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에로이카 >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체제를 구성하는 다국적 기업들에 관한 연구서
자본의 세계화
프랑수아 셰네 지음, 서익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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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처음 알게 것은 박승호 선생의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통해서이다. 책에서는 셰네의 책이 소소한 이유로 비판되는 한편, 책이 제시하는 굵직한 주장은 옹호된다:  새로운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 체제하에서 금융자본의 수입은 지대 형태를 띠며 (61-64, 242), 자본은 새로운 가치와 부의 생산에서 형성되는 일차소득에 대한 실질적인잠식을 통해서 소득을 올리며 성장한다” (295).

 

책은 읽기 쉽지 않다. 이유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익숙해 있던 세계경제의 서술과 다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세계경제의 서술에서 주요 행위자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셰네의 책에서 초점은 다국적 기업들에게 맞춰져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대기업에 대한 인상이란, 삼성, LG, SK 같은 브랜드이거나, ‘천하무적 홍대리같은 데서 있는 직장인의 회사생활이거나, 끽해야 살인적 노동탄압을 일삼는 POSCO, 정경유착이나 편법 재산상속 같은 주제들이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는 대기업들의 모습은 이처럼 우리가 쉽게 접할 있는 대기업들의 모습이 아니다. 책의 초점은 다국적 기업들이 상호 쟁투를 통해 작금의 금융주도 축적 체제를 어떻게 형태짓고, 이로부터 어떻게 규정받는 지에 맞춰져 있다.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다.

 

셰네는 초국적기업이라는 대신 다국적기업이란 말을 선호하는데, 이는 보통 대기업들이 특정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31) [cf. 박승호 선생이 높이 평가하는 Open Marxism에서의 주장과 일치한다].  금융의 세계화’, 각국의 통화제도들과 금융시장들 간의 상호연계가 더욱 조밀하게 되는 과정은 1979 이후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주요 공업국들에서 채택되었던 자유화 탈규제 조치들의 산물이다. 결과 등장한 단일한 범세계적 금융공간은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 대단히 위계적. 미국의 금융제도가 다른 나라들의 금융제도를 지배. (2) 감독과 통제가 결여. (3) 시장들의 통일성은 금융운용자들에 의해서 담보.

 

셰네는 80-90년대 국제 직접투자의 성장이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삼두체 (Triad) 간의 국제교차투자의 성장 힘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OECD 국가들 간의 투자에서 다수를 점한 투자 형태는 바로 기존 기업들의 인수, 합병이다” (87).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 차원의 양극화를 동반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전세계 직접투자의 유입 총액에서 개도국이 점하는 비중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90).

 

셰네는 미샬레(Michalet) 다국적 기업 정의를 따른다: “보통 규모가 거대하며, 일국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러 나라에 걸쳐 해외 자회사를 설립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구상된 전략과 조직을 가지는 기업(또는 그룹)” (96).  그는 자본의 국제적 집적의 구현태라 있는 기업들이 어떻게(“쟁투의 공간이자 시장의 상호의존) 세계적 과점체들을 형성하는 지를 추적한다. 과정에서 산업그룹들이 상당한 수준의 금융적 운용과 국제화된 흐름들 통해 자신 내부의 연속된 금융공간의 이점 누리는 동시에, 브레턴우즈체제 이후 변동환율제가 시행된 외환 시장들에 개입하면서 (외환 투기) 금융 세계화의 능동적 주체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통합된 단일한 축적 체제는 차별화된 국민적 상황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삼극체제 외부의 국가들은 일차재료의 산출국으로서의 역할이나 낮은 임금비용이 드는 해외 하청기지로서의 역할만이 부여되고, 선진국과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설치된 시장 접근상의 산업적 장벽들의 존재로 인해 주변부 국가들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전하기란 무척 힘들다.

 

역자서문에서 역자는 책의 관점에 입각하여 다국적 기업으로서 한국의 재벌을 분석해야 필요를 제기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사실 다국적 기업으로서 재벌의 행태는 앞에서 언급한 우리가 갖고 있는 재벌의 이미지들에 반영되지 않은 일종의 blind spot이다. 우리가 봐야 것은 재벌의 글로벌 브랜드 이면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세계적 과점체로서 쟁투의 공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와중에 금융 운용을 어떻게 하며, 국가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역자의 차후 작업들이 기대된다.

 

몇가지 오역들을 지적하자면,

1.       조세천국 (62, 218). 이는 조세도피처 (tax haven) 명확한 오역이다. haven heaven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2.       똑같은 개념이 "세계체제" (41, 42, 296), "세계-체계" (292), "세계시스템" 여러 번역어로 쓰이는데, "세계체계"로 통일하는 좋겠다. 덧붙여, “경제-세계(economy-world)” (265)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경제(world-economy) 불역어인 économie-monde 잘못 옮긴 것이다. “세계경제 해야 맞다.

