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호모루덴스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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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요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더불어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고전적 명저로 알려져 있는 것이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다. 카이와의 이 책은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여 확대 재해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카이와는 우선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내렸던 "놀이"의 정의를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호이징가는 놀이란 "허구적인 것으로 일상생활 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이하는 자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떠한 물질적 이익도 효용도 없는 행위로서, 명확하게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해지며, 주어진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데, 기꺼이 자신을 신비로 둘러싸거나 아니면 가장(假裝)을 통해 평상시의 세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집단 관계를 생활 속에 생기게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카이와는 일단 호이징가의 정의에 동의하면서도 "놀이활동은 필연적으로 비밀과 신비를 희생시키면서 행해진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비밀을 드러내고, 공표하며, 어떻게 보면 비밀을 소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놀이 활동은 비밀로부터 비밀의 성질 자체를 빼앗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비밀, 가면, 의복이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한 때는,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제도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일정하게 동의하면서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놀이와 제도(혹은 성사)를 명백하게 구분하는 근거로 비밀과 신비의 희생유무를 들고 있다. 즉, 비밀과 신비로 포장된 활동은 놀이가 아니란 말이다.
카이와의 호이징가에 대한 비판은 거듭된다. 호이징가의 정의에 의하면 놀이 가운데 물질적 이해가 포함되는 것은 제외되어 버리는데, 내기와 우연놀이(도박, 카지노, 경마, 복권 등)이 제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째서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저렇게 비판하고 있으며, 흡사한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일까?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을 읽으며 나는 그런 의문을 품었다.
이 책의 1부는 "놀이의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해명하는데 쓰이고 있다. 호이징가는 1933년 라이덴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주제 강연에서 '문화에 있어서 놀이와 진지함의 경계에 대하여' 를 다뤘다. 그리고 1938년 "중세의 가을"과 더불어 그를 대표하는 저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놀이의 본질적 성질에 대해 정의내리려 하였고, 한편으로 예술과 철학,시와 법률제도,전쟁 의례의 몇몇 측면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모든 표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놀이의 역할을 설명하고자 했다. 로제 카이와는 그런 호이징가의 노력과 학문적 성취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그의 정의에서 미진한 부분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놀이는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들 놀이는 다시 놀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두 가지 의식으로 나뉜다. 놀이의 네 가지 분류는 "경쟁, 우연, 모의, 현기증"이라는 역할 가운데 어느 것이 좀더 중요한 속성인가로 구분되는데, 우선 대등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서로의 능력을 통해 승부가 결정되는 경쟁 놀이ㅡ 아곤(ex. 스포츠 등)과 우연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우연 놀이 - 알레아(ex. 주사위, 제비뽑기 등), 정해진 약속에 의해 몇 가지 허구적 모의(역할 놀이)에 의한 놀이 - 미미크리(ex. 소꼽놀이 등),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여 기분좋은 패닉 상태를 일으키는 놀이 - 일링크스(ex. 놀이기구 등)으로 구분한다.
카이와는 놀이의 잠재된 의식으로 "파이디아와 루두스"를 말한다. 파이디아는 놀이 본능의 자발적 속성으로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파이디아에 약속(규칙)이나 기술, 도구가 등장하면서 최초의 놀이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에 비해 루두스는 이런 원초적인 욕망에 새로운 임의의 장애물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장애를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으로 파이디아를 길들이고,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루두스는 경쟁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애들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카이와는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와 파이디아, 루두스의 결합관계를 통해 이들 놀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루두스와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는 서로 결합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나, 파이디아와 알레아, 루두스와 일링크스는 서로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파이디아의 속성인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욕망이므로 수동적인 기다림, 근본적으로는 침묵의 게임인 알레아(우연놀이- 화투는 우연놀이가 아닌가?)와 결합할 수 없고, 설정된 (지적이든 육체적이든)장애를 극복하는 묘미를 즐기는 루두스의 속성은 순수한 흥분의 결정체인 일링크스(유원지 놀이기구)와 결합할 수 없다. 카이와는 루두스의 현대적 변용, 중요한 속성의 한 부분으로 아곤의 경쟁심리가 작용한다면서 완(玩)의 정신을 말한다.
