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hadrianus75 > 유비와 표상, 그리고 의미
마술 과학 인문학 - 유럽 지적 담론의 지형
이종흡 지음 / 지영사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푸코의 '말과 사물'이 비워 놓은 여백의 공간을 거칠게나마 이어 놓은 역작이다. '말과 사물'에 한 번쯤 심취해 본 독자라면, 푸코가 에페스테메라는 지식 발생의 세 가지 토대를 제시하면서 그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그에게는 기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또 모든 현상들이 배경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지식의 단절성이라는 테마를 흐릴 수 있기에 그러한 그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침묵은 푸코에게 맡겨두자. 그의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 할지라도 호기심은 침묵을 말하게 할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말 드물게도 푸코의 첫번째 침묵에 대해 이야기를 건다. 르네상스 시기의 인식방법론에서 고전주의 시기의 인식방법론으로의 이동, 즉 유비 체계에서 표상체계로의 전환, 또 인문학의 형성과정이 비학의 전통과 프랜시스 베이컨, 지암바티스타 비코를 중심으로 밀도있게 펼쳐진다. 실제로 이 세 테마는 푸코가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했던 철학 들이다.  하지만 푸코에게서나 저자에게서나 중요한 것은 논의의 내용들보다는 논의되는 방식들, 개념을 형성하는 방식들, 그리고 그와 연계된 정치적 정당성의 획득이다. 폐쇄적 비학담론은 평면적 표상체계를 통해 누구나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과학의 담론으로 펼쳐지며, 다시 표상담론의 평면성은 인문학을 통해 그 의미의 깊이를 확보해낸다. 비학은 과학의 기둥이 되며, 과학은 인문학의 터전이 된다.

비학, 베이컨, 비코라는 세 인물에 치중하여 각 시대적 특성을 전반적으로 그려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지만, 각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지식 형성의 독특한 국면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푸코가 서로 떨어져 있는 지식 체계들의 매끈한 경계선들을 그었|다면, 저자는 이 체계들이 모순 속에서 얽혀 공존하는 경계선의 복잡다단함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훨씬 고되겠지만, 루소와 칸트를 기점으로 한 고전주의에서 19세기 담론으로의 전환에도 이와 유사한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으리라. 또 저자가 다루는 시기의 다른 사상가들의 인식론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는 중세와 어떤 다른 관계를 맺는지, 14세기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캄의 인식론적 변혁은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 서양 지성사의 여백을 우리가 색칠하고 침묵을 말하게 할 때,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서양의 모습, 우리와 이야기하는 서양의 지성이 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잔혹한 신의 선물, 자살
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가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우리 사회 전체에 죽음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바로 그런 시기에 이 책이 옮겨졌다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원제는 "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이다. 말그대로 "잔혹한 신: 자살의 연구"인 셈이다. 얼마 전 나는 게르트 미슐레의 "자살의 문화사"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바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자살 보다는 죽음(Thanatos) 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고, 공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논할 수 있으리요"만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사실상 한 몸이기에 나는 에로스의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 셈이 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애에 대한 탐구이며 동시에 예술의 기본 재료들에 대한 탐구이다.

에로스는 궁극적으로 타나토스에 매혹되어 있으며 타나토스는 파괴의 신이자 동시에 생명의 신이란 점에서 언제나 에로스를 꿈꾼다. 모든 예술가들, 사람들에겐 근본적으로 생의 충동 즉 자기보존의 성적 충동을 표현하는 에로스와 이에 대립되는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어로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죽음 충동이 있다. 타나토스란 결국 "삶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이고, 에로스는 “자연에서 삶을 퍼 올리는 생식”을 의미한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으므로 당연히 섹스와 죽음은 모든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가지로 변주되더라도 결국 이 둘 사이로 귀결된다.

