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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아주 어릴 때부터, 아마도 대여섯 살 때부터 나는 커서 작가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외로운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이야기를 지어내고 상상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갖게 됐다.
나는 나에게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나날이 겪는 실패를 앙갚음할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통틀어 써낸 심각한 글은 대여섯 페이지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 시절 내내 학교 과제 말고도 나는 지금 내 기준으로 보자면 경이로운 속도로 좀 장난스러운 시를 이따금 쓰곤 학교 잡지 편집 일을 돕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들과 더불어, 나는 15년 남짓 동안 꽤 다른 유의 문학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말하자면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일기 비슷한 것을 계속해서 꾸며나가는 것이었다.
나의 ‘이야기’는 어느새 조잡한 자아도취적 분위기를 벗어나더니, 갈수록 내가 겪은 일이나 본 것에 대한 단순한 묘사가 되어갔다.
열여섯 살 즈음 나는 불현듯 낱말 자체가, 달리 말해 낱말의 소리와 그로 인한 연상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가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물론 그는 마땅히 자신의 기질을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 매몰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일찍이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없어져버릴 것이다.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가지라고 생각한다. 1. 순전한 이기심. 2. 미학적 열정. 3. 역사적 충동. 4. 정치적 목적.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글을 썼을지도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종의 팜플렛 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나는 안 맞는 직업을 택하며 5년을 지냈고 그뒤로 빈곤과 좌절을 겪었다. 그로 인해 권위에 대한 나의 타고난 반감이 커져갔고, 처음으로 노동계급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일해본 덕분에 제국주의의 본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히틀러가 등장하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등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스페인내전과 1936~1937년에 있었던 그 밖의 사전들은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고, 그뒤부터 나는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 10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에 난센스다.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그런 주제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근년에는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왔다는 점만 밝히기로 하자.
나는 7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만간 또 하나의 소설을 쓰고 싶다. 그것은 실패작이 될 게 뻔하고,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다. 단,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싶어 하는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름 바 없는 본성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산문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며 느꼈던 조지 오웰에 대한 경이감을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책에는 빼어난 산문이 많다. 스파이크,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마라케시, 물속의 달, 어느 서평자의 고백,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정말, 정말 좋았지 등은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이다. 사실적인 일상의 모습을 정확히 서술하는 점과 그것들이 자신의 삶속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삶을 잘 알기도 전에 산문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으면서 자기가 쓴 글이 많이 읽혀지고 호평받기를 바란다면 그는 바보임에 틀림이 없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설이나 시는 큰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겪고 있는 현실이 주는 압박감 때문에 문학작품을 향유할 여유가 없다. 그럴 때 나는 조지 오웰의 글을 읽는다. 어쩐지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슬픔과 함께 기묘한 평화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