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삼국유사 : 그리스 잡신들은 물렀거라! 흐흐
삼국유사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벌핀치, 오비디우스의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노라면 천지창조, 신과 영웅이야기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세 가지 구분으로 나뉨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 "를 읽어볼 생각으로 세 권의 "바가바드 기타" 관련서적을 구입했다. 함석헌 선생이 옮긴 "바가바드 기타"-한길그레이트북스 18권과 간디의 해설로 된 기타를 이현주가 옮기고 당대에서 펴낸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 기타" 그리고 비노바 바베가 짓고, 김문호가 옮겨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천상의 노래"가 그것이다. 내딴엔 이렇게 해놓고 "인도 정신의 꽃"이라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위한 준비 작업이 나름대로 종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처음부터 좀 수월하게 읽을 생각으로 비노바 바베의 "천상의 노래"를 펼쳐들었는데, 웬걸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뭐든 순서가 있는 법인데 마음만 급해가지고 기지도 못하는 놈이 뛸 생각부터 한 거였다. 제대로 읽자면 함석헌 선생이 옮긴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그런 뒤에 간디와 비노바 바베를 비교해가며 읽는 것이 정석일 게다. 그런데 인도인이 아닌 내가 "바가바드 기타"를 더 잘 읽으려면 "우파니샤드"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걸 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란 건 또 대관절 뭔가? 이건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에 속하는 것으로 베다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적 제식 문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니 "우파니샤드"를 잘 읽으려면 또한 "리그 베다"도 읽어두는 편이 좋은 거다.

아마도 근대 초기에 처음 "그리스로마신화"를 접한 사람들의 심경이 지금의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서구 정신세계의 깊은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정신 두 가지를 일컬어 그리스로마신화에 기반한 헬레니즘과 유대교 전통에 기반한 헤브라이즘을 꼽는데, 지금이야 서구식 사고가 동양적 사고를 밀어내고 교육부터 시작해서 실생활의 전반부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근대 초반기만 하더라도 그리스로마 신화와 기독교 정신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고 이해는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머리로만 이해되는 것이지 속속들이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인도인이 아닌 한 베다와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조차 힘든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이를 역으로 보면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삼국유사"는 참 읽기 힘든 책이다.

어떤 이는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듣고 "삼국유사"? 그렇게 간단하고 읽기 쉬운 책이 뭐가 어렵단 말인가 하며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리들은 누구라도 사찰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특별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사찰에 놓인 불상이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제 아무리 기독교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우리에게 전해내려온 문화이므로 그런 것들이 익숙한 탓이고, 그것이 비록 기복신앙이란 비난은 듣더라도 한국 기독교 내부엔 이미 충분할 만큼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으로 가득하다. 과거에 한국인들이 마을 뒷산의 작은 암자나 바위에 치성을 드리기 위해 새벽녘 찬물로 목욕 재계하고 치성드리러 가는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100일 치성이 변화된 100일 새벽기도를 다닌다.

그 기도의 내용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 가족의 평안과 세속적 출세를 은연 중에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기독교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샤머니즘이 기독교 내부로 들어가 틀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수천수만년을 이어내려온 그 깊은 정신 세계가 단시일내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수천년의 세월을 거쳐 토속신앙인 칠성당과 산신당을 사찰 구조 내부로 받아들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요소들이 삼국유사로 표상되는 한 권의 책에 전부 담겨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존하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장 기본적인 책이 이것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고대 서적으로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일찌기 육당 최남선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의미는 반감되지 않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와 고구려, 백제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두루 모아서 지은 책으로 오랜 기간 여러 전란을 겪으며 민족의 문화유산이 망실되는 가운데 다른 문헌들의 내용을 유추해 살펴볼 수 있는 근거로 남은 유일한 서책이기도 하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들에 의해 이루어진 정사(正史)에 해당한다면,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야사(野史)의 성격을 띄고 있다. 비록 책의 구성이나 문체적인 특성은 "삼국사기"에 비해 떨어질지 몰라도, 고조선과 단군 신화, 향찰로 표기된 신라 향가 등을 담고 있어 우리 고대 문학사는 물론 우리 민족의 개국과 관련한 민족적 연원을 따라가는데도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을유문화사판 "삼국유사"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건양대 중문과 교수인 김원중이 우리가 요새 읽을 수 있는 말로 옮긴 것이다. "왕력(王曆)" 연표를 부록으로 뒤로 빼고, "삼국유사"의 전내용을 600여쪽이 넘는 분량으로 축약없이 담아내고 있다. 그외 나머지 구성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기이 제1, 기이 제2, 흥법 제3, 탑상 제4, 의해 제5, 신주 제6, 감통 제7, 피은 제8, 효선 제9"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기이 제1에서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수록되어있고, 우리 민족의 구성 및 삼국의 개국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 얼마전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이 "천황가는 본시 백제계로서, 한반도를 통해 도래한 집안이다."란 말의 근거 신화가 되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도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기이 제1과 2"에는 삼국 시대의 여러 일화들을 중심으로 담고 있는데, 이 내용들이 가히 우리 민족의 신화라고 할 만한 내용들이다. 에게게, 이게 무슨 신화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몰라 한 마디 쐐기를 박아두자면, 그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트로이 전쟁" 이후 편을 유심히 살피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네들이 신화라고 내세우는 것들도 사실 우리 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단적인 예로 트로이 전쟁엔 올림푸스의 신들도 두 패로 갈려 각기 다른 영웅들을 돌보아준다. 물론 운명이 다하면 신도 도울 수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헥토르는 아켈레우스에게 패하여 숨지고 만다. 이를 "삼국유사"에서 찾아보면 "각간 김서현의 아들인 김유신은 나이 18세에 국선이 되는데, 그의 낭도에 백석이란 자가 있었다. 백석은 김유신이 장차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정벌할 자임을 알고, 김유신에게 고구려를 관찰하러 가보자고  꼬드겨 고구려로 데려간 뒤 그를 해할 심산이었다. 이때 김유신 앞에 세 명의 여인이 나타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밤이 되었는데 백석을 따로 떼어놓고, 김유신만 숲으로 데려가 백석이 사실은 고구려의 밀정임을 알려준다. 잠시 후에 살펴보니 이 세 여인은 신라의 수호신들인 내림, 혈레, 골화였다."고 서술된다.

