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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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약육강식의 원리만이 동물의 세계를 지배하는가?

왜 우리는 동물들의 생존경쟁을 인간사회까지 적용하는가?


 

  근대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합리를 최고의 가치라 여기고 이성의 지배 아래 살아왔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받는 시스템을 제일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모든 이들은 자아를 실현할 권리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이런 전제를 따르며 보다 자유로운 인생을 꿈꿨다.

 

   하지만 모든 이가 자유를 향한 갈망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받는다는 명제는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능력이 없는 자가 사회의 변두리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결국 자유를 쟁취한 사람은 경쟁에서 이긴 돈 있는 자뿐이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이 곧 자유가 됐고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세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생존경쟁에서 지면 자유를 포기해도 된다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여 계급사회에서 탈피했지만 또 다른 계급주의를 만들어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강한 동물만이 살아남듯, 인간의 사회 또한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고 굳게 믿었다.




 


 



  네덜란드의 동물행동학자이자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이 시대의 고착된 관점을 꼬집는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주창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와 가장 가깝지만 다른 영장류가 어떻게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지 관찰함으로 그를 뒷받침한다.


  동물세계의 작동 방식을 인간에 가져와야한다면, 공감의 원리를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침팬지를 비롯한 동물의 행동 방식을 실험하고 지켜보며 우리의 본능이 생존경쟁이라는 동기에서만 발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경쟁을 쉽게 동물이라면 갖는 본능으로 치부해왔지만,

 

사실 동물은 그 논리만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근대의 인간은 굉장히 합리적인 결과만을 추구한 탓에 바보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연대하고 화합할 수 있는 '공감이라는 능력을 스스로 배제했다고 결론 지었다. 이는 성과연봉제나 직원착취와 같은 노동사회의 예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업이 근로자와 인간끼리의 공감을 하지 못하고 숫자의 논리를 들이대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하지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시대가 갈수록 과거보다 젠더나 인종 등 개개인의 다양성에 조명하는 흐름이 보이기도 한다. 더 많은 투쟁과 갈등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공감이 공존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를 읽고

나는 우리가 사회에서 진정 자유를 찾고, 새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할 때가 되었음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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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대문 2 : 노장과 병법 편 - 잃어버린 참나를 찾는 동양철학의 본모습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2
박재희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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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 일컫는 동양철학은 우리 일상에 자주 등장하는 텍스트이다.

긴 세월동안 많은 이들이 수없이 인용하고, 진리로 받아들였다

재생산된 경우가 많기에 무뎌져서인지, 동양철학을 당연한 잔소리로 듣곤 했다.

그런 내가 노자를 어떻게 기억했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노자

염세적인.

욕심이 없는

부질없는

신선과 같은

 

나는 노자를 이런 단어들로 기억했다.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모조리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허무주의의 사상을 지닌 철학자로 말이다.

 

집착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다 부질없고, 고통의 연속이니 그냥 놓아라.

포기가 쉬운 나는 노자 또한 그런 허무에 빠진 예전 사람이겠거니 여겼다.

 

 

책을 조금 읽고 나서야 먹구름 같은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노자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속을 꿈꿉니다.”

 

 

공간의 시작은 바로 대문이다. 말 그대로 대문과 같은 책이다. 동양철학에 대해 제대로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읽기 좋다. 이해하기 쉬운 사례와 비유가 이해를 돕는다. 노자와 장자, 손자병법을 차근차근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강연과 저술을 통해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능숙하게 마련했다. 책의 세 꼭지 중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을 다룬 부분을 읽도록 권유하고 싶다.

 

 

1.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노자는 소수의 엘리트 권력자들이 행하는 통치권력을 비판한다. 백성들을 통치자의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장치를 지양한다. 통치자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유가 이론에 맞서고, 기득권에 대한 비판담론을 펼친 노자의 사상에 경외감이 일었다. 이는 민중 개인의 삶 각각을 존중한 철학이라고 본다.

 

노자는 지배자나 기득권을 가진 계층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보려 하지 말고,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인위적인 통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진정 백성들을 위한 위대한 정치라는 것입니다.”

 

 

2. 무위(無爲)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음을 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스스로 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강제하거나 간섭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 아이를 잘 키웠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바로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자는 군림하지 않는다. 분노로 통제하는 것이 없이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내가 만들었어도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낳았어도 소유하려 하지 마세요!

내가 했어도 자랑하지 마세요!

성공했어도 성공에 안주하지 마세요!”

