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과거 모든 시대에, 광장은 항상 존재하였던 것이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번역) 507
미하일 바흐친 지음, 이덕형 외 옮김 / 아카넷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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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워낙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찐(Mikhail M. Bakhtin 러시아, 1895∼1975)은 1895년 1월 17일 모스크바 남부의 오룔(Oryol)시에서 은행원 미하일 니꼴라예비치 바흐찐과 바르바라 자하로브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95년 12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노동자계급해방동맹”을 결성한다. 이것은 앞으로 바흐찐의 앞날에 펼쳐질 러시아 혁명의 파고가 그의 삶에 어떤 험난한 역경들을 펼쳐질지 미리 예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바흐찐은 이미 12살 무렵을 전후해 독일어 철학서를 탐독하기 시작했고, 1918년 대학 수업을 마친 그는 M.I.까간, 뿜빤스키, V.N.볼로쉬노프 등과 함께 이른바 ‘바흐찐 써클’을 결성한다. 1928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트로츠키가 전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스탈린과의 투쟁을 호소할 무렵 바흐찐은 우익지식인 그룹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친구 뿜빤스키와 함께 체포된다. 이듬해 바흐찐은 지정 주소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예비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지만 여러 번의 심문 끝에 유죄판결을 받고 강제수용소 5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때 바흐찐은 다발성 골수염이 악화되어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30년 그는 부인과 까간, 고리키, 알렉세이 톨스토이 등의 탄원으로 금고5년형에서 추방 5년으로 형이 감형된다. 이해 마야코프스키가 자살한다. 1932년 그의 형 니꼴라이가 망명하여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문학박사 및 철학자로 활동하며 비트겐슈타인과 교류한다. 유형기간이 종료된 뒤에도 바흐찐은 카자흐스탄에 머물며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934년 소련은 제1회 전소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기본적 창작방법으로 승인한다. 그는 나이 40세에 이르러 동료 메드베제프의 추천으로 모르도바 교육대학에서 문학개론과 문학교수법을 담당해 강의하기 시작한다. 이무렵 소련에서는 형식주의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고, 학자와 예술가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개시된다. 이듬해 바흐찐은 스스로 학교를 퇴직하고 모스크바 근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한다. 42세에 다발성 골수염이 악화되어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만다. 1942년 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에서 '문학장르로서의 소설'을 발표(훗날 '서사시와 장편소설'로 개칭)하지만 곧 독소전쟁이 발발한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어머니와 여자 형제가 모두 사망한다.

바흐찐의 논문도 전쟁 중 폭격으로 불타 없어진다. 다행히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모르도바 대학 교육대학 일반문학 담당 조교수로 임명되어 강의하게 되었다. 1950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민중문화의 문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수정해 제출한다. 같은 해 형 니꼴라이가 영국에서 사망한다. 1961년 정년퇴임한 뒤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를 출판한다. 이 책을 통해 바흐찐은 학계의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69세이던 1965년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민중문화의 문제"가 정식으로 출판된다. 1967년 그에 대한 이전 판결의 혐의가 벗겨져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1973년 그의 나이 77세에 이르러 바흐찐 연구자 이바노프에 의해 메드베제프와 볼로쉬노프의 이름으로 저술된 상당수의 논문들이 바흐찐의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1975년 3월 7일. 러시아 혁명이란 역사의 파란 속에서 도리어 민중의 웃음에서 건강한 희망과 하잘 것 없는 것으로 평가받던 카니발(축제)에서 민중의 가치 전복성, 소통에 대한 굳은 믿음을 선사해준 미하일 바흐찐이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간단하게 살펴 본 바흐찐의 생애다.