A. 알바레즈에겐 또 개인적으로 이런 극한의 경험을 한 사람을 직접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의 서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이다.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라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키는 시를 지은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며, 동시에 현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의 자살을 그는 가까이에서 목도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미국 보스톤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의 딸로 태어났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세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8살 때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비아 플라스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아홉 살 때 첫 번째 자살 시도를 벌인다. 대학시절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플라스는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중에 알게 된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실비아 플라스는 1962년 자신의 집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세 번째 자살 시도가 유일한 성공이자 실패였다고 A. 알바레즈는 말한다.

대개 책의 원제에 "Study"란 말이 붙는 책은 읽기 쉽지 않다. A. 알바레즈의 이 책은 자살의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 자살이 생을 종결짓는 한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용인되었던 고대 희랍 세계와 문학, 자살이 죄악시되던 기독교 사회에 이르는 - 여러 사례들을 다룬다. 그러므로 나머지 장들을 모두 읽었다면(이건 분명히 약간의 엄살이긴 하지만) 당신은 자살에 대해 나름의 식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앞의 1장 부분 실비아 플라스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며, 그것으로도 제 몫을 다 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옮긴 이인 시인 최승자는 우리에게 "개같은 가을"을 선사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번역은 대개 언제나 믿을 만하며,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비록 이 말이 그녀에게 찬사가 될 수 없음을 나 자신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왜 예술가들은 그토록 죽음에 대해 예민한 걸까. 그것은 이미 앞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의미 부여가 그들을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지표 생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즉, 어느 지역의 생태계에서 특정한 생물이 살 수 없다면 그 지역의 생태계가 어느 정도 파괴되고, 오염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그 생물 말이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한 명의 괴짜, 혹은 바보, 혹은 괴물이, (종종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견딜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병든 사회란 것을 의미한다. 한 명의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음에 맞먹을 치욕을 사회적 징벌로서 받게 된다면 그 사회는 병들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A.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를 통해 문학과 죽음, 예술의 창조자이자 동시에 사회의 파괴자로 기능하는 예술가들의 상상세계에 죽음(타나토스)의 그림자를 연구했다.(내 딴엔 짧게 쓰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혹시 자살-행동으로 취할 자살 말고-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6.25란 전쟁은 없었다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 있는 박태균 선생의 책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을 읽으며(나오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하룻밤새 읽을 수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나와야 할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며 수백 번에 이르는 외침을 이야기하지만, 한국사적으로가 아닌 국제사적으로 의미가 큰 전쟁이라 한다면 고구려와 수의 전쟁, 제1차 조일전쟁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이다. 현재에 와서는 어느 정도 "한국전쟁"이라고 정리되는 듯 한데, 사실 한국전쟁만큼 많은 별칭으로 불린 전쟁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동란이나 사변이란 명칭은 어느 정도 관변화된 명칭이라 할 수 있고, 학문적으로 중립적이라 할 수 없기에 요사이는 대개 "한국전쟁"으로 정리되고 있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얼핏보면 사변이나 동란보다는 가치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명칭인 "6.25"에 대해 의미있는 분석을 가하고 있는데("전쟁과 사회", 돌베게), '6.25'라는 개념 규정 속에는 이미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란 구호로 집약되는, 즉 전쟁 책임자가 누구냐? 그것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도록 강제하는 요소가 잠재해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온 나라가 전쟁 개시 일자인 6.25를 기념하고, 서울 한복판에 전쟁기념관을 세워놓고 이를 (평화가 아닌) 기념하는 기이한 결과를 만들었다. 전쟁 개시일은 기억하고, 기념해도 휴전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는 심리 구조는 우리 사회를 늘 전시체제로 몰아가고, 전시체제 혹은 전시동원체제는 군부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모든 억압을 안보로 치환하여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기이한 심리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을 잠재적인 노이로제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한국전쟁에 대해 고민해야 할 부분은 우선 이런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나 자신의 심리구조는 이미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책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종전 협정이 아닌 휴전 협정이라는 정치현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최근 동국대 강정구 교수 파문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전쟁은 현재 우리 사회, 남북한 모두에게 있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현재 진행형의 전쟁이며, 우리 사회의 지배질서를 구축한 이들의 마음 속은 여전히 전시(戰時) 상황이다. 남북한의 지배계급들은 비록 이념적으로는 큰 편차를 보이지만, 분단상황을 그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히하는 데 이용했다는 점을 놓고 보자면 분단의 주범까진 아니더라도 종범에는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박태균 선생의 글들을 평소 여러 차례 접해왔고, 그의 입장을 대체로 알고 있는 편이므로 과감하게 입장 정리를 시도해보면 우선 박태균은 이념적으로 좌우를 막론하고 특정한 정치적 패러다임에 의존한 역사해석을 지양하는 편이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중립적이고 가능한 일일까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최소한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편이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그러하기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을 놓고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 박태균의 개인 이력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역사 대중화라는 쉽지 않은 일을 비교적 꾸준하게 진행해 온 학자다. 그는 "인물현대사""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주전공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묻혀버린 인물과 사건들을 재발견하는데 일조해 왔다. 이 책 "한국전쟁" 역시 그런 역사 대중화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편견들을 빚어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개인적인 생각 중 하나는 지나치게 일국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일국사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란, 그것도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하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전쟁을 동란이나 사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감정적이란 한계가 있으며,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어렵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한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강정구 교수의 접근 방식도 이런 혐의로부터 완전히(대체로 자유롭지만 일부는) 자유로울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당시 소련), 일본, 중국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한국전쟁에 대한 감정적 찌꺼기, 이념적 혼란을 거둬내고 바라본다면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배와 대소련 봉쇄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미국의 이해관계와 소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그 주된 전장을 한반도로 삼은 국제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의 서부개척의 역사가 완료된 이후 지속적으로 태평양 진출을 꾀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과 맞물려 있다. 미국은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하와이를 병합하고, 필리핀을 식민화한 뒤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 이때 미국은 유럽의 식민 헤게모니 대결이 결국 무력을 이용한 전쟁(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면서 사실상 세계 유일의 열강으로 떠오른다. 결국 미국은 일본과 아시아 패권을 놓고 태평양 전쟁을 치른 뒤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일본을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아메리카나이제이션하여 최종적인 경쟁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한반도는 그 부수적인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란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들이 실제로 한반도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반증해준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정치, 전략적으로 그다지 의미있는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물론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고, 박태균 선생 역시 그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문제는 당시 남북한의 지도층이 국제정세를 읽는 식견이 부족했고, 분단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정세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한 측면(혹은 분단 체제가 오더라도 이것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낙관이 도리어 전쟁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이 박태균의 견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정치 질서가 비교적 안정되어가던 시기에 벌어졌으며, 북한의 남침으로 촉발되었든, 아니든 간에 한국전쟁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일제 식민 질서가 빚어낸 미완의 민족해방(이것을 이념적으로 이해하지 마시라. 그것이 남북한 모두의 현단계 지배계급이 원하는 바다)을 완수하려 했던 전쟁이란 것이 본질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 책의 특기할 점 가운데 하나는 북한의 의도가 애초에 제한전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으나 전쟁이 너무 손쉽게 전개된 나머지 무리하게 확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남한과 미국에 의해 반복된다.