 

3. 비움은 채움을 전제로 한다

비움의 순서를 모르고 있었다. 경험을 채우기도 전에 두려워서 그냥 내려놓았던 적이 몇 번인지.

지난 과거를 훑자면, 비운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포기했던 경험이 많다. ‘비움을 논하기엔 나는 아직 모자란 사람이었다.

노자는 채운사람이었다. 자신을 채우고 높이 올라가서 깨달은 후에야 비움을 추구한 것이다.

지금이 채우기 바빠야 할 때임을 이제는 안다.

 

 

   

사실 <<도덕경>>은 지식을 채워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본 사람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노자의 방법()은 그런 높고 강한 사람의 관점에서 시작되었지만, 긴 역사와 시대마다 있어온 다양한 해석에 힘입어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방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함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일이란 생각보다 어렵다. 책을 읽어도 아무 감흥이 없던 적도 여러 번이다. 그에 반해 확실히 얻어가는 바가 있어 마음이 든든해지는 경험을 했다. 내가 진정 나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 오래 읽혀온 책들은 방향을 속삭여 준다.


 

다양한 시대에 그 시대의 요구에 맞춰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철학이나 사상이 보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현실에 대한 보편성, 그것이 고전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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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특별판)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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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글을 쓰기에 앞서, 소설 작가 스티븐 킹이 말하는 글을 쓰면서 하지 말 것들에 위배되지 않을까 조금 두렵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에게 그동안의 습관들을 호되게 지적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글은 꾸준히 써야할 것이다. 앞으로의 글을 쓰며 지닐 태도에 대한 지침을 가져갈 수 있었다. 글쓰기에 대해 품고 있던 작은 의문들에 답을 내려 보았다.

 

 

1. ‘부사와 수동태를 한사코 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태껏 써왔던 과제, 일기 같은 것들을 대충 봐도 수동형 문장이 많다. 나는 이런 습관이 내 인생에서 제일 꾸준히 읽은 수능 영어문제집 해설지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읽은 것들이 그대로 쓰기의 습관이 되어 번역투가 글을 뒤덮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문장의 수동형을 바꿔야겠다는 문제의식이 들어서, 수동형 문장을 쓰지 말라는 부분이 유독 와닿았다.

 

수동태로 쓴 문장을 두 페이지쯤 읽고나면 이를테면 형편없는 소설이나 사무적인 서류 따위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수동태는 나약하고 우회적일 뿐 아니라 종종 괴롭기까지 하다. ”

 

결국에 수동형으로 바꿔 버리면 주장하는 주체가 말하고자 하는 무엇이 약해진다. 다시 말해, 주도적인 전달력을 거듭하여 줄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힘찬 글을 쓰고 싶다면, 능동태를 쓰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는 방법일 것 같다.

 

스티븐 킹은 수동태와 마찬가지로 부사도 남발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한다. 소심한 작가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조언이 되겠다.

 

그렇다. 이 부분에서 많이 찔렸다. 이것은 내 고민거리인데 부사를 넣지 않고서는 문장이 허전한 것만 같고, 그렇다고 넣으면 내 어휘가 너무나 빈약한 것 같아 항상 넣을지 말지 고민한다. 부사는 문장을 보충해 주는 것 같지만 문장을 약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2. 왜 나에게 영감(뮤즈)이 오지 않는 걸까?

 

답은 뻔하다.

 

나는 무엇보다 내 뇌에 부지런히 스티븐 킹만큼의 input을 넣지 않았다. 책의 전반부에는 스티븐 킹의 삶이 그려지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기괴한 장르의 영화를 좋아했다고 나온다. 극장에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영화만큼이나 책도 많이 읽고, 소설도 많이 썼다.

 

과제를 처음 시작하거나, 팀 프로젝트를 하거나, 짧은 글을 한편 쓸 때 막막하고 부족한 이유는 여태껏 나를 이룬 재료들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간과하고서 아무 것도 않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무작정 영감이 오길 기다리고 있던 적이 많다.

 

재료가 없다면, 꾸준히 작업할 의지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꾸준히, 정해진 작업 시간에 나를 놓아야 하겠다.

 

뮤즈를 기다리지 말라.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날마다 아홉시부터 정오까지, 또는 일곱 시부터 세시까지 반드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뮤즈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3.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써라의 법칙은 불변하는 진리인가

 

유혹하는 글쓰기말고도 글쓰는 방법을 소재로 하는 책을 몇 권 읽은 적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가 있다. 무슨 글이든 쓰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것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에 스티븐 킹이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다.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격언은 진부하지만 그 나름의 진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또 얼마만큼의 각성의 기운이 나에게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그냥 얻는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게으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욕심이 든다.

