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야의 책을 읽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서의 목적은 새로운 지식과 미적 체험에 있지 않을까 싶다. 평소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야의 지식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열어 주는 책이야 우리 주변에 넘쳐 나지만, 해당 분야의 문외한까지 끈기를 잃지 않게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멋진 책 한 권을 접하면서 흥분하는 경험은 독서 애호가로서는 적잖은 기쁨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 자랑스러울 일은 아니지만, 평소 나는 자연과학의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수학자나 물리학자를 생각하면 '저네들은 뜬구름 잡는 몽상가나 현실 부적응자일 거야'라며 가벼운 조소를 날리는 것이 나이다.(나 역시 그들과 호형호제할 수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모처럼 결심을 하고 이 쪽 분야의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을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이 책이다. 유클리드, 이름은 뉴스에서 대통령 이름만큼이나 많이 들었으면서도 정작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도 아는 바 없었고, 아인슈타인이 왜 천재라고 불리는지 큰 관심도 없었던 터에 기하학의 역사를 개괄하는 이 책은 나에게 안성맞춤으로 보였다.이 책은 해당 방면 문외한으로서는 그다지 쉽지는 않은 책이다. 다 읽고 나서도 기하학의 수 천 년 역사에 대해서 개략적인 윤곽만 잡았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나는 독서 후 굉장한 포만감을 느꼈다. 지식의 차원에서 보면 사람들의 생애를 약간 훑었다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겼던 셈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전문 지식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일은 전문지식 그 자체에 깊이 탐닉하여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대중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중을 상대로 전문 지식을 지루한 감 없이 전달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의 저자 몰로디노프는 일급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거의 천부적인 개그맨이다. 실재의 추상에 의존할 수 없는 기하학의 특성상 공리나 명제만을 다룬다면 그 얼마나 지루할까.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아들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하고, 할리우드 코메디의 기지 넘치는 대사를 연상할 정도로 센스가 대단한 사람이다. 기하학 책을 읽으면서 박장대소한다는 일이 과연 상상이나 가능한 일일까. 이 불가능한 사건을 현실화하고 있는 이 저자의 재치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좋은 책은 관심을 증폭시키고 새로운 책을 찾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그 책은 독서의 긍정적 이미지를 보유하고 독서의 즐거움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좋은 책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이번에는 무슨 책을 찾아볼까 즐거운 고민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이 책을 출판한 까치 출판사는 이 나라의 지식 보급 역사에서 길이 남을 출판사라는 생각이 든다. 까치는 존경스러운 출판사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이 사람 좀 이상한데...'라며 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진리이다. 까치 출판사 책을 사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며, 읽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다시 보게 되리라.
현대 사회의 문화와 예술은 다양한 측면의 문제를 함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말과 글자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어의 문제는 인간 문화의 시작과 끝에 가로놓여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은 도와 로고스라는 동서양 철학의 중심 화두를 각각 대표하는 개념을 표제로 내세움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 기능이 지닌 궁극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러한 진리의 언명조차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함유한 개념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이성 혹은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데리다식의 해체주의가 서양의 지적 전통을 로고스중심주의로 규정하면서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중국과 서양은 판이한 지적 전통을 가진 문화권으로 가정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미숙한 견해거나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와 로고스의 대립이 압축적으로 표상하듯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서양은 적어도 근대 사회 이후로 많은 것들을 언어적 표상으로 포섭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장에서만 보면 현대의 서구 시인들은 적어도 동양의 도 개념이 함축하는 언어의 함축성, 암시, 신비주의적 현현에 대해서 강한 열망을 드러내 보인다. 말라르메의 순수시나 발레리의 상징시학은 그들이 토해 내는 몇 마디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가 깔고 있는 여백으로부터 말로는 현현되지 않을 신비주의적 암시를 지향했다. 저자는 양의 동서와 시간의 고금을 종횡으로 옮겨가면서 언어에 대한 서양적 관념과 현상을 중국적 관념과 현상과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적어도 언어 문제에 있어서 양의 동서 사이에 선입견으로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것같다. 저자의 이런 작업은 별다른 반성 없이 서양의 지적 전통에 기대어, 동양적 현상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지적 안일함에 대해서 반성하게 한다. 조선적인 것은 서양 근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비교 접근 대상으로서 미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이런 문제는 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특히 더 염두에 둬야 할 것같다.안일한 재생산이 아닌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찬 도전적인 재생산을 충동질하는 이런 책은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학자이다. 경계선에 가로놓인 위치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싶다. 이상의 시를 번역하고 연구한 월터 류의 위치와 가능성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