역사적으로 정의된 민중문화의 웃음의 형식은, 일반적인 엄숙함에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일방적, 도그마적 엄숙함의 형식에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고대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장르에서 가장 심오하게 표현되고 있었던 비극적 엄숙함을 알고 있었다. 비극적 엄숙함은 보편주의적이다(그러므로 <비극적 세계관>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또한 비극적 엄숙함은 창조적인 파멸의 이데아가 스며들어 있다. 비극적 엄숙함은 절대적인 독단주의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그마적 비극은 도그마적 웃음처럼, 불가능한 것이다(고전주의적 비극은 독단주의를 제압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본보기이다). 독단주의는 그 어떤 형식과 다양성 속에서도 진정한 비극을, 진정한 웃음을 모두 사멸시키고 만다. 고대문화의 제반 조건 속에서 비극적 엄숙함은 세계에 대한 웃음의 측면을 배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과 공존하고 있었다. …<중략>… 고대의 엄숙함은 웃음이나 패러디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웃음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정하고 보완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세계에서 공식문화와 민중문화 사이에는 중세에서와 같은 그러한 첨예한 대립은 있을 수 없었다. …<중략>… 진정한 웃음은 양면가치적이고 보편적이며, 엄숙함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정화하여 그 자리를 메워준다. 독단주의, 일면성, 경직성, 광신(狂信)과 무조건성, 공포와 위협적 요소, 교훈적 성격, 소박성과 환상, 조악한 일차원성(一次元性)과 일의성(一意性), 우둔한 목청 돋구기를 정화시키는 것이다. <본문 193-195쪽>

바흐찐에게 어쩐지 최인훈이 4.19직후 잠시 동안 해방된 남한의 한 귀퉁이에서 발표한 "광장"이 연상된다면 최소한 나의 기준으로는 정확하게 본 것이다. "광장""밀실", 혹자는 광장은 남한을, 밀실은 북한을 상징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광장과 밀실은 인간의 야만이 문명 속에서도 잔인하게 꽃피듯 어디에나 있다.

바흐찐은『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의 서문에서 프랑수아 라블레의 문학사적 위치를 유럽 근대문학의 창시자들이라 할 수 있는 단테, 보카치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의 대열에 올릴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라블레가 이들 근대문학의 창시자들 가운데 가장 민주적인 작가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라블레가 "다른 작가들보다 민중적(民衆的)원천들, 특히 그 특징적인 원천들과 밀접하고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여 년에 걸친 민중문화의 발전 속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될 수 있는 라블레의 이런 요소들이 비록 17세기, 18세기를 거치며 퇴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런 요소들은 살아남아 있다.

웃음의 퇴화(退化) 과정은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던 것인가?
17세기에는 절대군주제라는 신질서의 안정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새롭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전세계 - 역사적 형식>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 형식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고전주의 미학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을 찾아내고 있었다. 합리주의와 고전주의는 새로운 공식 문화의 기본적 특징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화는 교회-봉건 문화와는 상이했지만, 비록 도그마적인 분량이 적었을 뿐, 이전과 같은 권위주의적인 엄숙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르크스의 말에 의하면, 새로운 지배 계급이 필연적이고 영원한 진리라고 제시하는 새로운 지배 개념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165쪽>

바흐찐은 라블레에게 있어 그로테스크(Grotesque)한 기법(바흐찐의 문학 이론에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카니발적 현상이 하나의 역동적인 소설 기법으로 수용된 문학 양식. 기존의 고정된 사물의 형태나 예술적  양식을 일그러뜨리거나 과장된 모습으로 부풀려 자유분방하고도 기상천외한 형태로 재창조해 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그릇된 전체상을 파괴하고 재정립하며, 사물과 관념사이의 허위에 가득 찬 위계적 연결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해체하고, 그로부터 사물들을 해방시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타고난 본성에 맞는 자유로운  결합과 이상적인 생명성의 고양에 이를 수 있도록 하려는 예술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계급과 국가 사회 제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앞서 살펴본 고대세계에서 공식문화와 민중문화 사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성(神聖)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엄숙함과 우스꽝스러운 관점"들은 모두 거룩한 것, 다시 말해 공식적인 것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근대 부르주아 문화와 미학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웃음에 대한 그릇된 문학연구들은 웃음의 요소를 가장 미천한 곳에 자리하게 하였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기법)에 기반한 웃음은 비공식적인 관점의 위치로 전락하였다.