언젠가 맥아더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충 요사이 이야기되었던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은 그의 공과와 상관없이 즉, 표면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와 있으며 어느 부분이 한계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보수를 흉보는 거야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테니 일부 진보세력의 맥아더 동상 철거 이슈화에 대해 약간의 흉을 보자. 우선 개인적으로 철거하자는 의견엔 동의하지만 그보다는 이전하자는 쪽이다. 그들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철거해버리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며, 마음의 총독부는 고스란히 둔채, 외형상 존재하는 조선총독부 건물만 허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는 훨씬 더 잔인한 방법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 건물을 포크레인으로 일거에 때려부수는 이벤트 대신에 조선총독부 건물 밑 바닥 땅을 파내어 총독부 건물이 자체의 무게로 서서히 침강해 들어가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짧게는 한 100년, 길게는 1,000년에 걸쳐 서서히 침강해 경복궁 앞 마당으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건물 구조는 그대로인 채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건물은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하고 우리는 지하에 묻힌 총독부 건물을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건물은 부서졌고, 친일진상규명은 온갖 잡소리들에 시달린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란 획기적인 시도는 그 뜻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네들도 그 일이 지금 당장 시도하여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다만 균열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 덕분에 맥아더가 이 땅에 핵폭탄 26기를 투하하자는 과감한 주장을 했던 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우리 땅에서 맥아더 동상의 철거가 더이상 이슈로 떠오르지 않는 날이 오길 희망한다. 그때쯤이면 그 동상이 거기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우스워 보일 것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상황이란 두 가지를 상정한다. 하나는 그것이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반항이다. 지금 맥아더 동상이 자유공원에 여태 서 있는 까닭은 이 땅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들의 사회의식이 아직 그 동상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 동상에 거기 서 있도록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무관심은 그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박태균은 38선 이북으로 북진이 전략적인 실패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얼마전 인천 자유공원(개인적으로는 자유공원보다는 이전의 명칭이었던 만국공원이란 명칭을 좀더 선호하긴 하지만)의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촉발된 일련의 논쟁들을 통해 우리는 박태균의 이 저서가 어떻게 논거로 응용되고 있는지 살필 수 있었다. 물론 박태균의 입장과 주장이 그로부터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에서도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고, 역사학계도 일반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하나의 추세로 보인다. 그 자신도 여러 저서들로부터 도움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떤 연구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만한 연구 토대가 구축된 뒤에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이런 당연한 상식을 지금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은 최근에 불거진 강정구 교수 파문 때문인데, 위의 말을 반복해보면 강정구 교수에게 들씌워진 학문외적인 작태들은 학문의 자유니, 양심의 자유니 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우리 사회의 노이로제, 강박관념이 그 원인일 뿐, 강정구 교수의 발언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말하고자 꺼낸 말이다. 이미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고, 주장해온 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만경대 방명록 파문의 당사자였다는 점, 꾸준히 우리 사회의 군사독재문제, 사회적 이슈들에 발언해온 이라는 미운 털 때문에 도처에서 그를 공격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지배계급과 그에 기생하는 이들(혹은 나도 모르게 길들여진)이 벌이는 일종의 이슈 파이팅일 뿐 실제 사실과는 전혀 관련 없는 논박이다. 그런 점에서 박태균의 "한국전쟁"은 매우 실증적인 외형을 갖추는 형식을 통해 이런 공격들로부터 나름대로 잘 빠져나가고 있다. (그 점도 신기하긴 하다. 박태균 선생께 조금 죄송한 말이긴 하지만 박태균이 강정구와 크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는 구속하잔 말이 없는 건지. 브레히트처럼 나서서 "내 책도 태워다오"라고 외쳐야 하는 건 아닌지...) 대중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드문 책이란 점에서 특히 돋보인다.