이외에도 미추왕과 죽엽군, 만파식적, 처용 이야기 등을 어찌 그리스로마신화보다 떨어지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고흐의 그림은 높이 치면서도 김홍도의 그림은 그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우둔한 후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유사"는 구 신라 지역의 승려가 저술한 내용이다 보니 한반도 전체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을 북반부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략하게 정리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거기에 승려란 신분 탓인지 불교적인 이야기와 사상이 깊이 배어있는 측면도 있다. 게다가 간혹 잘못 전해진 이야기들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인다. 그럼에도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서사시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 생활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치는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로 재단하여 수록치 아니한 우리 고대 기록의 원형들을 담아 후세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에서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의 보물단지라 할 수 있다.

물론, 조만간에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에도 도전해보겠지만, 그런저런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서사시 "삼국유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또한 뿌듯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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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일상의 재발견 - 천재 유 교수의 생활
천재 유교수의 생활 1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매우 많다. 사람, 인간, 민중, 군중, 대중, 인민, 서민 등등... 때로는 정치적으로, 학문의 엄밀성을 위해 용어는 구분되고, 구분될 때마다 각각의 용어들은 별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람 혹은 여러 사람들을 일컫는 말 가운데 가장 나중에 온 말은 무엇일까? 민중? 하기사 우리가 민중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나중에 발견되었으며, 가장 나중까지 논란의 여지로 남을 인간은 "개인"일 듯 싶다. 최근 역사학계의 새로운 조류로 주목받기 시작한 "일상사"에서(이와 관련한 책으로 작년에 청년사에서 출간된 "일상사란 무엇인가"와 개마고원에서 출간된 "나치시대의 일상사" 등이 있다. 더 좋은 책들도 있지만...) 다루는 인간 또한 개인이라 할 수 있다. 일찌기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소수 권력자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에 내재된 '악'에 의해 가능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의 일상 역시 개인에 해당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 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야마시타 카즈미"의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읽다보면 문득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읽는 내내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 감동받기도 하지만 기억에 남는 극적인 대목은 쉽게 찾을 수 없는 만화다. 이 작품에도 물론 사건이 일어나고, 갈등이 빚어지긴 하지만  사건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철저하게 캐릭터에 의해 진행되는 만화란 점이 다른 작품들과 가장 큰 변별점이 된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의 주요 캐릭터들 우선 주인공 유택 교수가 있다. 그는 Y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매우 고지식한 인물이지만 마음이 따스하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며 무엇보다 매사 원칙을 세워 공부하는 일을 즐긴다. 그리고 그의 부인 마사코, 평범하지만 과연 평범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넷째(막내) 딸 세츠코, 크게 튄다고 할 수 없지만 유택 교수의 딸 아니랄까봐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대찬 면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친구 히로미츠, 그리고 외할아버지를 무척 존경하여 유 교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흉내내는 하나코가 있다. 아, 고양이 타마도 빼놓을 수 없다.

Y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유택을 다른 이들과 확실하게 구분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의 신념이다. 유택은 고지식하다 못해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이런 개인적 신념은 그의 가족은 물론 그가 속해있는 다른 사회의 융통성이 과다한 인물들과 늘 갈등을 빚고, 충돌을 일으킨다. 만약 이 충돌이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하다고 느끼게 만든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얻지는 못했을 게다.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는 유택을 이 위태로운 경계 선상에서 오락가락하게 만들면서 이 작품의 소소한 재미와 교훈을 유발시킨다. 유 교수의 준법 정신, 바르게 살기 자세는 타인을 겨냥함과 동시에 그 자신을 겨냥한다. 바르게 살기를 타인(혹은 독자)에게 권유한다는 일은 종종 위험한 경험임을 잘 아는 독자를 위해 작가는 유택의 면모들을 먼저 살피고 이해하도록 권유한다.

예를 들어 바른 생활 사나이인 유 교수는 취침 시간 9시를 칼 같이 지키는 인물로, 그 시간을 넘기면 마치 신데렐라의 황금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듯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든지 하는, 결함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원칙이 남을 겨냥할 때나 자기 자신을 겨냥할 때나 변함없다는 점에서 그는 타인에겐 바르게 살기를 강요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위선자들과 격을 달리 한다. 무엇보다 유 교수의 바르게 살기가 그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기에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유 교수의 좌충우돌을 지켜볼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이 융통성 없음의 신념이 타인에 대해서는 배려와 관심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유 교수의 그 인간적인 매력에 흠씬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는 만화적 관점에서 유 교수를 비롯한 캐릭터 묘사에 특히 각진 부분보다는 전체적으로 원만한 선을 통해 독자들이 시각적으로도 편안하고 깔끔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해두고 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이 주는 매력의 또 한 가지 요소는 이 작품이 지닌 풍부한 드라마성이다. 작가는 TV드라마처럼 일정한 분량 동안 기승전결을 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대신 어떤 이야기는 상당히 긴 분량의 이야기로 늘이고, 어떤 이야기들은 짤막한 에피소드로 완결짓는 신축성 있는 방식을 이용해 만화책에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만화들이 대개는 잡지에 연재되는 것을 다시 단행본으로 엮어낸다고 했을 때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의 독특한 고집이 관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마시타 카즈미는 유택을 통해 현재로부터 일본의 과거를 오가며 - 동시에 유택은 일본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청년들을 길러내는 대학 교수다 -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유 교수 자신이 희극적인 캐릭터도, 비극적인 캐릭터도 아닌 탓이지만, 유 교수의 캐릭터 자체도 희비극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그런 유 교수의 캐릭터 덕에 가끔씩 과거로 피드백하는 순간, 진지하게 몰입을 요구받는 순간에도 우리는 편안하게 유 교수를 따라 건너갈 수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캐릭터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독자들이 지루하다거나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의 제목 자체가 이미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 교수는 천재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처음 쳐 본 게이트볼 게임에서 그는 마치 "맥 가이버"가 처음 당구 게임을 경험하면서 그가 지닌 물리학적인 지식들을 이용해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유 교수도 그런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건 유 교수의 천재적인 면모보다는 그와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삶 그 자체다. 유 교수가 이런 평범함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비범함을 보이는 대목은 그의 천재성보다는 그가 늘 배움을 갈구하는 인물이란 거다.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때나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갈 때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은 "나는 지금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운 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와 같은 말이다. 그에겐 세상 모든 것이 배울 거리들로 가득하기에 심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 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 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천재 유 교수처럼 늘 무언가 배우는 이, 스스로 주체적인 자아로 해나가는 이에게 일상은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환희의 새로움을 경험하는 순간이 된다.