중세의 웃음은 모든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영역들과 모든 공식적인 삶과 사회 생활의 엄격한 형식들의 범주 외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략>… 중세 공식 문화의 특징은 일방적인 엄숙함의 음조였다. …<중략>…  성 요한크리소스톰은 어릿광대와 웃음이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악마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도들은 항상 엄숙해야만 하고, 자신의 죄악에 대해 참회해야 하고 슬퍼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문 125쪽>

바흐찐은 계급문화 속의 엄숙함 -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것이며 강제와 금지, 제약들로 이루어진 - 은 항상 공포와 위협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중세 민중들은 이런 엄숙함의 공포와 위협에 대한 승리가 웃음에 있음을 감지하였는데, 웃음은 도적적 공포를 무화시키고, 죽음과 내세에 따르는 징벌, 지옥에 대한 승리로 이끌어 내는 요소로 보았다. 축제(카니발)은 모든 공식적인 체계들의 효력과 금지들, 계층 질서를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힘을 지녔다. 오늘날 "문화연구"에서 대중문화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놓고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흐찐이 주장하는 카니발의 이런 속성에 기대고 있다. 카니발은 공식문화(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닌 관습적이고 타성적인 문화형식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대중의 즐거움, 웃음은 지배계급이 제공하는 공식문화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한 방식으로 이를 기이한 형태로 뒤바꿔 버린다.(존 피스크 식으로 말하자면 대중은 수동적 거부로부터 적극적 거부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로 지배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물론 이때 가장 적극적인 거부는 텍스트의 전복적 다시 읽기를 통한 새로운 텍스트의 창조다. 종종 이것은 패러디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흐찐은 17세기 이후 웃음의 퇴화 해체 과정이 웃음의 지배 영역을 점차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웃음은 역사적, 보편적 개성(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시대 정신"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를)을 풍자하는 것에서 점차 개인적인 조롱으로 사적인 영역으로 후퇴한다. 그는 이것이 17세기로부터 시작해 18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모델 자체가 일반화, 경험론적 추상화, 전형화와 같은 요소들의 의의가 현저하게 증가된 결과 개별적인 단독자(單獨者)가 남게 된 까닭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이 출현한 것이다. 바흐찐은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유쾌한 상대성"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유쾌한 상대성"이란 바흐찐의 표현대로 타자에 대한 배려, 타자의 입장으로 나를 전이시키는 상호주관적인 인식 태도를 말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는 세계와의 화해, "삶과 죽음과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닌 유기적 전체처럼 부분과 부분들의 공존을 전제하면서, 그들의 전체가 단일한 하나의 총체적 형상을 구현하는 세계감각이며, 공존의 의지마저 상실하게 될 때 세계는 "거대한 미로"가 된다고 말한다.

16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라블레의 소설을 읽고 웃었는데, 웃는다고 해서 그의 소설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쾌활한 웃음은 웬일인지 경멸당하고, 차원이 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본문 188쪽>

바흐찐은 합리적 이성에 기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새로운 엄숙함을 만들어냈음을 비판한다. 나의 개인적인 추측임을 전제로 이야기하자면 바흐친이 이런 비판을 가한 까닭 가운데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 스탈린 체제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공식적이고 기본적인 창작방법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채택할 무렵 유형생활을 떠나야 했던 경험, 지노비에프와 트로츠키가 숙청되는 등, 한 때 혁명동지로 강철 같은 대오를 자랑하던 이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모함하며 잔인한 숙청을 일삼던 시기를 살아낸 경험 말이다. 그렇기에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닌가.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바흐찐 자신도 그런 경험을 치렀다. 이때 유형지에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사들에게 금지된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극을 해결한 뒤 윌리엄 수사가 한 그런 말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바흐찐은 공식적이고 성스러운 것(공식문화)들이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한 것들을, 삶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들로부터 인간 자신을 해방하는 힘으로 웃음을 선택했다. 나의 결론을 대신하여 이 책의 말미에 적힌 바흐찐의 생생한 목소리를 옮기는 것이 낫겠다.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결코 지배계급의 공식문화와 합쳐지지 않았던 민중의 독특한 웃음 문화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코 과거 인류 역사의 문화적, 문학적 삶과 투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를 조명할 때에, 우리는 자주 "각 시대의 말을 믿도록", 즉 그 시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많건 적건)의 주창자들을 믿도록 강요받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중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민중의 순수하고 흠없는 표현을 찾아서 해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는 중세와 중세 문화에 대해 매우 단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모든 움직임들은 웃고 있는 민중들의 합창 앞에서 공연되었다.(물론 민중은 스스로가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참가자이다. 그러나,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 다른 차이점들은 별개로 하고 - 민중은 양면가치적인 웃음을 웃을 권리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중략>... 민중문화는 세계사의 각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 모든 시대에, 광장은 항상 존재하였던 것이다. <본문 721-722쪽>