 

이렇듯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떠올린 단상들을 정리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초등학생의 반성문 같지만 내가 말할 것의 전부인 것 같다.

다만 글쓰기로 유혹하는 법이 무엇일지는 다시 한 번 읽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금은 그저 당장 글쓰기에 적용할 수 있는 팁들을 조금 담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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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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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함을 인식하는 순간으로부터 고통은 시작된다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연인, 가족, 집, 명예와 같은 내가 가진 것들이 나에게 영속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프랑스 작가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로 세상과 처음 조우하는 유년 시절부터 생의 중후반인 오십까지의 시간을 바라본다. 이 시간의 끝에는 결국에 '작별'의 고통을 안고 가는 인간의 숙명이 드러난다. 

 

두 편의 글을 읽은 후이보다 더 나은 제목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읽기 전에는 작중 인물이 계속되는 불운한 사건들로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사건들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어림짐작해보았다. '1999년 프랑스의 베스트셀러'라는 표지문구와 비오는 날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별 이유없는 이끌림에 고른 이 책은 생각 이상으로 일상적이었다시시하고 지루하다는 그런 뜻이라기보다 넓은 공감의 경험을 선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진부한 말이지만 모두가 겪었을또는 겪을 모두의 인생의 함축이다. 

 

어린 시절의 고향을 묘사하는 문장이 많고 다이나믹한 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대한 서사의 여운을 못 이기고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의 기분으로 있었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작별과 상실의 순간이 두려워서 일까,아니면  이미 겪어봤기 때문인 걸까.

 

태어난지 얼마 안된 어린 아이는 고귀하며 완전한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상실을 겪으며 머리가 커버린 소년은 어른이 된다. 그리고 세상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란 걸 깨닫는다.

 

 



해가 거듭하면서 우리는 어디가 어디인지를 차츰 알 수 있게 되었고 몇몇 장소를 우리만 아는 비밀 기지보이지 않는 왕국으로 삼았다이렇게 하여 숲속의 마구 뒤엉킨 바위들 사이로 흐르는 시내는 책 속에서처럼 마법의 골짜기라고 이름 지었다.

 

.

.

트랑은 마법의 고장온간 길들을 따라 헤매고 다니는 한 무리 아이들인 우리의 꿈이 가득 서린오직 우리의 상상만이 지배하는 영토로 변했다마을 이름농가 이름 하나하나가 다 수수께기요숨은 메시지였다.

 

어린 아이에게는 침범 못할 놀이의 세계가 있다. 놀이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그곳이 어두운 방 한구석이건작은 마을의 아늑한 아지트이건레몽에게는 그 유년의 공간이 트랑, 그리고 집이었다.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그리고 자크도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비밀을 잊어버린다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그러다가 어느 날그게 끝나버린다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놀이의 상실놀이의 망각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한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게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거야?

그렇다나는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그 경계를 넘어와 버리면 끝이다다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결코.

 


놀이는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어린 레몽이 처음 자각한 충격적인 순간이다놀이로 만들어진 완벽한 환상과 유희의 세계는 오래가지 않는다그 어린 날의 작은 환희를 깨부수는 것부터즉 울타리를 넘는 것이 앞으로 있을 수많은 작별의 시작이었다. 

 

삶도 언젠가는 끝나야할 놀이이다. 처음에는 작은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겠지만 점점 큰 것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영원히 남아있을 줄 알았던 것은 손바닥 안의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나는 우리가 트랑에 이사와서 자리 잡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더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버지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그것은 사랑의 죽음이었다.



그들 사이에 더는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술을 마셨던 것일까아니면 아버지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사랑이 죽어버린 것일까어린 아이는 이런 의문들을 품지 못한다.

 

나는 마치 무슨 주문인 양 다음과 같은 기도를 되풀이 했고 또 그 기도를 믿고 싶었다.

