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낙연쌤의 파란펜]
- 글쓰기는 자유다, 다만 선택받는 글은 따로 있다 -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글쓰기에 대해 배울 때 왜 그렇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나 싶다. 국어시간에 왜 그렇게 따분해하고 졸거나 영수와 밀회를 했는지 싶다. 이제 글쓰기에 약간 재미가 들었다고 생각이 들 무렵 과거 그 시간들이 후회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일기라도 많이 써볼 걸 그랬다.
나름의 꾸준한 독서를 시작하면서 새로이 감지되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바로 특정 장르의 책에 대해서 설레거나 흥분되거나 기대되거나 하는 등의 책에 대한 감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가 저자는 곧 '문지기'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책의 맨 앞표지는 커다란 성문 혹은 대문이 될 것이고,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그 안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어떤 설렘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 같다.
'낙연'이라는 글씨가 크게 되어 있어서 이낙연의 글쓰기 세계만 생각했었다. 서문 읽기가 반을 넘어가면서 글에 아리스토텔레스, 볼테르, 유협, 박지원과 이오덕 등 이른바 글쓰기에 있어 대문호의 이름들이 거론되자, 약간의 회의감이 들었다. 이낙연은 이낙연이고, 그들은 그들인데, '이낙연의 글쓰기를 그들과 엮는다?' '이낙연=대문호?'라고 하는 본문을 읽기도 전에 생겨버린 편견과도 같은 문장과 공식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이낙연'이라는 사람을 경험한 저자와 '이낙연'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독자로서의 나 사이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감정의 간극이 존재함을 알았다. 책의 서문을 읽고 나서 그랬다. 이 간극은 이 책, 특히 각 챕터 마지막 부분마다 실려있는 '이낙연 연설 수정본'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나는 어떤 특정 인물을 찬양하거나 신격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 사람에 대한 한치 건너 소문이나 매스미디어 영상으로 인해 그 사람에게 매몰되는 것을 항상 주의하려고 한다. 정치인의 경우 더욱 이에 해당한다. 나의 이런 성향과 앞서 서문을 읽고 난 뒤 들었던 약간의 회의감이 '이낙연의 연설 수정본'을 더 꼼꼼히 살펴보도록 했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구조로 되어있는데 각각의 하위 목차까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부 글의 마음
1. 글은 왜 쓰는가
2. 마음에 글씨를 심어라
3. 아이의 마음으로 써라
4. '마음의 탁본'을 떠라
2부 글의 뼈대
1. 기승전결이 답이다
2.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3. 칙칙폭폭 열차처럼
4. 모듈러 공법으로 쓰기
3부 글의 꾸밈
1. 백색의 글쓰기
2. 화장하지 않은 글이 더 예쁘다
3. 서사를 담아라
4. 유머를 활용하라
4부 글과 삶
1. 삶이 곧 글이다
2. 틀을 깨되 틀을 지켜라
3. 모든 초고는 허접쓰레기이다
4.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5. SNS 소통은 선택이 아닌 필수
목차의 제목만으로도 각각의 챕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은 이게 매력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원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각각의 챕터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과 그 근거로서 세계 여러 나라의 문호와 그들의 글쓰기를 필요에 따라 언급, 소개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앞에서 설명한 부분의 '실제'에 해당하는 '이낙연 연설팀의 초안'과 '이낙연이 연설을 직접 수정한 수정본'을 실어놓았다. 하나의 챕터는 각 소제목에 따르는 '이론'과 '실제'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이론'에 해당하는 앞부분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좋은 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씨앗은 생명을 품고, 글씨는 생각을 품는다(p.27)"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글씨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바로 해동해 꺼내 먹는 인스턴트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 구절은 나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마음의 그림'과 '마음의 소리'를 문장으로 담아내는 방법을 얘기하는 데 있어 저자가 언급한 '마음의 탁본'에 대한 글귀도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