* 오늘 처음으로 일독한 책에 대해 겁없이 리뷰를 올리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언제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에 대해선 별을 다섯 밖에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울 만큰 전공자들이 큰 공을 들여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바흐찐에게 빚진 것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단 분량면에서 독자를 압도한다. 필자 연보와 옮긴이 후기 등까지 포함하면 거의 800쪽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와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되 "엄숙"해지고 싶지 않은 독자라면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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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탈근대의 시작
부정변증법 한길그레이트북스 33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한길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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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파악했다면 아도르노는 역사를 지배의 역사로 파악한다. 이는 자연의 인간에 대한 지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 인간의 인간에 의한 지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맑스와 다른 지점에 있다. 맑스 또한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론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인간이라는 주체가 어떻게 객체라는 자연을 전유하여 사회생산력을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논리를 펼친 것이 사실이다. 역사를 자연의 확장으로 아도르노에 의하면 제2의 자연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아킬레스의 건이라 생각한다.

인간 중심의 사유와 사회 체제가 가져온 폐해들을 생각해보라. 보편성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포섭된 특수자들, 이성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것들, 비동일성, 개인에게 가하는 동일성의 원리. 이런 것들에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도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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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오주석 선생님, 당신을 그리워하며...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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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술사학자 오주석(吳柱錫) 선생이 1년 반의 백혈병 투병 끝에 지난 5일 오후 9시 반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에서 향년 49세의 일기로 소천(召天)하셨다는 기사를 읽을 때 제 마음은 쿵하고 저 밑으로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매번 당신의 건강을 묻던 김명인, 이용식, 노대명, 장석남, 백원담, 김진방 편집위원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자문회의에 참가하시던 김동춘, 홍윤기, 한홍구 선생님들이 늘 당신의 안부를 물었는데, 번번이 제가 연락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다가 건강이 많이 호전되셨다는  당신의 이야기가 있었노라, 조만간 한 번 나오시겠노라, 하시더란 말씀만 그렇게 전해드렸었는데 별안간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 번도 병문안을 가보지 못하고 신문 기사로 그 소식을 접한 제 게으름에 부끄러움으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오주석 선생과의 인연은 "옛그림읽기의 즐거움"을 펴낸 지난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야 하겠습니다. 저는 오주석 선생을 처음엔 저자와 독자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고 누구인지 미술쪽, 우리 한국고미술 분야에 정말 괜찮은 감식안과 문재를 지닌 미술사학자가 등장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열화당에서 근무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옛그림읽기의 즐거움"에 실린 "인왕제색도""고사관수도"의 이미지를 복사하여 액자로 만들기도 했는데, 오주석 선생과 저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그런 관계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지난 2001년 9월부터 당신이 제가 몸담고 있는 잡지의 편집자문위원이 되셔서 한달에 한 번씩이나마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올해가 2005년이니 햇수로는 4년이고, 만 3년 정도의 기간동안 뵈올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신의 부음에 즈음하여 신문에 실린 고인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엄정한 감식안과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 고증으로 회화사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써 왔다”고 사람들은 평하더군요. 