박태균의 "한국전쟁"이 이전의 연구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한국전쟁의 책임을 외세에 의한 것으로만 치부하지 않는 점이다. 최근의 우리 모습을 보면 그의 이런 지적은 뼈아프긴 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의 책임으로부터 우리들은 자유로운가. 우리는 최근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해프닝들을 통해 과거사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깨우치고 있다. 역사는 과거에 묻힌 고리타분하고 퀘퀘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기억을 위해 벌이는 기억 투쟁의 장이다. 누군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애쓰고 있다. 투쟁하지 않으면 당신의 기억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될 것이다.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 나머지 이야기는 책을 보시라. 이런 책에 말하긴 너무 경박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 어떤 무협지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어깨에 힘을 좀 빼고 편하게 보아도 좋은,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 책이다. 왜? 우리는 이미 한국전쟁의 당사자로서 너무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선 과도한 긴장을 풀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허구의 전선에서 현실의 참호로...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나남신서 1004
김진석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인은 무엇인가? 지식인은 누구인가?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를 묻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있다. 이때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사람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물을 뿐 어째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제갈량과 정약용이 살던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도 '현실 참여'와 '안빈낙도' 사이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과 달리 이 시절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엔 마르크스가 말하는 그런 류의 "소외 현상"은 없었다. 188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사이 서구 사회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사상 유례없는 대변동의 시대를 경험했다. 정치적으론 프랑스 대혁명 이래 꾸준히 지속되어온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정치 혁명이 나름의 결실을 맺으며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권의 제한이란 사회 위계질서의 마지막 정치(형식)적 보루가 해체되었다.