일상, 그것은 혁명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인 것이다. 천재 유 교수가 주는 가장 아름다운 매력은 일상의 환희, 일상의 재미가 어떤 순간 점화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는데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깨닫고 실천에 옮길 수만 있다면 일상의 주인은 다시 당신이다. 지금 아주 작은 일 한 가지를 스스로를 위해 먼저 해주라. 잠깐 책상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이제 막 움트는 새싹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는 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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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파시즘: 유능한 파쇼와 무능한 자유보수주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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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에게 주목받고 있는 신생출판사 가운데 하나가 "교양인"이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스콧 터로의 "극단의 형벌", 히틀러 평전으로 유명한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최후의 14일"(이 책은 출판사에서 보내주었다. 어떻게 알고... 감사) 그리고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이 그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는데, 현재 내가 알고 있기로는 모두 8종의 책을 낸 것으로 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탄탄한(물질적 측면이 아니라 출판사를 꾸려나가기 위한 다른 역량-문화적 마인드, 필자 풀, 번역서의 경우엔 그걸 분별할 수 있는 식견 등) 역량이 돋보인다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도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원제는 "The Anatomy of Fascism"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시즘의 해부" 정도가 될 수 있는, 이 책은 "교양인"에서 출간한 책 가운데 현재로서는 가장 두툼한 부피를 자랑하는 책이다. 전체 600여 쪽의 책 가운데 주석 부분과 기타 참조 부분(용어, 인명 찾아보기 등)이 100여쪽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전문적인 학술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읽는데 족히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이 분야에 흥미가 많은 탓이고, 둘째. 필자와 역자, 그리고 편집자들의 수고 덕이겠지만 읽기 쉬웠다. 셋째.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책값이 27,000원인데 10% 할인해서 24,300원인데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나로서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전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지인에게서 그런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는데(본인에게 직접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잘 안 난다. 한홍구 교수는 최근 국내 최초로 평화박물관을 개원해 몸소 재원을 마련하고, 운영하느라 무척 바쁘다.) 평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엔 이 분야가 특히 취약해서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민주주의에 대입해 보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독재 체제(파시즘, 전체주의, 권위주의 등등)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스운 말이지만, 우린 해방 이전과 이후의 근대화 기간 동안 전쟁과 너무나도 가깝게 살아온 나머지 웬만한 전쟁 이야기엔 면역이 되어 있고, 해방 이전엔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해방 이후엔 권위주의 독재, 군부 독재 시대를 거쳐온 탓에 독재 혹은 권위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거나 지나치게 관대한 측면 두 가지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드 세르토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거대 도시의 마천루적인 시각과 더불어 그 밑을 걷고 있는 자의 시각이 혼재해 있는 것이다. 어떤 관점은 지나치게 원경으로, 어떤 관점은 지나치게 미시적으로 들어가고 있으므로 일반인들로서는 다소 곤혹스러울 수 있는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머리말을 쓴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유효적절해 보인다.

"파시즘을 정확한 기술적 용어로 쓰지 않고 일종의 유행어로 안이하게 남발하는 것은 파시즘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의 독성에 무감각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또 그럼으로써 '진짜' 파시즘이 출현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미 양치기 소년 증후군에 중독 되어 파시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다. <본문 14-15쪽>"

팩스턴의 "파시즘"은 모두 8장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장. 운동하는 파시즘"은 파시즘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주요 전략, 정치적 운동 방향 등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파시즘의 정의를 시도한다. "2장. 파시즘의 탄생"은 말 그대로 파시즘이 탄생할 수 있었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 등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어떤 징후들이 나타나는가를 분석한다. "3장. 뿌리 내리기"에서는 파시즘의 준동이 유럽의 각국에서 어떤 형태로 출현했는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이탈리아, 독일 등과 달리 다른 유럽에서 파시즘이 실패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4장. 권력장악"에서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정권 탈취에 실패한 파시즘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5장. 권력행사"에서 팩스턴은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한 뒤 어떻게 내부 분열을 겪고, 그 가운데 지도자 중심의 권력 독점으로 기울게 되는지에 대해, "6장. 급진화인가 정상화인가"에서는 파시즘이 어떻게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파시즘의 어떤 요소들이 이런 급진화를 부추겼는지 살핀다. "7장.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파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종말을 고한 듯 보이는 파시즘이 1945년 이후 유럽에서 어떤 형태로 잔존했는가? 이후에도 파시즘의 출현은 가능한가를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 "8장.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현대 사회에 출현 가능한 파시즘을 예측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팩스턴은 마치 법의학자가 시신과 대화를 나누듯 파시즘의 세세한 측면들을 들춰내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미국 출신의 학자임에도 미국에 존재하고 있는 파시즘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파시즘은 무엇이다'란 식으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팩스턴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파시즘이 주요한 정치 이념으로 출현해 다시 정권 탈취, 권력 장악을 하도록 방치해선 안 되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힘은 얻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파시즘에 대한 기존의 고정 관념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파시즘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 형태 중 가장 강력한 시각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파시즘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다음과 같은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무아경에 빠진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광신적 애국주의 선동정치의 모습,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젊은이들의 행진 장면, 악마로 둔갑한 소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특정 색깔의 셔츠를 입은 극렬분자들, 새벽녘의 갑작스런 가정 침입, 함락된 도시를 행진하는 규율 잡힌 병사들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파시즘의 그러한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파시즘 선전원들이 거둔 최후의 승리다. 또 그 이미지는 파시즘 지도자를 승인하고 용인한 국가에 핑계거리를 제공하고, 그 지도자를 도와준 개인, 단체, 제도로 향하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시즘 지도자와 국가, 그리고 파시스트당과 시민 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훨씬 더 정교한 파시즘 모형이다.
환호하는 군중의 이미지는 몇몇 유럽 민족 내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파시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그런 민족적 특성 때문에 파시즘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가정에 힘을 실어준다. 이 가정으로부터 한 나라의 결함 있는 역사가 파시즘을 탄생시켰다는 겸손한 듯 오만한 믿음이 따라 나온다. 이러한 믿음은 쉽게 파시즘을 방광하는 국가들의 알리바이로 바뀔 수 있다. 즉, 자기네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 38-39쪽>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영화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엘 시드"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 한 가지를 던져준다. 1492년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모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레콩키스타"로 알려진 실지 회복 전쟁이 끝났을 때, 다시 기독교도 왕국이 된 스페인은 이교도에 대한 이전의 관용정책을 포기한다. 이전까지 종교적 자유 아래 기독교도 국왕인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무어인들은 개종해야 했고, 개종한 무어인들은 '토르나디소스(tornadizos, 변절자)'란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렸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대규모 인종학살이 빚어진다. 1391년 세비야에서만 4,000여 명의 유대인이 불 속에 던져졌다. 레콩키스타를 종료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 시대를 거치며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축적되기 시작한 서구 유럽의 자본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촉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고, 이들 사회가 새로운 격변을 맞이한 것은 180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였다.