하느님 부디 우리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되도록 해주십시오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어린 우리의 행복 속에 들어앉아 꽁꽁 문을 닫아걸었다우리의 온갖 의식들놀이들그 마법의 세계 속에 그것은 잊어버리기 위한아닌척하기 위한 한낱 비눗방울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미칠 듯한 행복을 이기지 못하며 매일 매순간을 그윽하게 음미하는데다른 한편으로는 저녁마다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모두가 다 함게 뜨거운 가족애 속에서 진하게 살고 있는 바로 그때가정의 심장부는 모든 것이 타버린 재에 불과하다그 모든 것은 대체 얼마 동안이나 지탱할 수 있는 것일까우리 각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후의 밤마다 되뇐 내 마법의 기도는 영원히 그만큼 덧보태진 절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으로 내던져지면서 우리는 부모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나를 믿어줄 인연을 만난다그 안에서 받고 자라가는 행복을 입안 가득 음미한다. 

그리고  처음 말을 알게 되고더 많은 음식을 먹을 줄 알게 된다욕심이 생기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갖는 법을 배운다.

득(得)이란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부여되는 축복인 것이다누군가 그랬던가. 아이가 주먹을 쥐는 이유는 세상을 모두 잡기 위해서라고. 반대로 죽을 때쯤의 사람은 주먹을 쥐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와 형제의 근간가정의 중심인 부모님의 관계는 생각보다 그리 튼튼한 것이 아니었다세월과 생활의 풍파 속에 사랑은 그리 견고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상실감이란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여서 어리고 순진한 아이는 결국 절망에 도달했을 것이다. 특히나 어린 아이에게자신의 뿌리들이 흔들리는 것이란믿어왔던 무한한 사랑의 샘이 쪼개지는 순간이란 세상의 붕괴와 같다.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얼마나 될까나 역시도 어릴 적부터 수없이 그려온 그 관계를 몇십년간 유지하는 것이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걸 깨달은 것은 막상 얼마 되지 않았다.


 

 

94

나는 문득 트랑에 이사온 직후 우리가 즐겨했던 어린아이 놀이를 상기한다우리 어린 축의 아이들은 묘지에서 회색 돌 위에 새겨놓은 아기천사상을 훔쳐가려고 아기무덤들을 찾아다녔다색칠한 작은 아기천사상은 예뻐 보였기 때문에 수리한 낡은 장난감병뚜껑상표가 예쁜 깡통작은 장난감 자동차셀룰로이드제의 작은 인형 등 우리가 주워 들인 수집품 목록에 그것도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묘지는 놀이터였다놀이터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가장 흥미진진한 놀이터였다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126

이게 끝이란 것을 알 수 있다다시는 이 집이 우리 집이 아닐 것임을어린 시절의 집행복과 불행의 집다 끝났다나는 벌써부터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어서 떠나자이 집은 죽음의 냄새가 난다.

 

130

그러나 방 하나하나는가구 하나하나는물건 하나하나는 한 번씩의 작별이다이 집은 이제 더는 우리 집이 아니다어머니의 그늘이 도처에 깔려있다어머니의 목소리어머니의 침묵어머니가 없는 이집은 죽은 집이다우리는 집 안에 바싹 붙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소리를 내지만 이제 우리가 여기서 쫓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마치 지상낙원에서 쫓겨나듯.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제 레몽이 잡을 실체는 사라져간다과거의 행복의 집합인 집은 지금의 집과는 다른 곳이.  이제 그것을 의지할 것은 영혼에 조각된 기억들 뿐이다오십년이 지나서야 이제 작별의 순간을 모두 겪은 어른이 된다유년의 가족은 언젠가 사라진다수많은 만남과 생성을 당연하게 기뻐했던 것에 반해 이별에 따르는 무게란 후회와 회한의 무게로 가혹하다

 

 

 

청춘화양연화그리움.

이런 말들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난걸까?

우리는 왜 애를 쓰며 '인생사진'을 남기고, 많은 것을 기록하고 저장하려 할까?

그것은 작별을 조금 더 미뤄보려는 않으려는 인간의 작은 고집이다. 


그저 '순간'에 조금 더 내 남은 힘을 쏟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작별에 무뎌지기를 기다리기보다,어차피 겪을 후회의 무게는 조금이나마 가볍게 느끼고 싶다. 





영원하지 않아서 더 빛이 나는 것.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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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옻닭 2017-08-1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줄은 문득 먹먹해지는 문장이네요..
 
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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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어느새인가부터어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나이 든 이들은 이미 우리와 다른 세대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고, 이 시대 나는 내가 벌이할 일조차 제대로 못 찾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명문이니 격언이니 하는 것들은 내 귓바퀴에 부딪혀 떨어질 뿐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오래가는 행복이란 많지 않았다. 바로 앞만 내다보는 삶, 도피하듯 휴학을 하고, 매번 짧은 오락거리들만을 급하게 삼켜내고, 눈 앞의 지루함만을 해소하기 일쑤였다. 베짱이처럼 사는 것이 이 삶의 최고 미덕이라 믿었다.