완하면 먼저 완상(玩賞), 완구(玩具)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때의 완은 애호가들의 수집, 손수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는 일 등을 말한다. 완의 취미, 즉 루두스는 일정하게 아곤과 결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경쟁이 루두스의 지속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놀이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제도를 만들어내고, 문화현상(놀이의 사회성)으로 파악된다. 놀이의 특징은 "자유롭고, 분리되었으며, 확정되지 않았고, 비생산적이며, 규칙이 있는, 허구적인 활동"으로 규칙과 허구는 서로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카이와가 놀이를 통해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이의 타락"이다. 놀이는 종종 일상생활(놀이와 반대되는), 현실에 오염되면서 타락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경쟁놀이인 아곤에서 놀이를 유지하고, 즐기기 위한 규칙, 심판과 판정이 무시될 때, 경쟁에 내재된 선천적 난폭성이 드러나게 된다. 우연놀이인 알레아는 놀이를 즐기는 이가 더이상 운명의 뜻에 따를 의사가 없거나 미리 판결을 알고자 하거나(사기 도박) 은혜를 받고 싶은 유혹(미신)에 따를 때 생겨난다. 미미크리(모의 놀이, 역할 놀이)의 타락은 모의된 역할을 현재의 자신과 구분하지 못해 생겨나는 광기로,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이와는 이를 현대 세계, 인류의 현실과 연결시킨다. 아곤의 타락할 때, 인류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라는 최초(야만)의 상황으로 복귀하게 되고, 알레아의 타락은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로또복권 열풍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미미크리의 타락은 개인적으로는 광기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부자되기 열풍이 될 때는 성취되지 못한 열망을 해소하기 위한 막가파로 등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것이 국가적인 권위와 결합할 때는 제복이 하나의 가면이 되어 권위의 표시로 등장한다.
앞서 호이징가가 내린 놀이의 정의와 카이와가 내리고 있는 놀이의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이 두 학자가 살아온 시간의 차이,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카이와의 호이징가 비판에서 놀이는 비밀과 신비를 소비하고, 해소하는, 심지어는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한 까닭,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나치즘)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이징가는 1872년에 태어나 1945년에 세상을 떠난 학자로 그의 학문적 틀은 고전 시대의 그것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가 "호모루덴스"를 집필한 것은 분명 독일에서 발호하고 있는 나치즘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의 이런 비판은 그가 "호모 루덴스"를 발표한 이듬 해인 1939년 나치에 의해 네덜란드(호이징가는 네덜란드 학자임)가 점령당하고, 가택구금된 상태에서 종전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다소 무력해보인다. 그의 학문적 뿌리는 고전시대의 그것(전통)과 연결되어 놀이의 본질을 설파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종교, 신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상업적인 놀이(프로스포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백안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호이징가는 고전적 지식인의 면모를 지닌 학자였다.
그에 비해 카이와는 나치즘이 신비와 비밀스런 제의적 놀이(ex. 히틀러 유겐트, 야영놀이, 청소년 스포츠 제전 등)을 통해 놀이의 본질을 어떻게 오염시키고, 변질시켰는가를 살펴볼 시간적 여유(역사를 냉정하게 관찰해볼 물리적, 역사적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놀이와 인간은 1959년에 발표되었다). 그런 까닭에 카이와는 놀이의 정의에 있어 신비와 비밀스런 가장(假裝)과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할 때는 놀이가 아니라 제도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카이와는 놀이의 타락이 현대사회의 타락과 연결되어 제한없는 전쟁, 광기의 사회, 집단의 개인에 대한 공격(린치, 테러)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것이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비판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를 확대계승한 형태로 나타난 이유다.
호이징가는 놀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놀이는 물리법칙(현실)을 벗어난 이상의 의미를 지닌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즉, 본래 인간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노동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고, 놀이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인간은 (많은 인류학자, 생태학자들이 예시하고 있듯,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공유하는)결코 현대의 인간처럼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노동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공통된 찬미는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결합하여 인간에게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노동을 강요하며 생겨난 일종의 문화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건강한 놀이를 회복할 때 인류는 건강해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