1900년에 이르러 18세기 계몽사상에 의한 과학 ․ 이성 ․ 진보의 힘은 유럽의 체제를 크게 바꿔놓았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발명(증기기관, 내연기관, 무선통신, 사진, 영화 등), 철도와 기선의 출현(미 대륙 횡단철도, 유라시아 횡단 철도, 대양 운송)으로 인해 낡은 농업사회의 자급자족제도를 파괴하고, 도시로 유입된 다수의 노동자 계층을 생성시켰다. 농민에게는 전통적 생산수단을 현대화하도록 강요(문화적 재생산의 차단)했고, 인구의 이동성을 높여 도시의 거대화를 초래한다.

자유주의, 자유자본주의 모델은 그 물질적 장점으로 인해 정치적인 틀을 크게 변모시킨다. 언론, 상거래, 과학적 탐구의 자유, 노동의 유동성과 확대된 선거권에 기반한 민주적 자치(自治)에 대해 각성한(영국의 경우 1867년 도시소시민, 노동자, 1884년 광산노동자, 농민, 1918년 남성 보통선거, 1928년 보통선거 확립) 시대이다. 이 시기에 지구상의 인구는 1900년 당시 16억 3천만 명에서 2000년 무렵 60억으로 폭발적인 증가세(1820년대 영국 리즈, 버밍엄, 브래드퍼드는 각각 47%, 40%, 65%의 인구 증가)를 보였다. 산업화와 도시화,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대중들의 의식을 변화시켰고, 교육받은 중산층과 소수 기술노동자 계층의 출현으로 새로운 형태의 매스 미디어들(신문 - 1700년대부터 인쇄되어 구독되었던 소책자나 정보지로 출발, 18세기에 이르러 일간지가 일반화됨, 1840년대 대중잡지, 1920년대 라디오, 1940년대 TV)의 출현을 가속화시켰다.(1843년 영국 카툰 잡지 <펀치 Punch>, 사진의 출현, 포르노그라피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영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이론가였던 M. 아널드는 "대충 교육받은 다수가 아닌, 고도로 교육받은 소수가 항상 인류의 지식과 진실의 기관 역할을 해왔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과 진실은 결코 인류의 대다수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란 말로 대중사회의 도래를 기존 사회 체제의 붕괴를 초래할 위험 요소로 보았다. 자유주의 사상가 J.S.밀과 A.토크빌은 대중사회가 확대된 민주주의(보통선거)에 의해 수적으로 증가한 (정치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한)대중을 오도하여 선출된 소수 개인의 의지에 따라 민주주의가 변질되는 것을 새로운 전제주의적 횡포로 생각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즘'들은 정치가 교양인의 일이었던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상대방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끈질기고 학구적인 의회 토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고전적인 '이즘'은 그 사상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그 이즘들의 강령을 검토함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대중 정치 시대에 급조된 새로운 고안물이었다. 파시즘은 세밀하게 연출된 의식과 감정이 가득실린 수사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 <본문 53쪽>

대중사회는 출현했으나 대중을 노동계급으로만 해석한 사회주의,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세력으로 파악한 보수주의, 교육받은 시민들만을 정치 세력으로 인정한 자유주의 모두 대중을 정치권력의 파트너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다. 대중은 분명한 정치세력이었으나 이들을 단지 무지몽매한 세력으로만 파악한 기존의 정치이념들이 놓친 공백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대중을 인정치 않거나(보수주의, 자유주의) 반대로 대중이 지닌 보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대중은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의식과 더불어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성향을 함께 지녔다) 사회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자유주의는 파시즘에 대항할 세력이 없었거나 세력, 대안을 조직화해내지 못했고(무능했고), 보수주의는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다른 정치 세력으로 파시즘을 선택했다.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의 하나는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였다. 파시즘이 암실에서 나와 공적인 무대로 가장 쉽게 진출했던 곳은 기존 정부의 기능이 형편없거나 아예 전무했던 곳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토론의 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은 파시즘이 자유주의의 위기를 기반으로 삼아 번성했다는 사실이다. ...<중략>...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자유주의 정권이 확립돼 있었거나 자유주의 체제 확립으로 나아가던 중이었다. 자유주의 정권은 개인은 물론이요 집권당의 경쟁세력인 여러 정당에도 자유를 보장해주었으며,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부 구성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했다. 자유주의 정부는 또한 시민과 기업에 광범위한 자유를 허용했다. ...<중략>... 이런 유형의 자유주의 국가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사라졌다. 전면전을 수행하려면 정부의 강력한 조정과 규제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전쟁은 끝났으나 자유주의 정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전쟁 이후 밀어닥친 여러 갈등, 위기, 긴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팩스턴은 이런 현상이 사상적 문제이기 보다는 위기에 처한 "통치의 기술" 문제라 말한다. "좋은 집안 출신의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명성과 존경에 의지해서 선거에 계속 당선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명망가의 지배"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 거물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정치를 이용해 좌파에 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노동계급을 장악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파시즘"의 정권 장악엔 필연적으로 "대중의 동의"가 뒤따랐음을 지적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되었다. 물론 이런 지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시즘의 등장을 대중의 동의 탓으로 밀어 붙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과거의 잘못과 오류를 반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대중을 파시즘의 정치적 동반자로 부각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과거 자유주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대중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무지몽매한 군중(mob)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와 결합하면서 대중을 다시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게 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은 과거 박정희 유신 독재, 87년 대통령 선거의 패배의 책임(양 김의 득표가 노태우보다 훨씬 더 상회했음에도)을 대중에게 전가시킨다. 이들은 중요한 사실(fact)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1921년 10월 30일 로마진군을 결정한 무솔리니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은 대중이 아니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였다. 이탈리아 국왕은 파크타 총리가 제출한 계엄령에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무솔리니에게 정권을 내어줄 결심을 내비쳤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상황을 결정지은 것은 파시즘 세력이 아니라, 무솔리니에 맞선다면 자신들의 권력이 위험에 처하리라는 보수주의자들의 두려움이었다. 로마진군은 오합지졸의 거리 행진에 불과했으나 효력을 발휘했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성공은 곧바로 독일 나치스를 부추겼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 폭동을 통해 보수주의자들이 정권을 헌납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폭동은 간단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정부 기능이 아직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보수주의자들은 아직 히틀러를 신뢰하지 못했다.