 

   그런 즉각적인 삶의 반복이 나라고 달가운 건 아니다. 순간의 즐거움은 허무함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무엇을 하며 살지 모르는 외로운 나만이 남아있다. 지금 나에게는 내가 오랫동안 지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외면했지만 곧 다가올 여정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인간과 삶, 영원과 사랑에 관한 21편의 수필로 된 책이다. 1960년대에 초판이 나오고 재출간 되었다. 젊은 이들에 대한 권고, 청년기,장년기,노년기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내야 좋을지, 인간은 왜 영원을 쫓는 존재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인생이라는 산을 먼저 오른 어른이 지나간 여정에 대하여 말해준다.  

  산을 내려오는 어른이 나를 보고 어깨를 도닥이며 말하는 듯하다.고루하고, 관념적이고 당연한 말이다. 어쩌면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기에 긴장이 풀려 무뎌진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당연함이 필요했다. 인간으로 살고 있는 나는 어떤 근원적인 가치를 갈망하고 있기에 이렇게 괴로운가 알기 위해서 말이다.

   ​ 글 사이에 보리밭 풍경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드넓은 보리밭은 청량한 하늘 밑에서 푸르를 때도 있고 석양에 비쳐 노란빛을 띄기도 한다. (익은 보리일지도 모르지만) 바쁜 걸음으로 책을 읽는 중 잠시 머물게 되는 기쁜 순간이었다.

​부분 포착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사이도 상당히 많은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내 어렸을 때의 장난을 되풀이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들은 남들이 다 걷는 대학에의 길을 택하며, 누구나 가지는 4년의 세월을 학창생활로 보낸다. ... 그러는 사이에 지식의 조각들은 늘어가며,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었다고 자부도한다. 계통도 체계도 없는 지식의 조각들을 넘칠 정도로 많이 갖는 청년들도 있다.

몇 해 뒤에는 졸업을 한다. 사회에 나가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에 약간씩 자신을 느끼며 반성해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많이 배웠고 지식의 조각들을 주워넣었는데도 마침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내 호주머니에 장난감이 남아 있지 않듯이 모든 것이 어디론가 없어지고 말았음을 느낀다. 역시, 문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이렇게 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자의적인 행동보다는 타의적으로, 사회의 기대에 발맞추어 가기 위함도 있다. 직업 우선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 뒤에 '나'가 존재한다. 그러니 바쁘게 지식의 파편을 모으는데 결국에는 숫자놀음을 위한 것이기에 빨리 휘발될 뿐이다. 나는 여전히 이런 우리 세대에 대한 연민,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마음에 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문제를 가져야 하느냐 한다면, 나를 잃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문제란, 곧 해결할 여지와 희망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문제라는 것이 굉장한 대의는 아닐지라도, 나라는 사람의 신념을 비추어 내던져진다면 사회가 청년을 한없이 내몰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화두를 던지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일상에서 많이 쓰이지만 불교로부터 유래한 표현이다. ​진리 혹은 깨달음을 향해 던지는 물음을 말한다. 시간이 흐르며 나날이 발전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화두가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 날의 나는 과연 어떤 화두를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내가 주어진 뒤, 내 삶이 던져진 뒤에는 이 누구도 모르는 우연이 절대적인 필연성과 운명적인 결정성을 지니고 나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절대적인 것이 되며, 우리들의 생존성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으로 변한다. 정히 인간은 우연에서 절대, 무에서 유, 공허에서 실재를 얻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정신은 이 세계가 소유하는 것보다도 더 깊은 문제를 간직하고 있다. 파스칼이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어도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우주보다도 위대하다고 한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우리의 삶은 그 삶 자체로 의미가 있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작업은 그저 '영원'을 향한 갈망일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삶의 활력이 되는 작업이라고 여긴다.

 

  

잠시나마 먼 발치에서 삶을 바라보았다. 잊고있던 가치를 다시금 되뇌었고, 가끔은 삶을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고 여겨보는 것도 꽤 괜찮겠구나 싶었다. 대학을 벗어난 후의 삶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지금과 나중의 삶을 공허함으로만 여기지 않겠노라 생각한 것만으로도 기쁜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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