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서로의 작업실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정도로 자주 만났다. 공원을 함께 산책하기도했고, 만나면서는 당대작가들과 선배들에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피카소가 마티스보다 12살 아래이고, 피카소의 프랑스어가 서툴기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자주 만났다.
위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삶의기쁨>은 마티스가 새로운 세계를 완벽히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누군가의 화풍을 모방한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삶의 기쁨>을 보기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풍성한 색채, 자유분방함, 관능미에 사람들은 압도되었다.
화단의 선두주자로 있던 마티스는 과거 불행했던 동료들을 생각해서 피카소를 일종의 동료애로서 잘 대해주었던 것 같다. 오랜기간 가난했던 인상주의자들, 인정받지 못한 마네, 삶그자체가 불행했던 반고흐, 무명의 세잔등. 그러나 피카소의 입장으로 보자면, 어릴적부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분위기에서 성장해온 그의 자존감으로서는 마티스와 가깝게 지낸다하더라도 누군가의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피카소도 성공을 바라보며 달렸을 것이다. 위대한 그림을 보여줄수 있느냐가 피카소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마티스의 <삶의 기쁨>과 <푸른누드>를 뛰어넘는, 힘과 충격을 지닌 무엇인가가 피카소에게 필요했다.
마티스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았다.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 충격이 조금씩 사그러들때쯤 마티스는 피카소의 작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쉽게 인정할수는 없었겠지만, 마티스가 보기에 피카소는 단순한 후배정도가 아니었다. 대담한 작품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하는 기질이 흡사 혁명가와 같았고, 이제는 후배가 아닌 라이벌로 의식해야하는 인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배울것이 많은 동료일수도 있다.
"입체주의는 회화의 공간구성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그 과정에서 현대회화의 새 장을 열었다."(p.214) "한때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의 일원이었던 드랭과 브라크는 이제 피카소 편으로 완전히 돌아섰다."(p.212)
"마티스가 죽은 1954년 이후 피카소는 마티스를 향해 복잡한 헌정의 의미가 담긴 그림을 계속 그렸을 뿐 아니라, 마티스가 그린 마티스의 딸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를 끝까지 자랑스레 자기 집에 걸어두었다. 한때 자신의 친구들이 화살을 던지며 농락했던 바로 그 그림을 말이다."(p.25)
"피카소에게 있어 마티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 사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