3.       101쪽을 보면 인용구 뒤에 “(강조는 원저)” 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강조가 되어 있다.

4.       268 1-2” 그림 1-2”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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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drianus75 >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철학
창조적 진화 대우고전총서 11
앙리 베르그손 지음, 황수영 옮김 / 아카넷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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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만큼 사랑스러운 철학자가 또 있을까?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창조적 진화는 철학사적 중요성 보다도 그 가슴 따뜻한 저자의 마음으로 독자를 울리는 작품이다. 화려한 문학적 기교도 없으며 뜬구름 잡는 듯한 형이상학적 논의도 없다. 생명에 대한 19세기 과학의 접근방식을 비판하면서, 생명이란 그러한 합리적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물론 베르그손이 이 과학적 틀을 비판하는 지점들은 과학사를 모르고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겐 생소하고 난해할 수 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이여, 그러한 부분은 건너 뛰자. 왜냐하면 베르그손은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으로 다시 쉽게 독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으로 분류되는 과학적 방법론은 현대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식론적 틀이다. 가령 통일장이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얼마나 목적론적인지? 우리의 삶에, 우리가 사는 사회에 시간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목적론과 기계론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라는 잔인한 목적론, 퍼부은 만큼의 결과를 에누리 없이 획득하고자 하는 각박한 기계론...그렇기에 베르그손의 후예들은 현대사회 분석에 그의 개념들을 발전시켜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생명과 그 개체를 넘어선 생명 일반의 운동의 만남, 끊임없이 펼쳐지는 생명의 활력, 발생부터 진화에 이르는 이 광대한 생명의 역사에 나의 소중한 삶이 함께 하고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산적 욕망, 그것이 베르그손의 이 생명에서 착안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 논의들은 일반 독자들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지 않는다. 생명활동은 파브르 곤충기의 쐐기벌레와 나나니벌의 예로 단순하게 표현된다.(실제로 가난했던 파브르를 뒤늦게 발견하고 그를 후원한 일군의 지식인들 중에 우리는 베르그손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체의 보존을 넘어선 생명과 생명의 만남. 욕망의 접속? 근대 철학이 가정하고 있던 '무'에 대한 생각에 대한 비판은 그 복잡다단한 논의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고 상정되는 방이 사실 공기로 가득차 있다는 말로 간단히 예시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없을 뿐, 나의 관심을 벗어난 다른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근대사회가 부과하는 기율의 토대인 합리적 질서는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방의 예로 간단히 허물어진다. 엄마들이 잔소리하는 자식들의 지저분한 방, 폐인들의 방은 질서가 '없는' 방이 아니라 다른 질서가 '있는' 방이다. 그 다른 질서가 바로 삶이 이루어 놓은 삶의 질서다. 인위적 배치가 아닌, 나의 몸이 나 모르게 만든 질서다. 복잡하고 추상적일 수 있는 논의들은 그 마지막에 그냥 별다를 것 없는 삶의 대지에 가볍게 사뿐히 내려 앉는다.

