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정동호 지음 / 책세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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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 이 책 덕분에 니체를 좀 더 잘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

니체와 나의 처음이자 유일한 만남은 [도덕의 계보학]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은 책이었다. 그때 니체에 대한 나의 인상은 거칠게 말하면 '기독교에 욕을 퍼붓는 망치 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 인상을 몇 년 동안 가지고 살다가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에서 본 니체는 내가 생각했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책에서 봤던 다소 소심하고 수줍었던 그의 모습이 머리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을 읽으면서 철학사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니체 본연의 모습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곧 '니체'로 읽혔다.

부끄럽게도 원전이든, 번역이든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지 않고, 이것의 해설서로 나온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로 먼저 향하게 되었다. 니체 읽기를 시도했던 [도덕의 계보학]에서 나는 이미 쓴맛을 보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그의 책에서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얻어내기 어려워하는 심리적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셈으로 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설서가 굉장히 친절했다. 이 책에는 작품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작품 해설이 담겨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체가 4부로 구성된 책이기에 이 해설서도 작품 해설에서 4부의 구성 형식을 지닌다.

제1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산속에서 10년 동안의 명상을 마치고 깨달은 바를 산 밑의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러 가는 이야기를 닮고 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바로 '신은 죽었다'는 것.

'신이 죽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신 자체도 관념적인 것이지만, 여기서 죽음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다. 니체가 죽었다고 규정한 신도 물론 그리스도교의 신(종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넓게는 니체 자신에게 가상으로 이해되는 저편의 세계, 플라톤 이래로 이어져왔던 전통적인 형이상학, 초월적 이념, 도덕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왔던 전통 전체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니체에게서 비판받은 이유는 그것이 허무주의를 양산해내기 때문인듯하다. 우리가 사는 여기 '이 세계'는 사멸할, 일시적인 삶이요, 죽어서야 이르게 되는,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저기 위 하늘세계'에서의 삶이 참된 것이라고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는 결국 인간이 지금 땅에 발 닿아있는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현재 삶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생명을 설교해온 것인데, 그런 설교를 조롱이라도 하듯 대놓고 죽음을 설교해온 자들이 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고 헛되어 무의미하다는 비관에서 죽음을 동경해온 염세주의자와 허무주의자가 그런 자들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망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죽음을 새로운 삶의 관문으로 가르쳐온 배후 세계론자들도 죽음의 설교자라는 점에서 하나다.

p.137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을 꽁꽁 묶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고 그 위에서 군림했던 초월적 세계의 죽음을 의미할진대, 우리가 흔히 접하는 표현으로서 '니체가 망치로 그것(형이상학적 관념)을 때려 부셨다'하든, '차라투스트라가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하든, 이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다 부숴버린 이 상황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개념이다.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초월적 망상과 도덕적 이상으로 얼룩진 과거를 딛고 일어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한다. 그릇된 과거에 '아니다'를, 쇄신할 미래를 향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 한다. 이는 자연 속에서 정직하고 순진무구한 삶을 사는가 하면 자신의 삶을 통해 힘에의 의지를 구현하는 사람, 영원한 회귀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거듭나기를 반복하는 인간이 바로 위버멘쉬, 위를 향해 자신을 극복해가는 인간이다.

p.36

제3부에서는 세계를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본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달리, 그것을 '영원회귀'로 보는 니체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니체가 세계를 '영원회귀'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은 "우주 공간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며, 그런 공간에서 운동은 영원한 순환운동일 수밖에 없다"(p.304)고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소생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있다(p.384, 재인용)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에서는 삶도 영원히 반복된다. 사멸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죽은 뒤에도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이다. 영원히 반복해서 존재한다면 처음에는 환영하겠지만, 같은 삶을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극단의 권태에 빠지게 되고 끝내 깊은 허무감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단순한 반복이 있을 뿐, 새로운 것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p.304

삶에서의 생(生)과 위버멘쉬, 자신의 삶을 저 스스로 세우려는 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설파해온 그였지만, '영원회귀'는 차라투스트라 스스로도 아직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목이 조여오는 것 같은, 끙끙 앓고 있던 그 무엇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삶을 어떻게 이겨낼까.

그에게 고무된 짐승들이 그에게 권했다. 말은 이제 그만하고 다시 한번 꿀벌과 비둘기들이 노닐고 새들이 노래하는, 장미꽃 만발한 바깥세상으로 나가 새들에게 노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노래는 건강을 되찾고 있다는 징후다. 그러니 새로운 노래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라는 권고이자,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첫 번째 스승으로서 주어진 막중한 운명을 이겨내고 그 자신의 몰락을 끝내라는 권고였다. 앞으로는 영원회귀가 차라투스트라가 부를 새로운 노래가 될 것이다.

p.385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책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일종의 '철학적 소설' 내지는 '철학적 산문'으로 생각해도 될까. 어쨌든 이 해설서만 놓고 보자면 그리 어렵지 않은, 니체의 철학이 담긴 하나의 재미난 이야기였다. 막연히 어렵게만 생각했던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었던 시간였다.

니체의 생애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상황에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를 읽는 동안 니체의 그 강인한 철학 사상과 더불어 실제 그의 성격, 그가 병마와 싸워야 했던 고통스러웠을 시간의 모습들이 오버랩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3부의 저조했던 판매 부수, 출판을 맡아줄 곳이 없어 자비로 4부 40부를 인쇄해 친구들에게 나눠줬다는 니체, 살아생전 실제로 자신의 철학을 인정받지도 못했고, 그러한 업적에 빛나는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책을 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는 니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도 끊임없이 집필을 놓지 않았다는 니체의 삶에서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전하고자 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삶을 긍정하자'라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무한히 흐르는 영원회귀 속, 생성이 만들어내는 우연과 차이에 시선을 두고 귀 기울일 줄 아는 삶. 동굴 안 영원회귀가 주는 그 중압감 속 저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 꿀벌, 비둘기, 장미꽃과 노닐며 자신의 영혼을 치유한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모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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