보통선거 이전의 정치란 교양인들(소위 지식인들)의 몫이었다. 이제 지식인들이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대중이란 필터를 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이제  과거 노동자들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듯, 그들의 지식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렇기에 지식인의 위기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항상 구체적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그는 항상 구체적 해답을 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식인에게 사회가 부여한 책무이자 동시에 지식인 스스로가 자신에게 내린 책무이다. 지식인이 맞닥뜨리는 구체적 사실이란 현실이자,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사건이다. 지식인들 앞엔 매일매일 해석과 분석을 요구하고 있는 새로운 사건들이 터져나온다.

오늘날 파시즘은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이기 보다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감이 있다. 그러나 로버트 O. 팩스턴의 말처럼 "환호하는 군중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버리면 파시즘의 출현이 "한나라의 결함있는 역사가 파시즘을 탄생시켰다는 겸손한 듯 오만한 믿음"을 품게 만든다. 팩스턴은 이런 손쉬운 믿음이 "쉽게 파시즘을 방관하는 국가들의 알리바이로 바뀔 수 있다. 즉, 자기네 나라는 그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즉, 파시즘은 단순히 민족적 증오를 부추기는 능력이 있는 파시즘 지도자의 카리스마 탓만도, 문제 있는 역사의 결과만도 아니란 것이다. 대중의 동의없이 파시즘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김진석의 책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의 글은 때로 단호하게, 때로 솔직하게, 때로 부드러운 어조를 구사하면서 마치 '패스트리(pastry)'처럼 여러 겹으로 겹친 이론과 현실의 자장 사이를 "포정의 칼"처럼 움직여 나간다. 머리말에서 김진석은 "파시즘이나 극우 세력처럼 거대하고 명백한 악이 있는 듯 하지만, 문화권력의 경우처럼 문화에 관한 세심한 구별이 요구되는 폭력"도 있다고 말한다.

"폭력과 파시즘을 비판하는 일에는 이상한 맹점이 있다. 이것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열성이 지나친 나머지, 알게 모르게 모든 폭력을 파시즘과 동일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모든 폭력적 경향이나 제도들이 그 자체로 악이며 따라서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은 거기서 불과 한 걸음 거리에 있다. 도덕적 근본주의. 여기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일상생활의 관습과 제도 속에 조금이라도 폭력의 기미가 있으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기 또 파시즘이 있다!'라고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는 지식인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 평화주의에 근거하여 보통 세속인들이 실행하는 다소 복잡한 모양의 행위와 실천에 모두 폭력의 낙인을 찍는 지식인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가 그 이념에서 현실적 폭력을 반대하기에 실제로도 폭력과 뚝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에!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이런 근본주의도 폭력적 성향을 띤다. 폭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탈이 없는 이상주의 같지만, 어떤 폭력적 실천이든 파시즘이라고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즉시 그것도 또한 그것에 고유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를 테면 사제적 권력의 전통."

지식인 김진석은 이렇듯 자청하여 "여러 차원에서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운다." 스스로 싸우기를 자청하여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문제의 여러 결들을 짚어간다. 그 와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그의 고백대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다.