프랑스 내에서 데까르트 이후 최고의 철학자라는 명성은 데까르트 비판에서 보다도 이렇게 삶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주장들, 과학을 모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그의 주장들,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 특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후설 이후 현대 철학의 주요 영역은 현상, 이미지, 문화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현상으로의 접근 이전에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론을 부순 니체와 베르그손의 공로가 무시 될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현대 철학은 두 개의 커다란 생각들로 갈라진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자들과 니체와 베르그손의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차이. 리꾀르, 레비나스와 푸코, 들뢰즈의 차이, 미시사와 구조사(또는 정치문화사)의 차이, 클리포드 기어츠의 해석 인류학과 끌라스트르의 정치 인류학의 차이 등....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임시구분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손이 말하듯, 생명현상은 순수생명이기에 앞서, 일종의 타협, 무기물과 생명의 타협이기 때문이다. Modus vivendi !, 살아가는 방식, 그것은 그 자체로 타협, 외부와 내부간의 소통, 자기조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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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drianus75 > 이야기 해석과 사회
시간과 이야기 1 -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현대의 문학 이론 33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이경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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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에 기반을 둔 들뢰즈의 철학이 존재론으로 인식을 정초하려 한다면, 리꾀르는 가다머와 독일 정신과학의 전통을 수용하여 인식으로 존재를 정초하려한다.리꾀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 경험이다.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주체 이전의 존재라면, 시간 경험은 '나'라는 차원에서 주어진 존재의 딜레마다. 리꾀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인간 시간경험의 아포리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는 이야기의 구성원칙인 미메시스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틀을 사회로 활짝 열고, 문학과 역사를 통한 새로운 주체, 그리고 독특한 사회철학으로 사유를 전개시킨다. 오만한 근대적 주체가 아닌 타자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주체는 문학과 역사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공동체와 사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기관없는 신체, 욕망은 리꾀르의 말대로 문학적 창조물에 불과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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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drianus75 > 이야기 해석과 사회
시간과 이야기 1 -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현대의 문학 이론 33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이경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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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에 기반을 둔 들뢰즈의 철학이 존재론으로 인식을 정초하려 한다면, 리꾀르는 가다머와 독일 정신과학의 전통을 수용하여 인식으로 존재를 정초하려한다.리꾀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 경험이다.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주체 이전의 존재라면, 시간 경험은 '나'라는 차원에서 주어진 존재의 딜레마다. 리꾀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인간 시간경험의 아포리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는 이야기의 구성원칙인 미메시스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틀을 사회로 활짝 열고, 문학과 역사를 통한 새로운 주체, 그리고 독특한 사회철학으로 사유를 전개시킨다. 오만한 근대적 주체가 아닌 타자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주체는 문학과 역사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공동체와 사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기관없는 신체, 욕망은 리꾀르의 말대로 문학적 창조물에 불과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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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호모루덴스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과 계승
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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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더불어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고전적 명저로 알려져 있는 것이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다. 카이와의 이 책은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여 확대 재해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카이와는 우선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내렸던 "놀이"의 정의를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호이징가는 놀이란 "허구적인 것으로 일상생활 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이하는 자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떠한 물질적 이익도 효용도 없는 행위로서, 명확하게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해지며, 주어진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데, 기꺼이 자신을 신비로 둘러싸거나 아니면 가장(假裝)을 통해 평상시의 세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집단 관계를 생활 속에 생기게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카이와는 일단 호이징가의 정의에 동의하면서도 "놀이활동은 필연적으로 비밀과 신비를 희생시키면서 행해진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비밀을 드러내고, 공표하며, 어떻게 보면 비밀을 소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놀이 활동은 비밀로부터 비밀의 성질 자체를 빼앗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비밀, 가면, 의복이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한 때는,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제도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일정하게 동의하면서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놀이와 제도(혹은 성사)를 명백하게 구분하는 근거로 비밀과 신비의 희생유무를 들고 있다. 즉, 비밀과 신비로 포장된 활동은 놀이가 아니란 말이다.

카이와의 호이징가에 대한 비판은 거듭된다. 호이징가의 정의에 의하면 놀이 가운데 물질적 이해가 포함되는 것은 제외되어 버리는데, 내기와 우연놀이(도박, 카지노, 경마, 복권 등)이 제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째서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저렇게 비판하고 있으며, 흡사한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일까?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을 읽으며 나는 그런 의문을 품었다.

이 책의 1부는 "놀이의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해명하는데 쓰이고 있다. 호이징가는 1933년 라이덴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주제 강연에서 '문화에 있어서 놀이와 진지함의 경계에 대하여' 를 다뤘다. 그리고 1938년 "중세의 가을"과 더불어 그를 대표하는 저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놀이의 본질적 성질에 대해 정의내리려 하였고, 한편으로 예술과 철학,시와 법률제도,전쟁 의례의 몇몇 측면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모든 표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놀이의 역할을 설명하고자 했다. 로제 카이와는 그런 호이징가의 노력과 학문적 성취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그의 정의에서 미진한 부분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놀이는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들 놀이는 다시 놀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두 가지 의식으로 나뉜다. 놀이의 네 가지 분류는 "경쟁, 우연, 모의, 현기증"이라는 역할 가운데 어느 것이 좀더 중요한 속성인가로 구분되는데, 우선 대등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서로의 능력을 통해 승부가 결정되는 경쟁 놀이ㅡ 아곤(ex. 스포츠 등)과 우연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우연 놀이 - 알레아(ex. 주사위, 제비뽑기 등), 정해진 약속에 의해 몇 가지 허구적 모의(역할 놀이)에 의한 놀이 - 미미크리(ex. 소꼽놀이 등),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여 기분좋은 패닉 상태를 일으키는 놀이 - 일링크스(ex. 놀이기구 등)으로 구분한다.

