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마음 - 심리학, 미술관에 가다
윤현희 지음 / 지와인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미술의 마음]

- 그림에 내 마음이 있고, 내 마음에 그림이 남다 -

미술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독서라기보다는 미술관을 나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언제나 그랬고, 이 책도 그랬다. 목차를 펼치면 미술관 입장에 앞서 각각의 전시실을 소개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카라바조, 렘브란트, 페르메이르를 묶어놓은 바로크 시대

터너, 모네, 휘슬러를 묶어놓은 낭만시대

크뢰위에르, 앙케르&홀소에& 일스테드, 하메르스회를 묶어놓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덴마크 스타일

하삼, 존슬로안, 호퍼를 묶어놓은 현대

로스코, 트웜블리, 터렐을 묶어놓은 20세기 후반

이 중에 내가 가장 즐겨봤던 부분들을 묶어 그 감상을 전하고자 한다.


"방안의 행복" vs "도시의 우울"

칼 홀소에의 <반영>과 하삼의 <비 내리는 자정>

칼홀소에의 <반영>은 편안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자는 이 사진이 실려있는 부분 한켠에 '휘게hygge'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덴마크에서 건너와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개념 '휘게'는 만족감, 안락함, 유쾌함, 이완, 감사라는 감정과 마음이 결합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덴마크의 특성을 나타낸다.

칼홀소에를 비롯하여 앙케르, 일스테드 등 19세기 중후반 덴마크 코펜하겐 화가들은 집안의 따뜻함을 그려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왜 방안의 안락함, 행복에 집중했던 것일까.

일찍이 바이킹의 후예로 잘 알려진 덴마크는 북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장악하며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국가가 전쟁으로 확장하다 17세기 이후 스웨덴, 영국 등 인접 국가와의 잦은 전쟁에서 패하면서 영토와 인구의 1/3가량을 빼앗기고, 국가 수입원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덴마크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모래땅을 일구고,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영토를 개간하는 등 국토 재건에 성공한 덴마크 사람들은 나라밖에서 경험했던 패배감과 상실감을 내부의 결속을 통한 성취감, 만족감, 행복감으로 바꿔나갔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삶의 태도 - 휘게는 덴마크의 그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오늘날까지 지속되어온 것이었다. 제목이 <반영>인 것은 혹시 '휘게의 반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안락함을 자아내는 칼홀소에의 <반영>과 달리 하삼의 <비 내리는 자정>은 다소 서정적이기는 해도 따뜻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밤이어서 그럴까. 아무튼 <반영>을 보다가 <비 내리는 자정>을 보니,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한때의 유행어처럼 "집 밖은 위험하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밤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등을 적셔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차가움을... 거기에다 집에 가도 반겨주는 이 하나 없다면... 도시의 삶은 대개 그러지 않을까.


"도시는 언제나 차갑기만 할까?"

하삼의 <비 내리는 자정>과 <보스턴 코먼의 황혼>

하삼은 주로 도시의 풍경을 그렸다. 방안의 행복과 비교하여 도시가 언제나 차갑고 추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삼은 첫 유화 작품으로서 <보스턴 코먼의 황혼>을 그렸다. 보스턴 코먼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 중 하나라고 한다. 혹독한 기후로 유명한 보스턴이기도 하고, 도시의 겨울 풍경이란 대개 차갑고 추워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삼은 어둑어둑해져 가는 황혼의 컨셉으로 겨울의 도시 풍경을 담아냈다.

애잔한 갈색톤으로 물드는 보스턴 공원의 황혼은 겨울의 도시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원경의 키 큰 나무 뒤로, 저물어가는 주홍빛 석양의 마지막 온기가 투명하게 빛난다. 동그랗게 피어나는 상가 앞의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화가의 시선은 행인이 입에 문 담배의 미약한 불빛까지 놓치지 않았다. 눈 위를 뛰어다니는 새들과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어린 소녀의 마음까지 따뜻하다. 오렌지빛 광원은 냉기 가득한 저녁 풍경을 따뜻하게 데운다.

p.275


"빛이 언제나 따뜻함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삼의 <보스턴 코먼의 황혼>과 호퍼의 <작은 도시의 사무실>

빛, 따뜻한 색채는 대개 (기분에 있어) 좋고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그것들이 언제나 따뜻함을 갖는 것이 아님을 호퍼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비 내리는 자정>, <빗속의 거리>, <늦은 오후, 뉴욕의 겨울>을 통해 하삼이 도시의 풍경 너머로 보이는 우울을 포착했다면, 호퍼는 그 우울한 도시 안에 있는 개인의 멜랑꼴리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호퍼에게서 빛은 그림자와 대조를 이루며 인간존재의 고독과 소외를 형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에 빛은 더 이상 따뜻함과 긍정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 소외와 고독 속에 멜랑꼴리를 앓는 개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시간이 정지된듯한 화면, 대화와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의 모습은 인간이 삶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결핍감과 슬픔을 반영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쯤 지나 그린 <작은 도시의 사무실>에서 호퍼는 또 한 번 고립과 외로움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높이 올려진 고층 건물의 콘크리트 벽 속에 갇힌 남자는 산업사회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p.322


다시 <반영>, 그리고 발견한 그림을 읽는 마음

호퍼의 <작은 도시의 사무실>과 칼홀소에의 <반영>

나는 이 두 그림을 보고 시대와 그림을 그린 화가의 철학이 각각 다르겠지만, 화면에 있어 동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보일뿐 두 개다 얼굴의 정면이 보이지 않는 것은 같다. 또한 실내에 있으며 그 실내에 빛이 들어오는 것도 동일한 조건이라고 보았다. 명민한 사람들은 콘크리트의 회색빛으로 그림의 뭔가를 눈치챌 수도 있겠다. 그래서 왼쪽의 <작은 도시의 사무실>은 오른쪽의 <반영>과는 다르다고 쉽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책을 읽어 뭔가를 알게 된 나 말고, 미술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친구에게 이 두 그림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내가 책을 읽은 바와 같이 그와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나 느낌을 말할 줄 알았다. 친구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호퍼의 <작은 도시의 사무실>에 있는 개인을 보면 CEO 일 것 같기도 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하며 그의 시선은 뭔가 진취적일 것 같다.", "칼홀소에의 <반영>은 배우자가 먼저 떠난 것 마냥 쓸쓸하고 적막해 보인다."라는 감상을 내놓았다.

인테리어 컨셉 중에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라는 것이 있어, 그런 컨셉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 세대여서 그런지 콘크리트의 회색빛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휘게를 반영하는 듯한 칼홀소에의 <반영>도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감상해도 본래 의도와는 달리, 적적하거나 쓸쓸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친구의 감상을 들은 다음, 위 그림과 관련하여 내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들려주었다. 내가 책을 읽었다고 해서, 너의 감상과 해석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맞고 너의 감상과 해석은 틀린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심리學으로 본 그림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그림을 보는 관점은 다르고 감상은 자유라 믿어서이다. 그때 깨달았다. 미술의 마음을 읽는 데 있어 심리학은 그저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그것을 읽어내는 데에는 '나'의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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