독일 좌파들은 히틀러가 앞으로도 이탈리아의 방식(쿠데타, 폭동)을 통해 정권 탈취를 노리리라고 방심하고 있었다(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히틀러는 쿠데타라는 불법적인 방식의 권력 탈취 기도가 성공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에 참여해 이전과 비교했을 때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히틀러의 힘을 빌어 좌파 세력을 견제하려는 결정을 내리기에 미적거리는 동안 나치당의 인기는 다시 하락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적은 사실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런 위기에서 히틀러를 구해준 것은 보수주의자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그는 정치 초년생인 히틀러를 명목뿐인 수상에 올려놓고, 자신이 부수상에 올라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직도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독일의 유권자들은 나치당에게 과반수의 표를 준 적이 없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1932년 7월 31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나치당이 37.2%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독일 의회에서 제1당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후 1932년 11월 6일 치러진 선거에서 지지율은 다시 33.1%로 하락했다.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되어 전 독일을 지배하던 1933년 3월 6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지지율은 상당히 올랐지만 아직은 미흡한 43.9%에 그쳤다. 나치 돌격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2명 중 1명 이상이 나치당에게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1921년 5월 15일에 참가한 자유 의회 선거에서 535석 중 불과 35석을 얻는데 그쳤다."  <본문 225쪽>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나치시대의 일상사"를 통해 히틀러의 제3제국이 정치적 권력 장악 이후 문화적 헤게모니까지 장악해 대중의 일상까지 모두 손아귀에 넣기 위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보여준다. 히틀러의 계획은 노동계급의 일상까지 파괴하고 있으나 동시에 히틀러와 나치의 문화정책의 의도가 대중의 교묘한 저항에 부딪쳐 어떻게 변질되고 좌절되었는지도 잘 묘파해준다. 대중은 히틀러의 문화정책을 교묘하게 비틀었는데, 예를 들어 모든 히틀러 유겐트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식과 달리 나치 이념을 전파하는 본래의 목적엔 전혀 관심없는 이들에 의해 장악되어 친교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히틀러 유겐트 조직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일종의 반항집단화된 하위집단)의 저항을 받아 유겐트 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이런 반항이 나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진 못했지만, 최소한 나치 체제의 붕괴를 앞당기거나 대중이 무조건적인 동의를 보냈다는 편견은 시정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최근의 사태를 맞이해 다시 중요해지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의 연원에 대해 팩스턴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의미가 있을 듯 하다. 그는 1920년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일본의 파시즘은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이 철저하게 탄압당한 반면, 파시즘의 일부를 모방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 존재해왔음을 지적한다.

"제국주의 일본이 파시즘을 모방하였으며 파시즘의 특징을 여럿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일본식 파시즘은 단일 대중 정당이나 대중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유럽식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지식인들을 무시하거나 억압했다. 마치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타도한 결과로 유럽에서 파시즘이 확립된 것과도 같았다." <본문 446-447쪽>

일본제국의 군국주의 정권은 비록 파시즘 특유의 대중 동원 기술을 사용했지만, 지도자들과 경쟁을 벌일 만한 자생적 대중 운동이 형성되지 못했기에(나는 아직까지도 일본에 있어 진정한 의미의 시민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 물론 전후 일본을 통치한 미국의 입장 때문에 철저한 전후 처리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 일본의 정치질서는 비록 겉으로는 몇 차례 변동을 겪은 듯 보이지만 정치 권력 체계는 본질적으론 시민사회 혹은 대중사회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본다. 일본을 유럽의 파시즘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든 가장 큰 차이는 사상적으로 파시즘을 따른 것이기 보다 국가가 지원하는 대중 동원을 포함한 국가주의 군부 독재란 점이다. 즉, 유럽에서와 같이 명망있는 기존의 정치가들을 전복시킨 파시스트 세력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명망있는 기존 정치가들이 파시즘을 모방하였고, 그들이 전쟁을 치르고, 전쟁 이후 현재까지 일본에 현존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정치 세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일본, 평화헌법의 일본에서 우경화로 나아가는 현재까지 마치 수백년을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온 뱀파이어처럼 단 한 차례도 교체되지 않았다.

