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주로 배경지식 없이 접하는 편이다. 문학에서의 다른 장르와 놓고 볼 때 비교적 내가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는 시의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가끔 수용의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 시를 찾는다.
목신의 오후라는 단어는 드뷔시의 음악작품에서 접하게 되었고, 문학사를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서 말라르메는 시인이라는 정보만 알고 있을 뿐, 책에 대한 그 어떤 사전적인 지식과 정보 없이 선뜻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에 눈이 갔다. 그 사람의 시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그가 생전에 지녔던 세계관을 경험한다는 것. 백지가 선사하는 여백의 미에 마음을 비우며 까만 글자를 한자 한자 읽어내려가본다.
어둠이 숙명의 법칙으로 위협할 때
어둠이 숙명의 법칙으로 위협할 때
내 척추의 욕망이며 고통인, 그 오랜 꿈은
음울한 천장 아래 소멸할 것이 비통하여
의심의 여지없는 그의 날개를 내 안에 접었다.
화려함이여, 오 흑단의 방, 한 왕을 유혹하려고 거기서
이름 높은 꽃 장식들이 스러져가며 몸을 뒤틀지만,
제 신념에 눈이 먼 고독한 자의 눈에
그대는 어둠이 기만한 오만에 불과할 뿐.
그렇다, 나는 안다, 이 밤의 저 먼 곳에서, 지구가
저를 더 어둡게 하지는 않는 흉측한 영겁의 아래에서
크나큰 어떤 광채의 기이한 신비를 뿜어내고 있는 것을.
팽창되건 부정되건 있는 그대로의 공간은
이 권태 속에서 비천한 불들을 운행하여 증언하게 한다
천재가 축제의 별로 타오르고 있다고.
[목신의 오후], 말라르메의 시가 실린 곳곳마다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을 감상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말라르메 시 + 앙리 마티스의 그림 조합, 이름하여 [목신의 오후:앙리 마티스 에디션]을 문예 출판사에서 자체 기획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의 해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이 책은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 떠오르는 영감을 마티스가 직접 그림으로 그린 것은 물론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편집과 출판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앙리 마티스 에디션이다. 말라르메의 생각과 그의 작품에 공감했고, 그림 외에도 책을 사랑했던 마티스의 뒷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당연히 시가 주인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티스의 그림이 시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림을 좀 독자적으로 놓고 보면 말라르메의 시를 접했던 당시의 마티스의 경험과 감정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도 있고, 말라르메의 시에서 떠오르는 인상과 느낌을 그림이 주는 인상, 느낌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독자가 말라르메의 시를 접하고 받은 경험과 인상에 혹시나 그림이 방향을 제시하고 독자의 생각과 느낌을 재단할 수도 있음을 우려했는지 마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인물의 눈코입이나 눈동자를 넣지 않았다.
그 옛날 수능을 앞두고 접했던 시는 사회적 제도에 따라 올바르게? 해석해 내야 했던 문자들의 조합이었다면, 이제 그럴 의무와 부담이 없는 상태에서 보는 시는 일종의 사유, 느낌, 감상의 유희가 되었다. 쫓기며 사는듯한 이 바쁜 세상에 시를 접한 적 언제인가. 마음이 바쁘면 시집을 펼칠 수 없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 차분한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시집이다. 머리를 비우고 그림과 함께 감상의 세계에 젖고 싶다면 말라르메와 마티스의 조합 [목신의 오후:앙리 마티스 에디션]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