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wasulemono > 일급 개그맨의 기하학 강좌
유클리드의 창 - 기하학 이야기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분야의 책을 읽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서의 목적은 새로운 지식과 미적 체험에 있지 않을까 싶다. 평소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야의 지식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열어 주는 책이야 우리 주변에 넘쳐 나지만, 해당 분야의 문외한까지 끈기를 잃지 않게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멋진 책 한 권을 접하면서 흥분하는 경험은 독서 애호가로서는 적잖은 기쁨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 자랑스러울 일은 아니지만, 평소 나는 자연과학의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수학자나 물리학자를 생각하면 '저네들은 뜬구름 잡는 몽상가나 현실 부적응자일 거야'라며 가벼운 조소를 날리는 것이 나이다.(나 역시 그들과 호형호제할 수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모처럼 결심을 하고 이 쪽 분야의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을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이 책이다. 유클리드, 이름은 뉴스에서 대통령 이름만큼이나 많이 들었으면서도 정작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도 아는 바 없었고, 아인슈타인이 왜 천재라고 불리는지 큰 관심도 없었던 터에 기하학의 역사를 개괄하는 이 책은 나에게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이 책은 해당 방면 문외한으로서는 그다지 쉽지는 않은 책이다. 다 읽고 나서도 기하학의 수 천 년 역사에 대해서 개략적인 윤곽만 잡았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나는 독서 후 굉장한 포만감을 느꼈다. 지식의 차원에서 보면 사람들의 생애를 약간 훑었다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겼던 셈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전문 지식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일은 전문지식 그 자체에 깊이 탐닉하여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대중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중을 상대로 전문 지식을 지루한 감 없이 전달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의 저자 몰로디노프는 일급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거의 천부적인 개그맨이다. 실재의 추상에 의존할 수 없는 기하학의 특성상 공리나 명제만을 다룬다면 그 얼마나 지루할까.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아들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하고, 할리우드 코메디의 기지 넘치는 대사를 연상할 정도로 센스가 대단한 사람이다. 기하학 책을 읽으면서 박장대소한다는 일이 과연 상상이나 가능한 일일까. 이 불가능한 사건을 현실화하고 있는 이 저자의 재치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좋은 책은 관심을 증폭시키고 새로운 책을 찾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그 책은 독서의 긍정적 이미지를 보유하고 독서의 즐거움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좋은 책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이번에는 무슨 책을 찾아볼까 즐거운 고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이 책을 출판한 까치 출판사는 이 나라의 지식 보급 역사에서 길이 남을 출판사라는 생각이 든다. 까치는 존경스러운 출판사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이 사람 좀 이상한데...'라며 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진리이다. 까치 출판사 책을 사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며, 읽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다시 보게 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