이제 우리 사회의 문제, 세계화가 진행된 현대 사회의 우리들에게 파시즘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팩스턴은 파시즘이 기존의 다른 정치 이념과 달리 강령이나 어떤 주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집단이기 보다는 권력 그 자체의 쟁취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내세웠던 강령 역시 시시때때로 변화시켜왔음을 지적한다. 그런 까닭에 파시즘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우며, 팩스턴이 내리는 파시즘의 정의가 비록 협소한 의미의 정의에 불과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파시즘적인 방식을 모방한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군부 독재, 급진화된 민족주의 정치 질서의 출현 자체를 긍정할 수는 없다. 팩스턴은 "파시즘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셔츠 색깔을 보거나 20세기 초 반체제적인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들이 내세운 구호의 메아리를 찾아볼 것이 아니라, 과거에 파시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파시즘의 단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면 위기에 직면한 정치적 교착상황에서 나타나는 불길한 경고 표지를 더 많이 읽어낼 수 있다. 이 때는 위협을 느낀 보수세력이 적법절차와 법의 지배를 포기할 태세를 갖추고 더 강한 동맹 세력을 찾아 헤매며, 국가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선동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 보수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테크닉을 빌리기 시작하고 파시스트들의 '결집된 열정'에 손을 내밀며 파시즘 추종 세력을 흡수하고자 할 때 파시스트들은 벌써 권력에 아주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본문 458-459쪽>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파시즘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정치 세력과 결합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태로 존재할 때, 기존의 정치 세력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엔 마치 휴면에 들어간 바이러스처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효용에 눈뜬 보수세력과 결합할 때, 파시즘은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바로 그 점이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군부독재와 기묘한 동거를 자청했던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들, 그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 "파시즘"은 별다섯이 아깝지 않은 매우 좋은 책이고, 부피에 주눅들지만 않는다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 가운데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어느 분이 지적하고 있듯 중간 몇 부분에 다소 어이없는 교정실수들이 보인다는 점은 옥의 티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180쪽 13번째 줄엔 "그러나 신당은 1931년 10월 선거에 단 하나의 의석도 없지 못했다."란 문장이 있는데, "얻지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나중에 개정판이 나올 수 있을 만큼 이 책이 많이 팔리길 바란다. 써놓고 보니 어느새 200자 원고지 60매였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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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이름난, 이름없는 혁명가들의 초상
중국의 붉은 별 - 상 - 두레신서 10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옮김 / 두레 / 199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에드가 스노 vs 존 리드, 아그네스 스메들리 vs 님 웨일즈" 이렇게 구도를 만들어 놓고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에드가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 존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10일",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위대한 길 : 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님 웨일즈는 "아리랑"을 쓴 작가들이자 저널리스트들이다. 만약 그렇게 살 수만 있었다면 이들을 위한 길 앞잡이 노릇을 하다 만주 벌판 어딘가에서 비적(匪賊)의 납탄을 맞고 죽었어도 나로서는 별로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위와 같은 대비 말고 또 다른 대비를 시도해보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vs 서머셋 몸, 앙드레 말로 vs 마르크 블로크, 잭 런던 vs 조지 오웰"의 대비를 살펴보면 이 또한 역시 상당히 재미있는 대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헤밍웨이와 몸은 아마추어 스파이 활동 경험이 있는 작가란 공통점이 있고, 앙드레 말로와 역사학자 블로크는 레지스탕스 활동의 공통점을, 잭 런던과 조지 오웰은 각각 르뽀 작가로 활동했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잭 런던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조선에 온 적도 있었고(비록 조선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지만), 조지 오웰과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는 각각 스페인 시민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도 있다. 서머셋 몸은 스파이 시절을 회고하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하지만 혁명기에 러시아에 머물던 그의 스파이 활동은 스파이라기보다는 산보객에 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식인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셋을 따로 구분하여 각각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자는 역사만을, 철학자는 철학만으로, 문학하는 이는 문학만을 자기 영역으로 생각하고, 간혹 이를 초월해버리는 사람을 능멸하는 경향까지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지식 풍토 속에서 서구식 작가(writer, author)의 개념은 작가(novelist)로 한정되고 만다.

게다가 우리는 작가들의 지위나 권위에 대해 픽션이 지닌 권위의 절반만큼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순수하게 작품 활동만 하는 화가보다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화가인 사람, 순수하게 음악활동만 하는 성악가보다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는 성악가 같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더 존경받는 경향과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일과 직접 창조하는 일이 동일한 성질의 일이라면 애써 세분할 필요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와 동양의 몇몇 나라에 한정된 경향일 뿐이다.

텍스트의 권위가 텍스트 자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텍스트 생산자의 사회적 권위에 의존하는 사회의 텍스트들은 처량맞다. 픽션과 넌픽션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명확한 금긋기 행위가 사실은 비문학적 행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문학평론가들은 문학만 말하고, 영화평론가는 영화만 말하는 건, 좋게 생각하면 전문성을 좀더 강화시키는 행위로 보이지만, 이는 암암리에 지식인 사회의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참고로 보들레르는 미술비평을, 아도르노는 음악비평을 했으며, 발터 벤야민이 계속 살아남았다면 영화비평을 했을 거다.)

나는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거의 십여 번 이상 읽었다. 중국혁명사를 공부하기 위해? 마오주의자라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천만에 말씀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마오쩌뚱이 즐겨 읽었다는 수호지만큼이나 호방한 재미가 있고, 미문(美文)의 틀에 갇힌 모호함 대신 살아 날뛰는 현장의 소리가 들려오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보다 감동적이다. 이런 감동이 주는 힘은 무엇보다 허구가 아닌 진실의 힘이다. 우리는 한 인간의 눈으로 대신 역사의 현장에서 진실을 전달받고 있다. 비록 그것이 과거의 어느날이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지구상에 살았으며 그네들이 이상과 희망에 따라 상처받았고, 굶주렸고, 슬퍼했으며 때로 절망으로 의지를 잃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안다. 그것이 진실이 주는 힘이다.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 말이다.

가끔 역사 드라마를 보면 역사를 소재로 한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실감하게 될 때가 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라면 그가 설령 일본 자객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받더라도 죽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안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중국 혁명 지도부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장정이란 최악의 위기 상황을 겪지만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한다. 그런 사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들, 예를 들어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보다 개인적으론 중국의 혁명과정을 다룬 책들이 훨씬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런 점에선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홍군 총사령관 주덕(朱德)의 일대기를 구술 정리한 "위대한 길"도 마찬가지 재미를 준다. 왜 그럴까? 글쎄, 그 차이는 러시아와 중국의 차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차이, 혹은 중국 혁명 과정에 식민지 조선인으로 동참했던 우리 선각자들의 발자취가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이 혹은 다소간의 이유가 있더라도 1980년대의 운동권 분위기가 공연히 싫은 이들에겐 그 시기의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란 점에서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란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책은 중국공산혁명의 실체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전한 책이란 점에서 미리 색안경을 끼고 볼 일종의 선전물처럼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은 뒤에 걱정할 일은 그것이라기 보단 다른 종류의 것이 될 거다.

에드거 스노 (Edgar Parks Snow)는 1905년 미국의 미주리주(Missouri)의 캔사스시(Kansas City)에서 태어나 1926년 미주리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 신문학과에서 공부를 마쳤다. 1927년(우리처럼 군대를 안 가니 23살 한창 펄펄 날 때)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1928년에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간다. 그는 중국의 최대 격변기에 현장에 머물면서 북경 연경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는데, 1936년 6월 손문의 부인 송경령의 소개장 하나를 들고 중국의 머나먼 서북 지역 홍구로 떠난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그 자신이 청년이었으므로 노회한 저널리스트이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사명감으로 불타는 피끓는 청년의 심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에드가 스노는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평범한 청년이었고, 모험가였다. 그의 직업은 물론 기자였으나 처음부터 기자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22세의 청년 스노는 증권투자로 벌어들인 돈을 챙겨 한 1년 정도 전세계를 돌며 재미난 생활을 즐길 마음이었다. 애초에 그가 중국으로 건너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는 지금 우리들처럼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크게 한 몫 벌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시대, 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 버마, 인도 그리고 훗날 방문하게 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그의 피는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기엔 너무 뜨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노는 4개월간 서방세계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아직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마오쩌뚱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당시 홍비(紅匪) 두목 마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그는 중국 혁명 지도부 인물들 - 주은래, 주덕, 팽덕회 등만 만난 것이 아니라 홍군 병사들과도 함께 어울리며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에 남겼다. 농민들은 홍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그런 지지를 밑바탕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에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중국 혁명의 성공과 정당성을 확신했던 자원자들의 사기는 높았고, 군기는 엄정했다. 그들은 봉건 잔재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이상으로 불탔고, 그들 안에서 이런 연대 의식은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어느 인간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없는 확신의 순간들을 그들은 살아갔다.