"폭력뿐 아니라 근본주의는 어떤 차원에서는 그저 분석하거나 서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폭력과 근본주의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싸우는 방식을 자청했다. ...<중략>... 힘든 이유는 그렇게 글과 담론을 통해 양쪽으로 싸워도, 결국은 현실의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바닥에서 기기 때문이다.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현실의 바닥에서 기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철학적 글쓰기는 "사회와 정치의 바닥, 밑바닥으로 내려와서 기어야 했다. 특별한 혹은 뛰어난 개인들의 정신적 성취를 목표로 삼는 대신, 세속적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의 존재를 성찰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어떤 이는 우리 사회는 행동이 과소하고 말과 글이 과대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 우리 사회의 말과 실천의 비율에선 압도적으로 실천이 과소하나,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엔 이 둘 모두 절대적으로 과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김진석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이 책은 그가 계간 "사회비평"의 편집주간을 맡아 보면서 그간 우리 사회의 "폭력과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그가 그때그때 발언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의 연원이 그런 탓에 읽는 중간중간에 다소 겹치는 부분도 보이지만, 그의 비판이 보여주는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이 책은 전체 4부 - "제1부 안티조선에서부터, 제2부 통제권력에 시달리는 자율, 제3부 위험한 근본주의에 빠진 파시즘론, 제4부 개혁을 위한 철학" - 로 구성되어 있다. 안티조선 문제에서는 강준만 중심의 안티조선 운동이 지닌 선명성에 비해 대중들의 내면화된 지배논리가 강조되는 차원에서는 어떤 대응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응 차원의 빈곤함을 지적한다. 김진석은 과연 안티조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여러 운동 가운데 배타적 우선권을 부여받아야 할 만큼 시급하고 긴급한 문제인가를 반문한다. 극우경향에서는 조선일보가 제일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다른 유사한 악덕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안티조선운동이 비판의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선명성을 주장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대오의 단일화만을 강조해 냉정하고 섬세한 비판의 가능성, 즉 유연성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다.

무엇보다 김진석의 비판이 가장 날카롭게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3부 "위험한 근본주의에 빠진 '일상적 파시즘론'과 비폭력주의 - 임지현과 문부식, 그리고 박노자"에 대한 것이다. 김진석은 근대적 국가권력과 제도 전체를 '악'(때로는 절대악)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전면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는 임지현, 문부식, (박노자) 등의 '우리안의 파시즘' 논의가 지닌 맹점, 사회내의 모든 권력(혹은 권위)를 파시즘과 맹목적으로 동일화하면서 현실적으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어 보이는  '유토피아'적 상태를 상정하는 것 자체를 또 다른 폭력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박노자를 괄호 안에 집어 넣은 것은 임지현, 문부식과 조금 다르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박노자에 대한 비판 역시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문제들이 민중을 과도하게 메시아적 변혁의 주체로 삼는 민중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성찰한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략>... 이런 내면적 성찰을 실행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의 폭력에 대해서만 저항하는 태도가 일면적이라는 점도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지식인이라면 어렴풋이 알려진 사실이더라도 새로운 개념을 빌려 설명하려는 욕구와 의무가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임지현과 <당대비평>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이론적 틀의 소유권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그 개념 자체가 공허해질 정도로 그것을 총체화시켰을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이중적 결과를 낳은 듯 하다."

민중을 변혁의 주체라고만 보는 민중주의가 형이상학적 오류에 빠졌다면, 거꾸로 임지현의 비판, 민중이 무조건 억압되어 있기에 전면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에 못지 않게 형이상학적이며 관료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권력을 추방해야 할 것처럼 주장하면서도 어떤 저항이 조금이라도 권력을 행사하면 서슴없이 끝내는 저항운동 자체가 권력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을 가하는 파시즘의 낙인을 찍을 준비를 한다. '일상적 파시즘'의 주장이 위험한 것은 그 논리 내부에 있다.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도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미시 권력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기에 모든 저항이 권력과 파시즘 코드를 이미 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면, 저항 그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노자는 "폭력과 절대로 어떤 형태로든 인연(악연)을 맺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고 하는데, 그런 각오는 한 개인에게는 내면적 성찰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도 좀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화되고 제도화된 폭력은 군대나 궈투를 즐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경쟁적 교육환경 속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행위조차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다. 개인적 성실함은 암묵적으로 폭력적 구조를 용인하거나 추인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배타적으로 상징적 권력과 상징자본을 취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소련 체제에서 대학생은 병역을 면제받았기에, 그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폭력적 사회에서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도 특권적 집단에 속해야 한다는 평범하고도 무서운 진리가 확인되는 것이 아닐까."

