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에로이카 >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체제를 구성하는 다국적 기업들에 관한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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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세계화
프랑수아 셰네 지음, 서익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박승호 선생의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을 통해서이다. 그 책에서는 셰네의 이 책이 소소한 이유로 비판되는 한편, 이 책이 제시하는 굵직한 주장은 옹호된다: 새로운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 체제하에서 금융자본의 수입은 지대 형태를 띠며 (61-64, 242), 이 자본은 “새로운 가치와 부의 생산에서 형성되는 일차소득에 대한 ‘실질적인’ 잠식을 통해서 소득을 올리며 또 성장한다” (295).
이 책은 읽기 쉽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익숙해 있던 세계경제의 서술과 다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세계경제의 서술에서 주요 행위자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셰네의 이 책에서 초점은 다국적 기업들에게 맞춰져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대기업에 대한 인상이란, 삼성, LG, SK 같은 브랜드이거나, ‘천하무적 홍대리’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직장인의 회사생활이거나, 끽해야 살인적 노동탄압을 일삼는 POSCO나, 정경유착이나 편법 재산상속 같은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대기업들의 모습은 이처럼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기업들의 모습이 아니다. 이 책의 초점은 다국적 기업들이 상호 쟁투를 통해 작금의 금융주도 축적 체제를 어떻게 형태짓고, 또 이로부터 어떻게 규정받는 지에 맞춰져 있다.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다.
셰네는 ‘초국적’ 기업이라는 말 대신 ‘다국적’ 기업이란 말을 선호하는데, 이는 보통 이 대기업들이 특정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31) [cf. 박승호 선생이 높이 평가하는 Open Marxism에서의 주장과 일치한다]. ‘금융의 세계화’, 곧 각국의 통화제도들과 금융시장들 간의 상호연계가 더욱 조밀하게 되는 과정은 1979년 이후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주요 공업국들에서 채택되었던 자유화 및 탈규제 조치들의 산물이다. 이 결과 등장한 단일한 범세계적 금융공간은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 대단히 위계적. 미국의 금융제도가 다른 나라들의 금융제도를 지배. (2) 감독과 통제가 결여. (3) 시장들의 통일성은 금융운용자들에 의해서 담보.
셰네는 80-90년대 국제 직접투자의 성장이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삼두체 (Triad) 간의 국제교차투자의 성장 에 힘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같은 시기에 OECD 국가들 간의 투자에서 다수를 점한 투자 형태는 바로 기존 기업들의 인수, 합병’이다” (87).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 차원의 양극화를 동반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전세계 직접투자의 유입 총액에서 개도국이 점하는 비중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90).
셰네는 미샬레(Michalet)의 다국적 기업 정의를 따른다: “보통 규모가 거대하며, 일국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러 나라에 걸쳐 해외 자회사를 설립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구상된 전략과 조직을 가지는 기업(또는 그룹)” (96). 그는 자본의 국제적 집적의 구현태라 할 수 있는 이 기업들이 어떻게(“쟁투의 공간”이자 “시장의 상호의존”인) 세계적 과점체들을 형성하는 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산업그룹들이 “상당한 수준의 금융적 운용과 국제화된 흐름들”을 통해 자신 내부의 “연속된 금융공간의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브레턴우즈체제 이후 변동환율제가 시행된 외환 시장들에 개입하면서 (외환 투기) 금융 세계화의 능동적 주체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끝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통합된 단일한 축적 체제는 차별화된 국민적 상황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삼극체제 외부의 국가들은 일차재료의 산출국으로서의 역할이나 낮은 임금비용이 드는 해외 하청기지로서의 역할만이 부여되고, 선진국과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설치된 시장 접근상의 산업적 장벽들의 존재로 인해 이 주변부 국가들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전하기란 무척 힘들다.
역자서문에서 역자는 이 책의 관점에 입각하여 다국적 기업으로서 한국의 재벌을 분석해야 할 필요를 제기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사실 다국적 기업으로서 재벌의 행태는 이 글 맨 앞에서 언급한 우리가 갖고 있는 재벌의 이미지들에 반영되지 않은 일종의 blind spot이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재벌의 글로벌 브랜드 이면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세계적 과점체로서 쟁투의 공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그 와중에 금융 운용을 어떻게 하며, 국가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역자의 차후 작업들이 기대된다.
몇가지 오역들을 지적하자면,
1. 조세천국 (62, 218). 이는 조세도피처 (tax haven)의 명확한 오역이다. haven을 heaven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2. 똑같은 개념이 "세계체제" (41, 42, 296), "세계-체계" (292), "세계시스템" 등 여러 번역어로 쓰이는데, "세계체계"로 통일하는 게 좋겠다. 덧붙여, “경제-세계(economy-world)” (265쪽)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경제(world-economy)의 불역어인 économie-monde를 잘못 옮긴 것이다. “세계경제”로 해야 맞다.
3. 101쪽을 보면 인용구 뒤에 “(강조는 원저)” 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강조가 안 되어 있다.
4. 268쪽 “표 1-2” 는 “그림 1-2”로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