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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명화 이야기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썼습니다-
중세 종교미술은 한편으로는 화가들의 밥줄이었다. 화가들은 교회의 종교화 주문으로 먹고살았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등장하면서 종교화는 우상숭배로 여겨졌다.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긴 화가들은 이제 종교가 아닌 일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탄생한 화풍이 바로 네덜란드 화풍, 즉 근대 시민 회화의 탄생이었다. 종교의 영웅이 주인공인 회화가 아니라 내가, 이웃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미술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평범한 사람들의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가 새로운 회화 양식으로 등장한다. 회화의 중심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구입하는 구매층도 이제는 큰 재단의 교회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시민이 되었다.
네덜란드 회화 중에 이 페르 메이의 대표적인 작품,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페르 메이가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3년 치 빵값으로 빵집에 납품되었다고 한다. 실제 그림을 보면 빵과 우유가 생각나게 하는 그림인데 그 당시 이 그림을 가게에 걸어 광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로 분류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군중 혹은 집단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을 집단 초상화라고 하는데 세 종류로 나누어보면 군사조직, 관리/이사회, 해부학 강의를 그렸다. 그렇다면 렘브란트의 회화에는 하나의 캔버스에 왜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당시에 있었던 1/N 더치페이 각출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의 그림값을 명수대로 나누어 지불했고, 렘브란트는 인물들을 많게는 40명까지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똑같이 바로크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프랑스 미술은 네덜란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론과 기술 사이에서 이론 우위 인식은 미술의 성격을 더욱 아카데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술에 학술적, 이론적 권위를 부여한 것이 바로 프랑스 아카데미였다. 중세 시대에는 미술의 권위가 종교와 교회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프랑스 바로크 시기에는 왕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미술대학에서의 인체 해부에 가까운 과학적 데생 교육은 바로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