김진석은 "박노자가 이처럼 '절대로 비폭력적인 양심'에 지나치게 호소할 때, 효과적 정치 경제적 관점이 많은 경우 근본주의"로 뒤덮히게 된다고 비판한다. '일상적 파시즘론'이 대중의 마음에 온통 파시즘의 낙인을 찍어놓고 권력과 국가로부터의 전면적 해방을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극우적 민족주의, 정치경제적 파시즘과 싸우는 실천적 차원에서 박노자의 양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차원으로 변환될 때 일상적 파시즘은 근본주의의 공허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진석이 폭력과 싸우며 동시에 폭력의 완전한 제거를 주장(혹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하는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얼핏 우리가 오래전부터 혐오해 마지 않던 양비론과 닮아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김진석의 좌충우돌을 양비론과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앞서 김진석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비판은 "현실의 바닥에서 기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대로 우리는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현실의 바닥에서" 기어갈 수 밖에 없다. 현실을 거세한 이론의 공허함으로 무장했을 때, 비록 미끈해 보이는 논리를 따르는 개인의 양심은 흡족할지 몰라도 그것은 더러운 땅을 여의고는 누구도 깨끗한 땅을 밟을 수 없다는, 땅에 넘어진 자 그 흙을 짚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다. 물론, 나는 김진석이 긋고 있는 전선의 동일한 위치에 서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긋고 있는 전선에 동의할 수는 있다. 그것이 내가 그의 이 책을 읽고 내렸던 결론이다. 현실의 바닥을 기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 동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wasulemono > 지상의 방 한 칸에서의 자기 대면
예술가로 산다는 것 -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
박영택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작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일간지 주말판 북가이드를 기다리고 뒤적이는 것만이 유일한 낙처럼 되어버린 그때 알게 되었고 기회만 닿으면 꼭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후 책을 읽을 시간이 적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는 반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왜 이 책에 마음이 이끌렸을까?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나는 아마도 '숨어사는 예술가'라는 말이 주는 그 어떤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렸던 게 분명하다. 문학, 미술, 음악 등에 한때 심취하고 그것에 자기 한 평생을 걸어보겠노라고 다짐했던 사람들은 '예술가'란 말이 주는 묘한 기대와 설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장사와 밥벌이로 비루해지고 예술마저 그 어떤 진정성도 내포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안락과 풍요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대면으로 질료만을 부여잡고 형상을 꿈꾸는 자들의 세계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신비롭다. 그들은 마치 불가의 선승처럼 일상의 번잡과 현란에 거리를 두고 지상 최저의 조건을 감수하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길어 올리는 데만 집중한다.

나는 그들이 적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존경스럽다. 여전히 현실의 부족과 앞날의 불투명함에 기죽고 불안해하면서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나가지 못하는 나 자신에 비할 때 그들은 너무나 단호하고 평온하다.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재보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일은 불편하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화가나 사진가는 하나의 캔버스, 한 장의 필름 위에 자신을 투사한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상을 정신 없이 흘러보내는 이미지 과잉 시대에 그런 그들의 작업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생계를 해결해줄 수도 없다. 집중을 요하는 작품 감상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에 사람들의 일상은 너무나 번잡하고, 그들의 작품은 상품을 장식하는 커버가 되기에는 너무 난해하거나 무겁다.

이 시대 예술의 존재 조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그들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은둔과 고독으로 이어진다. 일상의 버거움을 애써 던져버리고 찾은 깊은 산 외딴 골짜기에서 그들이 마주친 고독, 그 고독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대도시의 삶도 고독하긴 매한가지지만 외적인 풍요와 내적인 고독 사이의 불화에 너무나 익숙한 현대인에게 그들 예술가의 고독은 어쩌면 한 차원 높은 고독일 것이다. 그 차원 높은 고독을 그들이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그 고독만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대담해지고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 여기에는 '이 시대에'라는 수식어구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환쟁이라도 시대 환경에 따라 그들의 위치는 달라질 것이므로. 그러나 굳이 그런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의 예술가라도 고독과 궁핍은 그의 본질적 존재조건이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