현. 이런 정서는 자신의 내부가 망가져 있음을 알려준다.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어머니, 남동생이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아니 그 원인 제공이 타인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 자신이라는 것. 그래서 이모는 하루하루를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집중해서 살아간다. 하루 세끼를 먹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네 개비의 담배를 피고 일주일에 하루 저녁은 소주 한 병을 마시는 것. 단순하지만 집중된 인생. 신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를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니까. 그런 삶도 이 년밖에는 유지하지 못한다. 자신 내부 안에 있는 징글징글한 감정, 타인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귀찮아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어떻게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켰을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최근에 읽은 한국 단편 소설 중에 단연 1위 소설이다. 권여선의 인간 이해와 인생의 깊이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게 하는 불가해한 힘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어째서 그것을 잃고 죽음을 선택하는가. 그 힘을 어떻게 극대화 해서 살아볼 것인가.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처음 읽을 때 봄밤의 도입부는 산만하게 보였다. 영경의 두 언니들의 대화가 왜 도입에 배치되어야 하나 의아했다. 그러나 두번째 읽었을 때 이 대화는 인생을 바라보는 묘한 층위를 구성한다는 점을 느꼈다. 이제 영경의 내부는 꺼졌다.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만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소멸되어가는 인생, 징글징글했던 사랑이
끝나고 그 기억마져 사라질 인생의 종말을 미리 당겨와 경험한 것 같은 도저함은 인생의 허무함 때문이다. 허무함에 대해선 '아픔에 대하여'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글을 올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