오주석 선생의 그간 활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평가는 지극히 당연하나 그럼에도 당신의 넓은 도량과 흐뭇하고 온유한 미소, 우리 미술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편집자들은 본의든 아니든 일반 독자들이라면 글이나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유명 필자들을 실제로 곁에서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미인으로 알려진 어떤 작가는 실제로 보면 사진만 못한 경우도 있고, 누구는 작품 활동, 혹은 사회 활동은 매우 건강한 듯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풍문을 먼저 접하게 되거나 혹은 직접 목격하게 되는 일들도 종종 있지요. 거리와 시간이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좀 더 실제 모습에 가까운 맨얼굴을 보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업무적인 특성상 그런 분들을 가까이 뵙게 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만하면 단련이 될 법도 한데, 여전히 글보다 인격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의 실망감은 일반 독자들이 느끼는 것 못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 오주석 선생님에게서 제가 받은 인상은 글과 사람이 일치하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의 문장이 풍기는 고아(古雅)한 맛이 당신의 실제 행동이나 어투에서도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책에서도 밝히듯 "무릇 그림이란 마음 가는 바를 따르는 것이리라(夫畵者從于心者也)" 하였는데, 그 말씀대로 당신 역시 마음 가는 바대로 글을 썼고, 글 가는 대로 따르기 위해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기회 닿을 때마다 주역 공부의 즐거움에 대해 말씀하셨고, 앞서간 선배이자 스승이셨던 강우방 선생님에 대해서도 늘 겸손하게 말씀하셨고, 거문고의 즐거움, 옛 선비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호해야 하는 순간엔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종종 당신께서 말씀하는 세상사 이야기가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은 결국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정치란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다스리는 이가 바르게 하면 누가 감히 부정을 하리요.(政者正也, 子歸以正, 孰敢不正)"와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병증을 자세히 알기 전에 저는 선생을 모시고, 함께 역사기행을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신께 좀 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 것, 좀 더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당신은 늘 음악과 술을 즐겨하였고, 조선시대의 도학자들이 지닌 높은 정신세계를 흠모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거문고를 익히고 연주하고, 옛그림을 보되 이를 해석하기 보다는 이를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비록,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주장하는 바에 자신의 이익이나 영달을 꾀하는 법이 없었고, 세사(世事)의 바르지 못함을 참지 아니했습니다. 특히 우리 옛 미술을 욕되게 하는 비평과 해석에 대해서는 더욱더 참지 아니하였습니다. 가끔 당신은 "고흐" "김홍도" 중 어느 그림이 더 귀한가를 묻곤 하셨습니다. 물론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는 고흐의 그림이 더욱 비싼 값에 팔릴 테지만, 그것은 단지 고흐가 복이 있어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이들, 후손이 부자여서 그럴 뿐 김홍도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의 귀하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시곤 했습니다.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이 없으나 다만 어떻게 볼 수 있을까가 당신에게는 더욱 중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가진 존재(人者天地之心也)"라는 당신의 말씀은 어쩌면 이 책 전체, 당신의 삶 전체를 관류하는 커다란 흐름이란 생각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들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잊어버린 채 날마다 바뀌는 표면을 어떻게 가꾸고, 숨길까를 생각하는 약삭빠른, 천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당신이 펴낸 글과 마음은 "좋은 것은 변하지 않고 더욱이 가장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듯 합니다.

이 책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2"에 별도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이 책에 수록된 6편의 글 가운데 "한 선비의 단아한 삶 : '이채 초상'"을 제외하고 나머지 "소나무 아래 산중호걸 :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화폭에 가득 번진 봄빛 :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 문인화, 옛 선비 그림의 아정(雅正)한 세계, 겨레를 기린 영원의 노래 : 정선의 '금강전도', 딸에게 준 유배객의 마음 :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뿌리뽑힌 조국의 비애 :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 조선과 이조"의 5편은 "황해문화" 2001년 가을호(통권32호)부터 2002년 가을호(통권36호)에 연재되었던 글들입니다. 당신께 원고와 그림을 받아 작업을 하는 동안 매호 당신의 원고를 미리 읽는 즐거움으로 작업의 고단함을 잊었더랬습니다. 잡지의 어쩔 수 없는 여건상 그림들을 컬러 도판으로 수록하지 못해 늘 안타까와했는데, 이렇게 컬러 도판의 좋은 화질로 작업되어 책으로 묶인 것을 보니 그때의 죄송한 마음이 더욱 도집니다.

