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라는 고전을 가지고 저자가 이 책에서 어떻게 귀결시키는지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연구하는 것은 모든 것의 '존재', 즉 존재의 보편적 개념이다. 그는 존재의 형식을 10가지로 분류한다.(이것을 '존재의 범주'라 한다.)
이 사람은 소크라테스다(실체), 토끼는 하얗다(질), 무게는 200g이다(양), 나의 부모(관계), 선반에 놓여있다(장소), 어제 보았다.(시간), 서 있다(상태), 책을 갖고 있다(소유), 달리다(능동), 파괴당하다(수동)
가령, '소크라테스'는 개별사물이자 실체에 해당한다. 실체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 형식이다. 누가 소크라테스를 쪼갤 수 있는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실체지만, 이러한 실체는 다양한 성질을 지닐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서있다, 소크라테스가 앉아있다'등.
'서 있다', '앉아있다'와 같이 여러 가지 범주를 나타내는 술어를 통해 실체의 다양한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앉아있든, 서있든, 누워있든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 변함이 없다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두고 '실체는 동일성을 유지한다'라고 본다.
"세계는 질료가 형상을 실현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옮겨가는 일련의 원운동을 따라 생장한다"(p.27)
실체 = 존재하는 개별 사물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은 '목적'을 결정하는 요인이고, 질료는 형상에 따라 한정되거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동전'과 '조각상'은 '동'이라는 같은 질료(재료)로 만들어졌지만, 그것들의 형상(형태)은 서로 다르다. 이렇게 서로 다른 형상은 또한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다.
이처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져 있는 모든 개별 사물에는 그 안에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상 자체는 목적을 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위에도 모두 목적이 있다. 산책은 건강을 위해, 건강은 일하기 위해, 일은 월급을 받기 위해, 월급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p.28) 이러한 '목적'에 대한 물음은 무한히 수행될 수 없다(무한 소급은 결국 회의주의에 이르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의 끝에 궁극적 목적이 되는 존재, 즉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를 설정해놓았다. 이것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보았던 것이다.
개별 사물로서 다른 만물들이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이 '부동의 (원)동자'는 질료 없는 오직 순수한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만물을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하지만, 그 자신은 변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존재라 하여 '부동의 (원)동자'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지금의 삶의 지점과 만나는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 토마스 아키나리는 '고전이 나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부분을 통해 앞서 소개한 고전을 우리의 삶에 접목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