카이와는 놀이의 잠재된 의식으로 "파이디아와 루두스"를 말한다. 파이디아는 놀이 본능의 자발적 속성으로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파이디아에 약속(규칙)이나 기술, 도구가 등장하면서 최초의 놀이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에 비해 루두스는 이런 원초적인 욕망에 새로운 임의의 장애물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장애를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으로 파이디아를 길들이고,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루두스는 경쟁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애들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카이와는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와 파이디아, 루두스의 결합관계를 통해 이들 놀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루두스와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는 서로 결합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나, 파이디아와 알레아, 루두스와 일링크스는 서로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파이디아의 속성인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욕망이므로 수동적인 기다림, 근본적으로는 침묵의 게임인 알레아(우연놀이- 화투는 우연놀이가 아닌가?)와 결합할 수 없고, 설정된 (지적이든 육체적이든)장애를 극복하는 묘미를 즐기는 루두스의 속성은 순수한 흥분의 결정체인 일링크스(유원지 놀이기구)와 결합할 수 없다. 카이와는 루두스의 현대적 변용, 중요한 속성의 한 부분으로 아곤의 경쟁심리가 작용한다면서 완(玩)의 정신을 말한다.

완하면 먼저 완상(玩賞), 완구(玩具)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때의 완은 애호가들의 수집, 손수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는 일 등을 말한다. 완의 취미, 즉 루두스는 일정하게 아곤과 결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경쟁이 루두스의 지속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놀이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제도를 만들어내고, 문화현상(놀이의 사회성)으로 파악된다. 놀이의 특징은 "자유롭고, 분리되었으며, 확정되지 않았고, 비생산적이며, 규칙이 있는, 허구적인 활동"으로 규칙과 허구는 서로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카이와가 놀이를 통해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이의 타락"이다. 놀이는 종종 일상생활(놀이와 반대되는), 현실에 오염되면서 타락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경쟁놀이인 아곤에서 놀이를 유지하고, 즐기기 위한 규칙, 심판과 판정이 무시될 때, 경쟁에 내재된 선천적 난폭성이 드러나게 된다. 우연놀이인 알레아는 놀이를 즐기는 이가 더이상 운명의 뜻에 따를 의사가 없거나 미리 판결을 알고자 하거나(사기 도박) 은혜를 받고 싶은 유혹(미신)에 따를 때 생겨난다. 미미크리(모의 놀이, 역할 놀이)의 타락은 모의된 역할을 현재의 자신과 구분하지 못해 생겨나는 광기로,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이와는 이를 현대 세계, 인류의 현실과 연결시킨다. 아곤의 타락할 때, 인류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라는 최초(야만)의 상황으로 복귀하게 되고, 알레아의 타락은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로또복권 열풍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미미크리의 타락은 개인적으로는 광기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부자되기 열풍이 될 때는 성취되지 못한 열망을 해소하기 위한 막가파로 등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것이 국가적인 권위와 결합할 때는 제복이 하나의 가면이 되어 권위의 표시로 등장한다.

앞서 호이징가가 내린 놀이의 정의와 카이와가 내리고 있는 놀이의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이 두 학자가 살아온 시간의 차이,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카이와의 호이징가 비판에서 놀이는 비밀과 신비를 소비하고, 해소하는, 심지어는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한 까닭,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나치즘)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이징가는 1872년에 태어나 1945년에 세상을 떠난 학자로 그의 학문적 틀은 고전 시대의 그것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가 "호모루덴스"를 집필한 것은 분명 독일에서 발호하고 있는 나치즘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의 이런 비판은 그가 "호모 루덴스"를 발표한 이듬 해인 1939년 나치에 의해 네덜란드(호이징가는 네덜란드 학자임)가 점령당하고, 가택구금된 상태에서 종전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다소 무력해보인다. 그의 학문적 뿌리는 고전시대의 그것(전통)과 연결되어 놀이의 본질을 설파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종교, 신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상업적인 놀이(프로스포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백안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호이징가는 고전적 지식인의 면모를 지닌 학자였다.

그에 비해 카이와는 나치즘이 신비와 비밀스런 제의적 놀이(ex. 히틀러 유겐트, 야영놀이, 청소년 스포츠 제전 등)을 통해 놀이의 본질을 어떻게 오염시키고, 변질시켰는가를 살펴볼 시간적 여유(역사를 냉정하게 관찰해볼 물리적, 역사적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놀이와 인간은 1959년에 발표되었다). 그런 까닭에 카이와는 놀이의 정의에 있어 신비와 비밀스런 가장(假裝)과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할 때는 놀이가 아니라 제도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카이와는 놀이의 타락이 현대사회의 타락과 연결되어 제한없는 전쟁, 광기의 사회, 집단의 개인에 대한 공격(린치, 테러)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것이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비판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를 확대계승한 형태로 나타난 이유다.

호이징가는 놀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놀이는 물리법칙(현실)을 벗어난 이상의 의미를 지닌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즉, 본래 인간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노동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고, 놀이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인간은 (많은 인류학자, 생태학자들이 예시하고 있듯,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공유하는)결코 현대의 인간처럼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노동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공통된 찬미는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결합하여 인간에게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노동을 강요하며 생겨난 일종의 문화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건강한 놀이를 회복할 때 인류는 건강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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