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 - 신현정 유고 시집 세계사 시인선 148
신현정 지음 / 세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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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까지 내려간 슬픔은 그 깊이로 인해 평화를 얻는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 본 사람, 이제껏 힘써왔던 일과 삶에 실패한 사람, 병으로 자신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걸 매일 느끼는 사람은 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세계와 나 사이에는 막 같은 것이 있는데, 삶과 죽음 사이에는 경계가 있는데 바닥에 내려가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순간적으로 그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그 때 느끼는 감정은 현재는 나는 살아있다는 것, 삶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마음에 자유를 얻는 건 아닐까.

신현정의 시는 대부분 짧다. 수식이나 관념이 없다. 세계와 시인 사이의 막이 투명하다. 그 시선에 진실함이 배어나온다. 속속들이 배어든 외로움과 고통을 멀리 하지 않고 그렇다고 절절히 그 고통을 토해내지도 않는다. 시인의 거리두기는 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그럴 때 불필요한 욕망이나 장광설의 기름기가 쏙 빠진 담백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생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말을 걸 수 있다. 그의 거리두기가 세계를 이해하는 시선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엄경희는 해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바꿔놓기, 딴전 피우기, 샛길로 빠지기, 모르는 척하기, 다 보지 않고 남겨두기 등은 신현정의 놀이 방식이면서 동시에 시적 지향이다. 그는 세계를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만이 진실한 태도라 여기지 않는다. 정면에서 벗어날 때 딱딱했던 세계는 다정해지고 막혔던 숨통은 열린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2009년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의 시를 읽으며 맨드라미에게 별에게 말을 건다. 우산을 펼치다가 바스락거리는 사탕의 포장지를 뜯다가 잠시 멈춰본다.

 

 

 

사루비아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맨드라미 광장

 

 

하늘은 파아란 속으로 구름이 희긋희긋 묻어나고

 

맨드아미들이 한결같이 빨간 볏을 달고 있는 것 보고

 

제네들 저러다 무슨 장닭이나 된 걸로 착각해서는

 

다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날개 쳐본들

 

시계탑 꼭대기밖에 더 하겠는가 말이다

 

이왕지사 날개를 퍼득이며 올라간 거기

 

목들이라도 길게 빼고 목청껏 한번 구성지게 울어 제끼다가

 

내려왔으면 하다

 

맨드라미들, 석양빛을 볏에 말갛게 비치다.

 

 

 

 

별사탕의 탄생

 

 

별들 속에서도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이 꿈인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셀로판지에 색색깔로 담겨보고픈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구멍가게의 구멍으로 쏘옥 들어가고픈 별들이 있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잇었기에 별사탕은 탄생했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별을 봉지에 팔았다.

 

 

 

 

이후

 

나 무지개를 뛰어넘어 어떤 나라에도 가보지 않았다.

 

 

 

 

박쥐우산을 쓰고

 

 

내 마음의 동굴 속에 사는 박쥐야

 

거꾸로 매달려 있는 박쥐야

 

고독한 박쥐야

 

까만 종유석 같이 빛나는 박쥐야

 

나는 네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없다

 

다만 우산을 만들어줄 수 있다

 

어느 비오는 날

 

너를 공손히 내려

 

우산으로라도 좋다면

 

비는 내리고

 

너를 활짝 펼치고 하염없이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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