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삼국유사 : 그리스 잡신들은 물렀거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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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벌핀치, 오비디우스의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노라면 천지창조, 신과 영웅이야기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세 가지 구분으로 나뉨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 "를 읽어볼 생각으로 세 권의 "바가바드 기타" 관련서적을 구입했다. 함석헌 선생이 옮긴 "바가바드 기타"-한길그레이트북스 18권과 간디의 해설로 된 기타를 이현주가 옮기고 당대에서 펴낸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 기타" 그리고 비노바 바베가 짓고, 김문호가 옮겨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천상의 노래"가 그것이다. 내딴엔 이렇게 해놓고 "인도 정신의 꽃"이라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위한 준비 작업이 나름대로 종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처음부터 좀 수월하게 읽을 생각으로 비노바 바베의 "천상의 노래"를 펼쳐들었는데, 웬걸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뭐든 순서가 있는 법인데 마음만 급해가지고 기지도 못하는 놈이 뛸 생각부터 한 거였다. 제대로 읽자면 함석헌 선생이 옮긴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그런 뒤에 간디와 비노바 바베를 비교해가며 읽는 것이 정석일 게다. 그런데 인도인이 아닌 내가 "바가바드 기타"를 더 잘 읽으려면 "우파니샤드"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걸 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란 건 또 대관절 뭔가? 이건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에 속하는 것으로 베다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적 제식 문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니 "우파니샤드"를 잘 읽으려면 또한 "리그 베다"도 읽어두는 편이 좋은 거다.
아마도 근대 초기에 처음 "그리스로마신화"를 접한 사람들의 심경이 지금의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서구 정신세계의 깊은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정신 두 가지를 일컬어 그리스로마신화에 기반한 헬레니즘과 유대교 전통에 기반한 헤브라이즘을 꼽는데, 지금이야 서구식 사고가 동양적 사고를 밀어내고 교육부터 시작해서 실생활의 전반부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근대 초반기만 하더라도 그리스로마 신화와 기독교 정신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고 이해는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머리로만 이해되는 것이지 속속들이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인도인이 아닌 한 베다와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조차 힘든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이를 역으로 보면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삼국유사"는 참 읽기 힘든 책이다.
어떤 이는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듣고 "삼국유사"? 그렇게 간단하고 읽기 쉬운 책이 뭐가 어렵단 말인가 하며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리들은 누구라도 사찰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특별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사찰에 놓인 불상이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제 아무리 기독교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우리에게 전해내려온 문화이므로 그런 것들이 익숙한 탓이고, 그것이 비록 기복신앙이란 비난은 듣더라도 한국 기독교 내부엔 이미 충분할 만큼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으로 가득하다. 과거에 한국인들이 마을 뒷산의 작은 암자나 바위에 치성을 드리기 위해 새벽녘 찬물로 목욕 재계하고 치성드리러 가는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100일 치성이 변화된 100일 새벽기도를 다닌다.
그 기도의 내용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 가족의 평안과 세속적 출세를 은연 중에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기독교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샤머니즘이 기독교 내부로 들어가 틀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수천수만년을 이어내려온 그 깊은 정신 세계가 단시일내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수천년의 세월을 거쳐 토속신앙인 칠성당과 산신당을 사찰 구조 내부로 받아들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요소들이 삼국유사로 표상되는 한 권의 책에 전부 담겨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존하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장 기본적인 책이 이것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고대 서적으로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일찌기 육당 최남선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의미는 반감되지 않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와 고구려, 백제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두루 모아서 지은 책으로 오랜 기간 여러 전란을 겪으며 민족의 문화유산이 망실되는 가운데 다른 문헌들의 내용을 유추해 살펴볼 수 있는 근거로 남은 유일한 서책이기도 하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들에 의해 이루어진 정사(正史)에 해당한다면,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야사(野史)의 성격을 띄고 있다. 비록 책의 구성이나 문체적인 특성은 "삼국사기"에 비해 떨어질지 몰라도, 고조선과 단군 신화, 향찰로 표기된 신라 향가 등을 담고 있어 우리 고대 문학사는 물론 우리 민족의 개국과 관련한 민족적 연원을 따라가는데도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을유문화사판 "삼국유사"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건양대 중문과 교수인 김원중이 우리가 요새 읽을 수 있는 말로 옮긴 것이다. "왕력(王曆)" 연표를 부록으로 뒤로 빼고, "삼국유사"의 전내용을 600여쪽이 넘는 분량으로 축약없이 담아내고 있다. 그외 나머지 구성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기이 제1, 기이 제2, 흥법 제3, 탑상 제4, 의해 제5, 신주 제6, 감통 제7, 피은 제8, 효선 제9"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기이 제1에서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수록되어있고, 우리 민족의 구성 및 삼국의 개국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 얼마전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이 "천황가는 본시 백제계로서, 한반도를 통해 도래한 집안이다."란 말의 근거 신화가 되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도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기이 제1과 2"에는 삼국 시대의 여러 일화들을 중심으로 담고 있는데, 이 내용들이 가히 우리 민족의 신화라고 할 만한 내용들이다. 에게게, 이게 무슨 신화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몰라 한 마디 쐐기를 박아두자면, 그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트로이 전쟁" 이후 편을 유심히 살피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네들이 신화라고 내세우는 것들도 사실 우리 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단적인 예로 트로이 전쟁엔 올림푸스의 신들도 두 패로 갈려 각기 다른 영웅들을 돌보아준다. 물론 운명이 다하면 신도 도울 수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헥토르는 아켈레우스에게 패하여 숨지고 만다. 이를 "삼국유사"에서 찾아보면 "각간 김서현의 아들인 김유신은 나이 18세에 국선이 되는데, 그의 낭도에 백석이란 자가 있었다. 백석은 김유신이 장차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정벌할 자임을 알고, 김유신에게 고구려를 관찰하러 가보자고 꼬드겨 고구려로 데려간 뒤 그를 해할 심산이었다. 이때 김유신 앞에 세 명의 여인이 나타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밤이 되었는데 백석을 따로 떼어놓고, 김유신만 숲으로 데려가 백석이 사실은 고구려의 밀정임을 알려준다. 잠시 후에 살펴보니 이 세 여인은 신라의 수호신들인 내림, 혈레, 골화였다."고 서술된다.
이외에도 미추왕과 죽엽군, 만파식적, 처용 이야기 등을 어찌 그리스로마신화보다 떨어지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고흐의 그림은 높이 치면서도 김홍도의 그림은 그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우둔한 후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유사"는 구 신라 지역의 승려가 저술한 내용이다 보니 한반도 전체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을 북반부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략하게 정리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거기에 승려란 신분 탓인지 불교적인 이야기와 사상이 깊이 배어있는 측면도 있다. 게다가 간혹 잘못 전해진 이야기들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인다. 그럼에도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서사시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 생활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치는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로 재단하여 수록치 아니한 우리 고대 기록의 원형들을 담아 후세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에서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의 보물단지라 할 수 있다.
물론, 조만간에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에도 도전해보겠지만, 그런저런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서사시 "삼국유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또한 뿌듯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