그들의 이런 넘치는 자신감은 국민당군이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 뿌린 선전삐라의 뒷면을 사상 학습을 위한 노트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경정부의 국민당군이 연일 진격해들어오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보다는 마오와 홍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과 병참을 동원해 홍군을 압박해오는 시기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장장 1년여에 걸쳐 6천여 마일을 관통해 서북지역으로 이동해가는 대장정은 패배의 행군이었을지 모르나 그들의 생존은 그 자체로 승리의 행군이었다. 대장정을 통해 살아남은 홍군은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굶주림과 소수 민족의 습격을 받아 가며 홍군은 도리어 그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계기로 삼았다. 수백만의 굶주린 빈민들이 홍군의 태도를 몸소 경험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결국 마음으로 이들을 지지했고, 적극적으로 일원이 되고자 했다. 반대로 국민당군은 포위망이 뚫렸고, 그 과정에 만주, 상해, 열하, 하북 등을 차례로 일본군에 빼앗겼다.

어떤 이들은 제2차 국공합작을 하지 않았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홍군을 밀어부쳤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당군이 할 수 있지만 참은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외적 일본에 맞서 싸울 힘조차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제2차 국공합작은 도리어 국민당 정부를 더 일찌감치 붕괴시킬 수 있는 상황을 저지해준 것이다. 한동안 "중국의 붉은 별"은 금서였다. 1985년 출간하자마자 금서가 되었고, 이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마오의 붉은 혁명이 남긴 흔적이 "중국의 붉은 별"이 기록한 흥분되고, 순수하며, 열정으로 가득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오는 혁명에 성공했고, 그 역시 숙청과정을 겪었고, 변덕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고, 잘못된 판단으로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인민의 발걸음이 함께 했는지, 그 역사를... 나는 당신이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당신이 미래 어느 순간 역사의 현장에 있고 싶다면, 그것도 기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이 책은 그  이론보다 더욱 깊은 자극과 감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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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약탈에서 과시적 소비에 이르는 여정(旅程)
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2005년 초판을 손에 쥐고 있는 감흥은 약간 남다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나온 것은 지난 1978년 “정수용”이 옮기고, “광민사”에서 펴낸 것이었다. 출간되고 얼마 뒤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었고, 1987년 해금되기까지 법적으로는 읽는 것이 금지 당했다. 오늘날엔 경제학 전공자들보다는 인문 ․ 사회학 전공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는 고전이 금서가 될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내가 너무 둔하여 혹시 이 책에서 금지될 만한 어떤 사유(思惟)들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존 K. 갤브레이스는 『갤브레이스가 들려 주는 경제학의 역사』(2002년)에서 베블런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노르웨이 이민 가정의 후손이었던 베블런은 부유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한계급론』에서 그가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대해 보이고 있는 냉소적인 독설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다만 그의 부친인 토마스 베블런은 매우 검소한 사람으로 자식을 이웃한 칼턴 칼리지에 입학시키는데, 이것은 자식의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베블런이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과시적 여가” 활동에 대해 보이는 냉소적인 태도는 이런 그의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한계급론』2005년판은 1980년판에 실렸던 존 K. 갤브레이스의 서문이 빠진 대신, 앨런 울프의 “『유한계급론』의 현대적 의미”가 새롭게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 계급을 타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혁명적이기 보다는 훨씬 냉소적이었던 베블런은 부자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파하고자 했다. 적어도 19세기부터 부자들은 자신들을 가치 있는 계급으로 믿기 시작했고 또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은 - 가난한 자들은 소유하지 못했다고 믿은 어떤 - 대단한 가치는 근검절약이었다. <앨런 울프, 본문 8쪽>

위와 같은 이야기는 베블런과 동시대를 살았던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오직 경건한 신앙심만으로 신의 영광을 추구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이 자본주의 혁명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음을 묘파한 이래 지속된 이데올로기였다. 베블런과 베버 보다 앞선 세대였던 고전파 경제학자 로버트 맬더스(Robert Malthus)는 그의 대표작인『인구론』에서 “빈민에게는 청결함을 권고하지 말고 그 반대의 습관을 기르도록 장려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는 좀 더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고 전염병이 잘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베버의 관점을 맬더스의 그것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을 신의 은총과 동일시하고, 빈민 계급을 선천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구제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계급으로 취급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자본가 계급, 그의 용어를 빌자면 풍요로운 소비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유한계급”의 이런 근거 없는 도덕적 자부심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블런은 경제학자로 분류되지만 경제학자 계보 가운데 특정 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특이한 인물이다. 『유한계급론』에서도 역시 경제학적 방법론 보다는 사회학적인 연구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경제학 전공자들보다 사회학 전공자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찾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베블런은 종종 마르크스주의자로 오인되곤 했는데, 그 까닭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한계급제도는 봉건시대 유럽이나 일본처럼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발달했던 야만문화에서 가장 잘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계급간의 구별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러한 계급적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인이었다. <본문 23쪽>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유한계급제도와 소유권제도의 발생시점은 일치한다. 이 두 제도는 경제력이 동일한 상황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발생시점 역시 필연적으로 일치될 수밖에 없다. <본문 43쪽>

『유한계급론』은 제1장 「유한계급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제14장 「금력과시문화를 표현하는 고등학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당대 유한계급의 기원과 현시적 소비태도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유한계급을 분석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학문들 - 인류학·역사학·심리학 - 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이는 현재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방법론과 매우 흡사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베블런을 문화연구의 선구자로 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분에 더해 베블런이 노동계급과 여성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막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이었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가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에 대한 소유권은 좀더 원시적인 야만문화에서 여성 포로나 노예를 강탈하면서 생겨난 것이 확실하다. 여자를 강탈하여 전유하게 된 최초의 이유는 여자들이 전리품으로 유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리품인 여자를 적으로부터 강탈하는 관행은 소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관례를 낳았고, 그로부터 남성이 가부장 역할을 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여자들을 비롯한 다른 포로들이나 하층민들까지 노예화되는 과정, 그리고 적으로부터 강탈해온 여자들 이외의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까지 소유 - 결혼 관례가 확대되는 과정을 동반했다. <본문 44쪽>

