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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이야기 ㅣ 부산대학교 일본연구소 번역총서 5
아쓰지 데쓰지 지음, 류민화 옮김 / 소명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한자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책으로도 만나본 적이 없다. 다양한 설과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갑골문자가 지금 한자의 선조 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북이 등껍질이나 뼈에 한자 모양 비슷한 것을 새겨 길흉화복을 점치고, 제사와 나랏일 보았다 것. 이것이 바로 한자를 실체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맨 처음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갑골문자든, 한자든 그것을 뼈, 솥, 비석, 나무에 새기든 종이에 쓰든 문자는 곧 권력이었기에 중국 역사에서 한자는 주로 지식층이나 권력계층에서 통용되고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전국시대 중국에서 사용되던 한자가 각 지역에 따라 서체가 달랐다는 것이다. 제나라는 세로로 길고 선이 가늘며, 초나라와 월나라는 서체가 장식적이었다고 한다. 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각자 독자적으로 운영될 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중앙집권 국가였던 진나라 때에는 중앙과 지방에서 문서를 이용한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진시황의 한자 서체의 통일은 이때 이루어졌다. "모두 소전으로 통일하라~" 소전은 서체, 즉 문자 스타일로서 소전체, 전서라고도 불린다.
한자는 분명 중국의 긴 역사만큼이나 무수한 통합과 내적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전국시대에 서로 달랐던 문자 스타일이나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달랐던 문자의 표기와 의미는, 중국 내부에서 여러 번의 통일이나 몽골이나 아랍문화권, 동남아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전쟁과 교류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되어갔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은 이후 한자가 정리, 보급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한자는 그렇게 권력계층,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다. 한자는 곧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체제와 전통의 상징이기도 했다.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섰을 때 구체제와 전통을 부정하던 사람들은 한자도 없애고자 했다. 인민대중의 계몽을 위해 문자는 반드시 필요한데, 한자는 획순이 복잡한 글자도 많고, 쓰는 데 시간도 걸리며, 암기하기도 어려워 인민 대중이 배우기에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한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한자는 그렇게 폐지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예전에 한자를 잘 모르고 중국어를 위해 간화자를 배울 때에는 간화자와 한자는 별개의, 전혀 상관없는 그저 공산당의 인공적 창작물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간화자의 모양을 통해 번체자의 모양과 의미를 추측해 낼 수 있기 시작하면서 전혀 상관없는 관계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한자 이야기]를 통해서 이 부분을 해소할 수 있었다. 간체자는 그냥 아무렇게나 마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나름의 법칙을 통해서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한자 모양에서 변이나 방을 간략하게 줄인다든지, 일부분만을 사용한다든지, 복잡한 부분을 기호로 표기한다든지, 초서나 행서의 자형을 해서화한다든지....하는 간화체의 탄생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중국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거 같다.
한때 자신의 전통을 부정하던 중국, 그 과정에서 없애고자 한 한자. 한자는 이후 간화자와 병음의 조합으로 세계 여러 언어 중 하나의 문자로서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다. 서구 열강에게 시달리면서도 서구 열강과 같은 부국강병을 꿈꾸며 ‘한자불멸중국필망(漢字不滅中國必亡)’을 외치던 중국은 이제 백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 G2로 자리매김해있다. 문자는 곧 권력이라고 했다. 권력의 양상은 예전과 조금 다를지언정, 한자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