당신이 이리도 허망하게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역사기행 갔을 때, 당신의 쑥빛 나는 수건을 탐내하자 지금은 땀에 젖어 안되니 나중에 서울가서 잘 빨아서 그 때 주겠노라 하셨는데, 그 뒤로 당신이 몸져 누울 줄 알았겠습니까. 당신은 우리가 서양미술가들은 알고, 좋아하되, 단원의 그림은 그만 못하다 여기는 자세를 질타하고, 우리가 우리 옛 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이를 마음으로부터 좋다 여기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와 했습니다. 이제 뉘 있어 우리의 이런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겠습니까. 조선의 그림이 초기에는 중국 그림에 묻히고, 구한말 강점기를 거치며 왜색에 침탈당한 사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여 이제라도 우리 옛그림의 당당한 아름다움에 대해 당신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옛 것의 아름다움을, 당신의 그 마음과 해석을 즐겨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학문적으로 더욱 많은 일들을 하여 주실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등지니 애석한 마음 누를 길이 없습니다.

당신의 일주기를 맞아 나온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2"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곁에 두고 오래도록 당신을 추억하고 그리워하겠습니다.

2006. 2. 風簫軒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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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고슴도치(마르크스)를 읽는 여우(이사야 벌린)의 교양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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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리뷰를 쓸까말까 하는 생각에 내내 사로잡혔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우선 작가는 나와 동년배다. 어설픈 세대공감론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동년배라는 것은 불운한 시대라면 불운한대로 손쉽다면 손쉬운 대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이 공감이 단순한 공감의 차원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종종 남의 이야기하듯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류처럼 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를 빌린 나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로 시작하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였던 뼈아픈, 지극히 개인적이라 더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묻어둘 수 없는 사회적 이야기, 그것이 성(sex)의 이야기이다.

정송희의 때늦은 첫 작품집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모두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 "가로막힘(blocked)", 2막 "이야기하기(telling)", 3막 "봄(seeing)"이 그것이다. 1막 가운데 첫 번째 단편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한 젊은 연인의 사랑과 접촉을 차단하게 만드는 과거의 경험에 대한 반추로 시작한다. 이제 막 몽우리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더듬는 담임을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가로막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어머니도 촌지를 가져다 건넬 뿐이었다.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을까. 믿음을, 구원의 순간을 외면당한 어린이에게 세상은 더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존재들은 공모자가 된다.

그 순간 남자가 와락 껴안으며 말한다. "미안해." "왜 자기가 미안해? 자기가 남자 대표야?"라고 여자는 말하고, 이번엔 남자의  회상이 시작된다. 고3 무렵 놀러온 옆집 여자 아이의 여린 성기를 만지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단지 만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가을이 오고, 남자 네는 이사하게 되고 그는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다. 그때도 그는 끝내 어린 소녀에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남기지 못했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여자 친구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리고 늦게라도 그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라고 교과서에서라면 그렇게 충고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전세계적으로 근현대 들어 국가나 국가기구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 '진실과화해위원회' 형태의 기구를 만들어 과거사 진상규명을 시도한 나라들은 대략 30여 개국 미만으로 알고 있다. 물론, 학살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 비하자면 이 숫자도 적은 것은 아니고, 진상규명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측면에선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 가운데 정식 보고서를 채택할 수 있었던 나라는 다시 그 절반 정도로 떨어진다. 단지 진실을 고백할 뿐 그것만으로 더이상 처벌은 없을 것을 다짐하지만 실제로 묻힌 진실과 진실이 서로 화해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숫자는 잘 보여준다. 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하도록 반대 세력들은 집요한 공작을 가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므로, 앞서 고백한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물적, 정신적 린치를 당하기 마련이다. 침묵의 공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가해자들의 공모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여성을 상대로 한 남성 사회의 불문율이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사내에게 돌을 던져라!" 어쩌면 성적으로 전복된 여성 예수가 출현한다면 선량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숱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가련한(?) 한 명의 성폭력 사내에게 그리 말할 지도 모르겠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의 사내는 그 여자 친구에게는 상대의 고통을 이해한, 꽤 괜찮은 사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짐승 같은 사내로 기억될 수도 있다.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 내 마음을 이리도 무겁게 내리누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내 안에 너 있기에... 진실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말이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나 제법 긴 3부작 "그땐 그게 뭔지 몰랐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한 여대생이 동아리 친구들이랑 MT를 갔다가 술에 취했고, 딱히 강간이라 말하기에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한 정도의 섹스, 아니면 그땐 사랑했으나 하고나서 보니 사랑하지 않았더라는 식의 사랑을 볼모로 한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은 섹스, 그렇다고 명확한 강간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니, 혹여 그 점에 대해 오해는 말길 바란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고, 남의 이야기하듯 했으나 실제 피해자였거나 가해자였으며 혹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어쩌면 그조차도 초월한 경험으로 승화시켜버린 이야기들이다. 그만큼 흔하게 들었고, 체험했던 이야기들이라 도리어 진부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이런 류의 이야기는 TV단막극들을 통해 접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문명 개화된 것이란 뜻인가? 모두가 남의 이야기하듯 하여 도리어 배제시켜 버린 우리들의 체험이 아니었던가.

