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누군가로부터 이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그때가 행복했겠구나 하는 어렴풋한 짐작을 한다. 누군가에게 돌아가고 싶은 '그때'는 분명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 형제에게 일절 '공부하라'라는 말씀과 그 어떤 부모의 욕심, 강요가 없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잘 놀고, 잘 웃고, 잘 뛰어놀던 즐거운 기억과 행복했던 추억의 힘으로 지금 성인의 삶을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로만 듣던 루소의 [에밀]을 읽으면서 그 어떤 슬픈 소설과 같은 장르가 아님에도 카페 한구석에서 눈물이 글썽거리는 경험을 했다. 내가 내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그건 잠시나마 행복한 추억에 빠지는 잠깐의 이벤트가 됐지만, 성인이 되어 보고 들은 여러 아이들에 대한 소식과 불행한 상황 등을 순간적으로 떠올렸을 때, 그것이 내 유년 시절의 행복과 비교되서인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울컥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에밀]은 나의 유년 시절을 거쳐 지금 현재의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나는 루소를 내 방식대로 이해한다면 '계몽주의의 이단아'내지는 '진정한 계몽주의자'라고 본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좀 아이러니하긴 한데, 프랑스의 집단지성이라고 하는 백과전서파의 활동 등,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최고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규범, 제도에 대한 맹신이 사회적 분위기를 이루던 시절, 루소는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이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사회적 산물들이 인간의 선한, 자연적 본성을 망친다고 보았다. 인간 이성과 계몽을 추종하던 거대한 흐름에서 루소는 인간에 가해지는 이것들의 경계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설명할 때 따로 분류되어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지금, 계몽, '진정한 계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에밀]을 비롯해 그의 여러 저작에서 피력한 그의 주장은 소름 끼치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그를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계몽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이성과 과학이 손잡고 만들어낸 산업화 그리고 그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성, 20세기 세계대전의 참상 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성과 그것을 통한 계몽이라는 하나의 이념 아래 맞아하게 된 인간의 슬픈 역사다. 인간이 인간을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혹은 수단으로 대하게끔 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맹신은 지금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성은 그저 하나의 도구였고, 계몽은 그저 허울좋은 빛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