베블런은 유한계급을 분석하면서 이들의 행동 양식이 본질적으로는 과거 야만 시대의 약탈문화로부터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더 이상 공동체의 일상적인 삶이 약탈 활동에 의존하지 않게 된 뒤로도 축적된 금전이 약탈 활동의 명예와 우월함, 성공을 대표하는 인습적인 지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어떤 위치에 서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일정한 부를 축적해야 하며, 명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를 획득하고 축적한 것 못지않은 소비가 필요해진다. 베블런은 이를 "금력과시문화(pecuniary culture)"라 불렀다. 그러나 재화를 개인의 단독 소유물로 인정하는 모든 사회에서 한 개인이 정신적 안정감,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친숙한 부류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약탈과 사냥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인습적인 지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약탈이 아닌 생산 활동, 육체노동은 상대적으로 비천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되었고, 여성과 여성의 활동 역시 마찬가지로 취급을 받게 된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서준식의 생각』에서 “일찍부터 땀 흘리며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우치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영세한 가내공장 직공들은 거의가 내일에 대한 희망도 인생설계도 없는 떠돌이들이었다. 그들은 월급을 받으면 그것을 며칠 사이에 술과 오입질에 탕진해 버렸고 월초의 일손 부족은 늘 악몽처럼 아버지를 괴롭혔다. 뼈가 다 굵은 아들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애절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언제나 알아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지만 형이나 아우는 잽싸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한나절을 보낸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정말 고마워하시고 따뜻한 치하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진짜 기대는, 고된 육체노동을 묵묵히 견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쳐 버린 아들들에게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이 ‘입’이나 ‘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 ‘근육’을 단련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사회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지도 못한 채 나는 고등학교 1학년말부터 근육단련 대신 지성 쌓기를 시도했다. 왠지 올바른 길을 포기하고 나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것만 같았던 그때의 쓴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서준식(2003년), 「운동가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서준식의 생각』, 야간비행> 중에서

베블런은 남자들(유한계급)이 존경을 얻고 유지하려면 단순히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 낭비에 가까운 풍요로운 소비는 우아하고 고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베블런이 주장하는 유한계급의 여가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無爲)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비생산적인 용도로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물질적 소비를 동반한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훌륭한 예의범절은 인간의 탁월함, 가치 있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방편에서 전도되어 허례허식으로 흐를수록 더욱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유한계급의 상징이 된다.

『유한계급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IMF한파가 채 가시기 전이었던 2000년 2월 18일자 <한국일보>는 대우경제연구소의 「소득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소비의 왜곡현상」란 보고서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고소득층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를 하며, 중산층은 이들을 「모방」하고 저소득층은 아예 「자포자기」심정으로 과소비 대열에 끼어든다.”고 보도하고 있다. 베블런은 필요(need)와 욕구(want)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보석이다. 보석이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그것이 결국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는 드비어스(De Beers)의 광고는 단지 투명하고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가장 로맨틱한 사랑의 상징(혼인 예물)으로 만들었다. 다이아몬드는 과시적 낭비라는 명예로운 목적에 이바지함으로써 아름다운 물건(명품)이란 명성을 획득한다.

이는 다시 명품(名品) 소위 “럭셔리 신드롬(luxury syndrome)”으로 이어진다. 베블런은 제5장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금력」에서 현대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육체적 안락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과시적 소비에 지출하는 비용을 늘리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인습적인 체면치레의 기준에 맞추어 소비하는 재화의 양과 질을 높이려는 욕망에 있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인정하는 명예롭고 품위 있는 생활양식의 일반적인 수준이 최상류계급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명품 소비 열풍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 실제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의 인간으로 -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개념미술가(conceptual art) 제니 홀저는 과시적 소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인 도시의 한 전광판에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란 문구를 내보내는 실험적 작품을 전시한다. 홀저는 베블런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삶, 그 핵심에 놓인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필요(need)’가 아닌 ‘욕망(want)’이라고 생각했다. 베블런은 “습관적으로 비싼 물건을 찾게 되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습관적으로 동일시할수록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되지 않기에 이른다.”고 말한다. 압구정동의 모 백화점에서 가격을 올리자 물건이 좀더 잘 팔리더라는 일화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경제학자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리카도와 같은 고전학파나 시카고학파 같은 신고전학파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인 이기주의자로 간주하고, 이런 원리에 따라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베블런은 고전적 경제학자들의 가정에 반하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의 원인은 단시 필요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여 현대 대중사회에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자랑하고 싶은 이들에 의해 과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들은 소비,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시간이든 낭비를 일삼는데, 이런 과시적 소비는 유한계급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금 모방된다. 이런 현상을 오늘날 우리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 - “값이 비쌀수록 호사품의 가치는 커진다.”- 라 부른다. 즉,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합리적인 소비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 체제의 출현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 구소 연방의 해체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을 가능하도록 한 토대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베블런은 인간의 소비 혹은 욕망을 합리적인 것으로 단정한 고전학파나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에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제이론을 완전히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블런의 비판이 날카롭긴 했으나 그가 경제학에 새로운 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었고, 마크르스처럼 유한(자본가)계급에 대해 혁명을 주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베블런의 공적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가 유한계급에 대해 던졌던 냉소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말이다. 베블런의 지적들은 이후 정치적인 측면에서 C.W.밀즈(『파워엘리트』), 사회학적인 측면에선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선 제임스 트위첼(『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에 의해 오늘날 좀더 세부적인 측면으로 분화되어 풍요롭게 계승되고 있다.

『유한계급론』의 2005년판 역자는 베블런의 비판을 “슬픈 냉소”라 말한다. 나는 지난 한 학기 동안 “문화”를 공부하면서 “문화연구”란 학문이 현실 사회를 변화시킬 대안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계몽의 기획)을 모색하는 학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어야 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물론, 본질적으로는 변화가 없다손 치더라도) 변하는데, 학문하는 자의 발걸음은 이리도 느리기만 한 현실 자체가 사회와 시대가 우리에게 보내는 냉소는 아닐까 라는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구여! 바로 보마!”란 다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느려터진 한 인간의 세상사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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