위의 작품들이 지닌 문제의식에 무거움에 비해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 혹은 이야기 구조는 다소 수동적이고, 식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묘한 느낌들을 받게 되는 이유는 작가 자신이 이야기를 결말 짓는 형태로 이야기의 막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들의 느낌과 리얼리티를 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미학적으로는 아쉽지 않은 데도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기에 오래도록 곱씹게 만든다. 1막과 3막의 이야기들이 무겁다면, 2막 이야기하기에 수록된 일련의 짤막한 꽁트들은 작가가 생각하는 "신체적 접촉"에 대한 일종의 해법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경쾌한 수다의 성격을 띤다. 아마도 2막에 있어 작가의 문제의식을 드러내주는 인용이라 생각해 옮겨 본다.

"인간에게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낙관론만을 어린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문화적인 관습이 되었다" - 브루노 베텔하임

"유년의 틈"의 첫 대목은 아이가 길에서 그만 쉬야를 한 대목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여성이 창 밖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며 과거로 틈입해 들어간다. "애엄마한테 빨래감이 또 생겼네"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다른 한 친구가 말한다. "얘가 더 창피하지." 전학와 서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은 과거 오줌을 지린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풀리고,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2막에 실린 두 번째 단편인 "풍선"의 구조 역시 "유년의 틈"과 흡사한데, 한 남자가 어린 시절 아버지 옷장에서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불려다가 어머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경험한다. 그때 고모는 긍정적으로 아이에게 콘돔이라고 알려주고, 아이가 불어달라고 하자 불어주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야단칠 뿐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그 아이가 성장해 공중화장실에서 콘돔을 사려다가 어린이가 들어오자 놀라서 그만 자판기에서 나온 콘돔을 자기것이 아닌 양 모르는 척 빠져 나온다. 그런데 아이는 친절하게도 콘돔을 주워 아저씨에게 전해주려고 밖까지 쫓아나온다. 아이 덕분에 남자는 창피해 한다. 그 이외에도 작품 "인절미"에서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여성에 대해 과감하게 "맛있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누드모델"에서는 살찐 외모를 긍정하는 것이 뭐 어때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어린 시절 일찍 생리를 시작한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된 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팬티 빠는 아침"에서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당당하고, 건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긍정이 지닌 힘에 대해 작가는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하지 말자고 하는 듯 보인다. 물론 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으며 간단하지 않은 만큼 소박하게 긍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손쉬운 결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무거움과 진지함 혹은 신성한 차원으로까지 숭상하려는 바로 그 태도,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 구분 때문에 우리들에게 성은 언제나 짙은 어둠 속에 가려진 채 더욱 힘든 해법을 강요받고 있는지 모른다. 좀 더 쉽고, 가볍게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성은 다른 얼굴로 다가오지 않을까.

* 그나저나 작가 정송희 첫 데뷔(1999년) 이래 작품 발표 연도들을 보니 대개는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집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첫 작품집이 2004년에야 나온 것으로 보아 그동안 작품 활동을 거의 안한 듯 하여 최근 작품의 경향이나 그림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에 접한 소식에 따르면 장편작품집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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